13m도로, 백제의 미스터리 풀리나

입력 2016.11.16 (17:56) 수정 2016.11.1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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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몽촌토성

한강을 차지했던 고대 국가 백제. 하지만 초기 백제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고려중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즉위년(BC 18년)에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니 북으로 한수를 두고 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하남 위례성'은 어디일까.

안타깝게도 하남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역사 학계의 논란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할 때 한강 이남에서 백제 도입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두 곳 정도다. 그렇다면 둘 중에 과연 어디가 백제의 왕성이었을까.

풍납토성 Vs. 몽촌토성

서울 천호대교에서 천호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큰 언덕이 보인다. 얼핏 보면 풍납동 일대 주택가와 도로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흙더미가 바로 '풍납동 토성'이다. 토성은 북쪽과 동쪽, 남쪽벽이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다

풍납토성풍납토성

풍납토성에서 남동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으로 불리는 '몽촌산성'이다. 몽촌산성을 감싸는 공원이 올림픽 공원이다.

몽촌토성몽촌토성

역사 학계의 주목을 먼저 받은 곳은 몽촌토성이었다. 몽촌토성은 1983년부터 89년까지 서울대박물관, 숭실대박물관, 한양대박물관, 단국대박물관 등이 발굴 조사를 벌여 백제 한성 도읍기 때의 도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997년 백제사 연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역 재개발 사업을 위해 사전 발굴을 하던 풍납토성에서 막대한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분위기는 확 변했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풍납토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

예를 들어 풍납토성의 경당지구에서 나온 유구 중에는 말(馬)의 머리뼈가 많이 나왔다. 말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재산이었고, 또 군사력을 위한 핵심 장비였다. 이런 유물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학계는 몽촌토성을 왕성이었던 풍납토성에 딸린 성 정도로 격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13m 도로 발견, 백제의 비밀은 풀리나

이런 분위기가 다시 바뀔 만한 발굴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이 몽촌토성의 북문 터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 폭이 13m에 달하는 도로 유적을 찾아냈다고 지난 14일 발표했다. 이 도로는 너비 9.7m의 중심 도로 옆에 폭 2.7m의 길이 나란히 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발굴에 대해 전문가들은 몽촌토성이 풍납토성의 배후성이 아니라 풍납토성과 짝을 이루는 도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흔적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흔적

발굴단은 몽촌토성 안쪽에서 북문을 지나 바깥쪽까지 이어지는 이 도로를 백제가 처음 개설해 사용하다 한 차례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후대에는 고구려가 개축해 이용한 사실도 밝혀냈다.

이 길은 북문 바깥쪽에서 40m 정도 나아가다 풍납토성 방향인 북서쪽으로 휘어진다. 풍납토성은 몽촌토성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는데, 이 도로가 두 성을 잇는 대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중균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사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도로 유적의 폭이 보통 6~8m을 고려하면 몽촌토성 도로는 매우 넓다"며 "몽촌토성의 중심도로는 폭이 3m정도 되는 도로를 양 옆에 둔 1도(道), 3로(路)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토기 조각도 관심을 끈다. 이번에 발견된 수혈유구(구덩이 흔적) 18기 중 한 곳에서는 관청을 의미하는 관(官)자가 찍힌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박물관 측은 "대규모 도로유적이나 '관'자 토기 발견은 몽촌토성이 백제의 또 다른 도성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몽촌토성 유물 조사에서 발견된 수혈유구 18기 중 한 곳에서는 관(官)자가 찍힌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이번 몽촌토성 유물 조사에서 발견된 수혈유구 18기 중 한 곳에서는 관(官)자가 찍힌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초기 백제의 ‘투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역사학자들 중 다수는 백제의 왕궁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있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풍납토성이 왕궁성이었음을 추정하는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다. 남쪽에 왕릉군으로 추정하는 석촌동 방이동 고분군 등 대형 분묘가 밀집 분포돼 있는 것은 가장 큰 이유다.

몽촌토성의 북문지 일원 발굴을 통해 나온 중국청자 시유도기 조각몽촌토성의 북문지 일원 발굴을 통해 나온 중국청자 시유도기 조각

삼국사기에 의하면 초기 백제는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 공존했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한성백제 최후의 날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고구려군이 '북성'을 7일 만에 함락하고, 이어 '남성'을 공격하자 백제왕이 이곳에서 도망치다가 붙들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역사 기록과 최근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학자들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초기 백제 시대에 짝을 이뤄 보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외대 여효규 교수는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종합할 때 북성은 풍납토성, 남성은 몽촌토성(한성)이라는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한성백제의 임금은 풍납도성에 주로 머물고, 군사적 필요에 따라 방어용 배후 산성인 몽촌산성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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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m도로, 백제의 미스터리 풀리나
    • 입력 2016-11-16 17:56:46
    • 수정2016-11-16 18:23:14
    취재K
몽촌토성 한강을 차지했던 고대 국가 백제. 하지만 초기 백제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고려중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즉위년(BC 18년)에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니 북으로 한수를 두고 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하남 위례성'은 어디일까. 안타깝게도 하남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역사 학계의 논란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할 때 한강 이남에서 백제 도입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두 곳 정도다. 그렇다면 둘 중에 과연 어디가 백제의 왕성이었을까. 풍납토성 Vs. 몽촌토성 서울 천호대교에서 천호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큰 언덕이 보인다. 얼핏 보면 풍납동 일대 주택가와 도로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흙더미가 바로 '풍납동 토성'이다. 토성은 북쪽과 동쪽, 남쪽벽이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다 풍납토성 풍납토성에서 남동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으로 불리는 '몽촌산성'이다. 몽촌산성을 감싸는 공원이 올림픽 공원이다. 몽촌토성 역사 학계의 주목을 먼저 받은 곳은 몽촌토성이었다. 몽촌토성은 1983년부터 89년까지 서울대박물관, 숭실대박물관, 한양대박물관, 단국대박물관 등이 발굴 조사를 벌여 백제 한성 도읍기 때의 도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997년 백제사 연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역 재개발 사업을 위해 사전 발굴을 하던 풍납토성에서 막대한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분위기는 확 변했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 예를 들어 풍납토성의 경당지구에서 나온 유구 중에는 말(馬)의 머리뼈가 많이 나왔다. 말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재산이었고, 또 군사력을 위한 핵심 장비였다. 이런 유물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학계는 몽촌토성을 왕성이었던 풍납토성에 딸린 성 정도로 격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13m 도로 발견, 백제의 비밀은 풀리나 이런 분위기가 다시 바뀔 만한 발굴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이 몽촌토성의 북문 터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 폭이 13m에 달하는 도로 유적을 찾아냈다고 지난 14일 발표했다. 이 도로는 너비 9.7m의 중심 도로 옆에 폭 2.7m의 길이 나란히 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발굴에 대해 전문가들은 몽촌토성이 풍납토성의 배후성이 아니라 풍납토성과 짝을 이루는 도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흔적 발굴단은 몽촌토성 안쪽에서 북문을 지나 바깥쪽까지 이어지는 이 도로를 백제가 처음 개설해 사용하다 한 차례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후대에는 고구려가 개축해 이용한 사실도 밝혀냈다. 이 길은 북문 바깥쪽에서 40m 정도 나아가다 풍납토성 방향인 북서쪽으로 휘어진다. 풍납토성은 몽촌토성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는데, 이 도로가 두 성을 잇는 대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중균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사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도로 유적의 폭이 보통 6~8m을 고려하면 몽촌토성 도로는 매우 넓다"며 "몽촌토성의 중심도로는 폭이 3m정도 되는 도로를 양 옆에 둔 1도(道), 3로(路)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토기 조각도 관심을 끈다. 이번에 발견된 수혈유구(구덩이 흔적) 18기 중 한 곳에서는 관청을 의미하는 관(官)자가 찍힌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박물관 측은 "대규모 도로유적이나 '관'자 토기 발견은 몽촌토성이 백제의 또 다른 도성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몽촌토성 유물 조사에서 발견된 수혈유구 18기 중 한 곳에서는 관(官)자가 찍힌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초기 백제의 ‘투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역사학자들 중 다수는 백제의 왕궁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있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풍납토성이 왕궁성이었음을 추정하는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다. 남쪽에 왕릉군으로 추정하는 석촌동 방이동 고분군 등 대형 분묘가 밀집 분포돼 있는 것은 가장 큰 이유다. 몽촌토성의 북문지 일원 발굴을 통해 나온 중국청자 시유도기 조각 삼국사기에 의하면 초기 백제는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 공존했다고 한다. 삼국사기가 한성백제 최후의 날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고구려군이 '북성'을 7일 만에 함락하고, 이어 '남성'을 공격하자 백제왕이 이곳에서 도망치다가 붙들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역사 기록과 최근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학자들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초기 백제 시대에 짝을 이뤄 보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외대 여효규 교수는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종합할 때 북성은 풍납토성, 남성은 몽촌토성(한성)이라는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한성백제의 임금은 풍납도성에 주로 머물고, 군사적 필요에 따라 방어용 배후 산성인 몽촌산성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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