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부터 2016년까지…촛불시위의 진화

입력 2016.11.25 (16:10) 수정 2016.1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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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지난 12일 민중총궐기와 19일 4차 범국민대회는 100만 명의 시민이 평화시위를 벌여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6일 진행될 5차 범국민대회는 사상 최대 촛불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된 촛불시위의 변화를 살펴본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화염병 대신 촛불 든 시민의 등장

과거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국내 촛불시위는 1970년대부터 등장한다. 가두집회가 엄격하게 제한된 상황에서 촛불시위는 대학가 학내 집회나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기도회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됐다.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본격 동참한 것은 1987년 6.10 민주항쟁부터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금지하자, 민주화를 원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반발해 도심 시위를 벌였다. 6월 10일 시위를 마친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 점거농성에 들어가면서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의 구심점이 된다.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에 김수환 추기경은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도 밟고 가십시오"라고 맞섰다.

명동성당 농성은 5일간 지속되다 자진 해산으로 끝을 맺었다. 농성이 끝난 6월 15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한 시국미사가 열렸다. 명동성당에서 먼저 천막농성을 하다 6.10 항쟁 시위대의 숙식을 도맡았던 상계동 철거민들과 퇴근길에 합류한 넥타이 부대가 학생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 메웠다.

군사독재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들었던 시위대를 대신해 평화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었다. 만 5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촛불시위가 처음으로 명동에서 펼쳐졌다.

2002년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나온 촛불

촛불시위가 광장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 것은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부터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시에서 신효순, 심미선 양이 훈련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졌다. 그러나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장갑차를 운전한 미군 2명은 무죄를 선고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의 개정 필요성을 촉발시켰다.

11월 30일 '앙마'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이 광화문 교보빌딩 앞 촛불시위를 제안하면서 1만 개의 촛불이 켜졌다. 참가자들은 미국의 폭력에 대비해 평화와 추모의 상징으로 촛불을 내세웠다. 12월 14일 시청 앞 촛불시위는 10만 명이 참가하며 절정을 이뤘다.

2002년 촛불시위는 정부청사와 청와대, 미국대사관 등이 밀집한 도심의 광장, 시민의 자발적인 제안, 조직화되지 않은 다양한 시민과 10대 청소년의 참여,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시위 중계, 문화제 형식의 진행 등 이후 촛불시위의 특징이 된 새로운 시위문화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2004년 탄핵 반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의 확산

한번 광장에서 켜진 촛불은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와 국회가 국민의 뜻을 벗어날 때마다 켜졌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연달아 벌어졌다. 3월 20일 시위에서는 경찰 추산 13만, 주최 측 추산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탄핵 무효를 외쳤다.

2008년에는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에 반발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촛불집회에는 교복을 입고 참여해 자유발언을 하는 '촛불소녀'와 유모차를 태우고 참가한 여성의 참여가 도드라졌고, 날마다 축제와 같은 문화제가 펼쳐져 주목받았다. 5월 2일 시작된 촛불시위는 8월 15일까지 전국에서 2400여 차례 계속됐고 경찰 추산 연인원 93만 명이 참가했다.

대규모 시위가 촛불시위로 정착된 것은 평화시위를 바라는 성숙한 시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 야간 집회를 금지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다.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정치적 구호가 제창된 점 등을 이유로 대법원은 2002년 촛불시위 주도자들을 유죄로 판단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는 정부가 시위대의 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로 바리케이드를 만든 이른바 '명박산성'을 쌓고 일반교통방해죄 등 다양한 명목의 법을 적용하면서 1476명이 입건되기도 했다.

촛불시위의 성과, 선거 주기와 연계해 수용돼

학계에서는 촛불시위가 우리 민주주의가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평가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민주주의가 제도화됐지만, 선거가 끝나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종종 배제된다. 촛불시위는 국민들이 직접 강력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자 할 때 등장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촛불시위의 성과 또한 선거 주기와 연계되어 제한적으로 수용됐다. 2002년 촛불시위는 평등한 한미관계를 주장한 노무현 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듬해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소파 협정 개정도 장기 과제로 미루어졌다. 파병 반대 촛불시위가 또다시 일어났지만 임기 초반 일어난 촛불시위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의 정당성 때문에 정책으로 반영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2008년 촛불시위는 미국 정부와 추가협상을 이끌어냈지만, 임기 첫해였던 이명박 정부는 대규모 촛불시위의 기반이 된 다양한 정치적 요구와 국정기조 전환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2008년 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이른바 '촛불후보'였던 주경복 후보를 누르고 공정택 후보가 당선되면서 촛불시위는 급격히 동력을 잃었다.

2016년 촛불시위는 지난 촛불시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2016년 촛불시위는 임기말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일어났다. 또한 1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운집하는 등 그 규모도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150만 명 이상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5차 범국민대회는 내일(26일) 열린다. 촛불시위의 새로운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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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부터 2016년까지…촛불시위의 진화
    • 입력 2016-11-25 16:10:03
    • 수정2016-11-25 16:12:55
    취재K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지난 12일 민중총궐기와 19일 4차 범국민대회는 100만 명의 시민이 평화시위를 벌여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6일 진행될 5차 범국민대회는 사상 최대 촛불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된 촛불시위의 변화를 살펴본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화염병 대신 촛불 든 시민의 등장 과거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국내 촛불시위는 1970년대부터 등장한다. 가두집회가 엄격하게 제한된 상황에서 촛불시위는 대학가 학내 집회나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기도회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됐다.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본격 동참한 것은 1987년 6.10 민주항쟁부터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금지하자, 민주화를 원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반발해 도심 시위를 벌였다. 6월 10일 시위를 마친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 점거농성에 들어가면서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의 구심점이 된다.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에 김수환 추기경은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도 밟고 가십시오"라고 맞섰다. 명동성당 농성은 5일간 지속되다 자진 해산으로 끝을 맺었다. 농성이 끝난 6월 15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한 시국미사가 열렸다. 명동성당에서 먼저 천막농성을 하다 6.10 항쟁 시위대의 숙식을 도맡았던 상계동 철거민들과 퇴근길에 합류한 넥타이 부대가 학생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 메웠다. 군사독재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들었던 시위대를 대신해 평화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었다. 만 5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촛불시위가 처음으로 명동에서 펼쳐졌다. 2002년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나온 촛불 촛불시위가 광장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 것은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부터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시에서 신효순, 심미선 양이 훈련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졌다. 그러나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장갑차를 운전한 미군 2명은 무죄를 선고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의 개정 필요성을 촉발시켰다. 11월 30일 '앙마'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이 광화문 교보빌딩 앞 촛불시위를 제안하면서 1만 개의 촛불이 켜졌다. 참가자들은 미국의 폭력에 대비해 평화와 추모의 상징으로 촛불을 내세웠다. 12월 14일 시청 앞 촛불시위는 10만 명이 참가하며 절정을 이뤘다. 2002년 촛불시위는 정부청사와 청와대, 미국대사관 등이 밀집한 도심의 광장, 시민의 자발적인 제안, 조직화되지 않은 다양한 시민과 10대 청소년의 참여,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시위 중계, 문화제 형식의 진행 등 이후 촛불시위의 특징이 된 새로운 시위문화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2004년 탄핵 반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의 확산 한번 광장에서 켜진 촛불은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와 국회가 국민의 뜻을 벗어날 때마다 켜졌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연달아 벌어졌다. 3월 20일 시위에서는 경찰 추산 13만, 주최 측 추산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탄핵 무효를 외쳤다. 2008년에는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에 반발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촛불집회에는 교복을 입고 참여해 자유발언을 하는 '촛불소녀'와 유모차를 태우고 참가한 여성의 참여가 도드라졌고, 날마다 축제와 같은 문화제가 펼쳐져 주목받았다. 5월 2일 시작된 촛불시위는 8월 15일까지 전국에서 2400여 차례 계속됐고 경찰 추산 연인원 93만 명이 참가했다. 대규모 시위가 촛불시위로 정착된 것은 평화시위를 바라는 성숙한 시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 야간 집회를 금지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다.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정치적 구호가 제창된 점 등을 이유로 대법원은 2002년 촛불시위 주도자들을 유죄로 판단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는 정부가 시위대의 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로 바리케이드를 만든 이른바 '명박산성'을 쌓고 일반교통방해죄 등 다양한 명목의 법을 적용하면서 1476명이 입건되기도 했다. 촛불시위의 성과, 선거 주기와 연계해 수용돼 학계에서는 촛불시위가 우리 민주주의가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평가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민주주의가 제도화됐지만, 선거가 끝나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종종 배제된다. 촛불시위는 국민들이 직접 강력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자 할 때 등장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촛불시위의 성과 또한 선거 주기와 연계되어 제한적으로 수용됐다. 2002년 촛불시위는 평등한 한미관계를 주장한 노무현 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듬해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소파 협정 개정도 장기 과제로 미루어졌다. 파병 반대 촛불시위가 또다시 일어났지만 임기 초반 일어난 촛불시위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의 정당성 때문에 정책으로 반영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2008년 촛불시위는 미국 정부와 추가협상을 이끌어냈지만, 임기 첫해였던 이명박 정부는 대규모 촛불시위의 기반이 된 다양한 정치적 요구와 국정기조 전환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2008년 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이른바 '촛불후보'였던 주경복 후보를 누르고 공정택 후보가 당선되면서 촛불시위는 급격히 동력을 잃었다. 2016년 촛불시위는 지난 촛불시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2016년 촛불시위는 임기말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일어났다. 또한 1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운집하는 등 그 규모도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150만 명 이상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5차 범국민대회는 내일(26일) 열린다. 촛불시위의 새로운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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