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레이디 수잔’ 밀당과 작업의 고수

입력 2016.12.01 (14:40) 수정 2016.12.01 (14:4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마흔 두 살의 짧은 생애에서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을 남겼다. 그런데 사후에 원고가 더 발견되었다. 하나같이 퇴락한 영국 명문귀족(gentry) 집안 아가씨를 둘러싼 연애이야기이다. 결혼도 안한 작가의 똑같은 레퍼토리이지만 놀랍게도 그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소설은 끊임없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중에는 대만출신의 이안 감독이 만든 <센스 앤 센스빌리티>도 있고, 할리우드가 만든 <브릿지 존스의 일기>도 있다. 물론, 이것은 ‘오만과 편견’을 재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또 한편의 제인 오스틴 영화가 등장했다. <레이디 수잔>이다. 원제는 ‘사랑과 우정’(Love & Friendship)으로 훨씬 제인 오스틴스럽다. 그런데,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이 19살 무렵에 쓴 소설이 원작이란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데뷔소설 <이성과 감성>(1811년 출간)보다 먼저 집필된 소설이란 것이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 사후, 1871년에야 처음 출판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소설 <레이디 수잔>이 최근 번역 출간되었다. 서한집 형식이다. 그러니까. ‘A’가 ‘B’에게, ‘B’가 ‘C’에게, ‘C’가 ‘D’에게 식으로 서로 오가는 편지형태의 소설이다. 편지속 내용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사귀고, 헤어지고, 연애하고, 뒷담화 나누는 것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8세기 영국 퇴락가문답게 고고한 듯 세속적으로, 우아한 듯 통속적인 연애담이 유려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영국 런던 출신의 케이트 베켄세일이라는 아름다운 여배우가 연기하는 ‘수잔’은 지금 막 미망인이 되었다. 남편이 죽자 살 길(?)이 막막하다. 딸 프레데디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까. 그녀가 가진 것은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언변. 그것을 무기로 영국 귀족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우정으로, 때로는 동정으로 남녀불문 사람들을 유혹하고 조종한다.

그녀의 속셈은 딸 프레데리카를 돈 많고 멍청한 귀족 제임스 경과 결혼시키는 것. 그런데, 잠시 얹혀사는 시동생의 대저택에서 자신과 밀회를 즐기던 젊은 남자 레지널드가 프레데리카와 사랑에 빠지면서 계획은 헝클어진다. 그래도 그녀에겐 빛나는 미모와 유연한 생존본능이 있잖은가. 최악의 순간에서도 빠져나갈 재능이 넘쳐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흥미진진한 드라마적 요소가 넘친다. 그런 제인 오스틴이 십대에 습작으로 쓴 ‘레이디 수잔’에는 넘치는 패기와 소녀적 감성이 녹아있다. 후기 작품들과는 비교되는 특별함이 분명 있다. 이 소설을 영국의 위트 스틸먼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레이디 수잔’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렇고 그런 여자 주인공들 중 유일한 ‘악녀 캐릭터’란다. 사악한 악녀라기보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인, 혹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캐릭터이다. 다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랑을 얻기 위해 고민하지만 레이디 수잔은 자신의 노후를 완벽하게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술수와 쇼, 농간을 적절히 부리는, 그러면서도 유머감을 잃지 않은 ‘현대적 사랑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좋게 말하자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대단히 앞서가는 페미니스트인 셈. 따지고 보면 그녀 때문에 손해 본 사람은 없고, 그녀 때문에 행복했거나, 행복을 찾았으니 최선이 아니겠는가.

마치 BBC드라마를 보는 듯한 중후한 진행방식(새로운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자막이 등장한다!), 시대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운 영국의 성들과 가옥, 그리고 화려한 시대의상 등이 제인 오스틴 드라마의 묘미를 더한다. 거기에 마크 수오조 음악감독이 들려주는 바로크 음악은 타인의 시선과 세간의 평가를 더 중시하던 그 시대의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귀족사회의 우울함과 은밀함에 강약을 집어넣는다.

케이트 베킨세일을 위시한 영국 배우들의 악센트로 가득한 영화 <레이디 수잔>은 지금 연애를 하는 자, 밀회를 즐기는 자에게 우아한 통속드라마의 숙성된 풍미를 전해준다. (박재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리뷰] ‘레이디 수잔’ 밀당과 작업의 고수
    • 입력 2016-12-01 14:40:09
    • 수정2016-12-01 14:43:10
    TV특종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마흔 두 살의 짧은 생애에서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을 남겼다. 그런데 사후에 원고가 더 발견되었다. 하나같이 퇴락한 영국 명문귀족(gentry) 집안 아가씨를 둘러싼 연애이야기이다. 결혼도 안한 작가의 똑같은 레퍼토리이지만 놀랍게도 그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소설은 끊임없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중에는 대만출신의 이안 감독이 만든 <센스 앤 센스빌리티>도 있고, 할리우드가 만든 <브릿지 존스의 일기>도 있다. 물론, 이것은 ‘오만과 편견’을 재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또 한편의 제인 오스틴 영화가 등장했다. <레이디 수잔>이다. 원제는 ‘사랑과 우정’(Love & Friendship)으로 훨씬 제인 오스틴스럽다. 그런데,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이 19살 무렵에 쓴 소설이 원작이란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데뷔소설 <이성과 감성>(1811년 출간)보다 먼저 집필된 소설이란 것이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 사후, 1871년에야 처음 출판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소설 <레이디 수잔>이 최근 번역 출간되었다. 서한집 형식이다. 그러니까. ‘A’가 ‘B’에게, ‘B’가 ‘C’에게, ‘C’가 ‘D’에게 식으로 서로 오가는 편지형태의 소설이다. 편지속 내용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사귀고, 헤어지고, 연애하고, 뒷담화 나누는 것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8세기 영국 퇴락가문답게 고고한 듯 세속적으로, 우아한 듯 통속적인 연애담이 유려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영국 런던 출신의 케이트 베켄세일이라는 아름다운 여배우가 연기하는 ‘수잔’은 지금 막 미망인이 되었다. 남편이 죽자 살 길(?)이 막막하다. 딸 프레데디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까. 그녀가 가진 것은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언변. 그것을 무기로 영국 귀족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우정으로, 때로는 동정으로 남녀불문 사람들을 유혹하고 조종한다.

그녀의 속셈은 딸 프레데리카를 돈 많고 멍청한 귀족 제임스 경과 결혼시키는 것. 그런데, 잠시 얹혀사는 시동생의 대저택에서 자신과 밀회를 즐기던 젊은 남자 레지널드가 프레데리카와 사랑에 빠지면서 계획은 헝클어진다. 그래도 그녀에겐 빛나는 미모와 유연한 생존본능이 있잖은가. 최악의 순간에서도 빠져나갈 재능이 넘쳐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흥미진진한 드라마적 요소가 넘친다. 그런 제인 오스틴이 십대에 습작으로 쓴 ‘레이디 수잔’에는 넘치는 패기와 소녀적 감성이 녹아있다. 후기 작품들과는 비교되는 특별함이 분명 있다. 이 소설을 영국의 위트 스틸먼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레이디 수잔’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렇고 그런 여자 주인공들 중 유일한 ‘악녀 캐릭터’란다. 사악한 악녀라기보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인, 혹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캐릭터이다. 다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랑을 얻기 위해 고민하지만 레이디 수잔은 자신의 노후를 완벽하게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술수와 쇼, 농간을 적절히 부리는, 그러면서도 유머감을 잃지 않은 ‘현대적 사랑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좋게 말하자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대단히 앞서가는 페미니스트인 셈. 따지고 보면 그녀 때문에 손해 본 사람은 없고, 그녀 때문에 행복했거나, 행복을 찾았으니 최선이 아니겠는가.

마치 BBC드라마를 보는 듯한 중후한 진행방식(새로운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자막이 등장한다!), 시대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운 영국의 성들과 가옥, 그리고 화려한 시대의상 등이 제인 오스틴 드라마의 묘미를 더한다. 거기에 마크 수오조 음악감독이 들려주는 바로크 음악은 타인의 시선과 세간의 평가를 더 중시하던 그 시대의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귀족사회의 우울함과 은밀함에 강약을 집어넣는다.

케이트 베킨세일을 위시한 영국 배우들의 악센트로 가득한 영화 <레이디 수잔>은 지금 연애를 하는 자, 밀회를 즐기는 자에게 우아한 통속드라마의 숙성된 풍미를 전해준다. (박재환)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