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세 판! ‘다시 또 민주주의’ 이번에는…

입력 2016.12.02 (23:31) 수정 2016.12.0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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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실시됐다. 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12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이승만이, 또다시 불법적으로 정권 연장을 시도한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학생들을 시작으로 재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리고 4월 11일, 교복 차림의 시신 한 구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17살 김주열 군의 눈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참혹한 모습은 다음날 대서특필 되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수류탄 겉면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수류탄 겉면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계엄령 선포…경찰, 시민 향해 실탄 발사계엄령 선포…경찰, 시민 향해 실탄 발사

4월 19일 전국에서 동시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은 실탄 지급받아 시위대를 향해 쐈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110여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등 모두 180여 명이 4.19혁명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1960년 4월 25일, 국민학생들의 시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1960년 4월 25일, 국민학생들의 시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그러나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분노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궐기해 부패한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스스로 되찾은 것이다.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돼 있다.

힘 실어주니 ‘권력 싸움’…군사 정권 ‘1등 공신’

제2공화국이 탄생했고 국민은 민주당에 권한을 위임했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민주당이 분열했다. 혁명 이후 국민들은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빠른 안정과 발전을 기대했지만,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 싸움에 골몰했다. 사회적 혼란이 길어지며 사람들의 불만은 커졌고, 이 틈을 타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다.


박정희 당시 부사령관 등이 구성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하루 만에 나라를 장악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이 체제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독재로 이어졌다. 목숨을 바쳐 민주공화국을 이룩한 국민은 정치권의 무능 탓에 다시 길고 혹독한 유신 시절을 맞게 된 것이다.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일, 부산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일, 부산

그렇게 왜곡돼 흐르던 역사는 1987년 6월, 또 한 번의 민중봉기를 맞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 발표가 국민들의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켰다.


다시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군사정권이 백골단과 탱크를 앞세워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긴 세월 독재정권에 침묵함으로써 사실상 동조해왔던 '화이트칼라'들이 시위에 앞장선 것이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당시 대학생) 열사 피격1987년 6월 9일, 이한열(당시 대학생) 열사 피격

그리고 이 한 장의 사진이 6.10 민주항쟁에 불씨를 당겼다. 전두환 정권은 전국의 광장을 폐쇄하고 모든 길목을 차단하며 전면전을 벌였다. 이날 서울 시내에 투입된 병력만 160개 중대, 2만 2천여 명에 이른다. 당시 정치권과 공권력은 이들을 불순한 좌파 세력으로 몰고, 위기감을 조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밤이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고, 하루에 2만 발씩 쏘아대는 최루탄을 견디기 위해 기발한 방법들을 공유하며 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6월 29일, 서슬 퍼랬던 독재정권이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직선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다.

물안경, 비닐 봉지, 비닐 랩…매운 최루탄 가스 막으려 등장한 아이디어 소품들물안경, 비닐 봉지, 비닐 랩…매운 최루탄 가스 막으려 등장한 아이디어 소품들

‘1987년 6·29 선언’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1987년 6·29 선언’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

또 배신…국민은 승리, 정치는 패배

하지만 정치권은 또다시 국민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당시 야권의 거물이었던 김대중, 김영삼이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표가 나뉘어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다. 민중의 피와 목숨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군사정권 연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훗날 이 일에 대해 '천추의 한'이라고 털어놨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며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밝혔다.


광장에 다시 촛불이 물결치고 있다. 기회는 삼 세 번이라고 했다. 세 번째 거리로 나선 국민들이 정치권에 묻는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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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 세 판! ‘다시 또 민주주의’ 이번에는…
    • 입력 2016-12-02 23:31:40
    • 수정2016-12-05 09:26:57
    취재K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실시됐다. 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12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이승만이, 또다시 불법적으로 정권 연장을 시도한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학생들을 시작으로 재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리고 4월 11일, 교복 차림의 시신 한 구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17살 김주열 군의 눈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참혹한 모습은 다음날 대서특필 되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수류탄 겉면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계엄령 선포…경찰, 시민 향해 실탄 발사 4월 19일 전국에서 동시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은 실탄 지급받아 시위대를 향해 쐈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110여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등 모두 180여 명이 4.19혁명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1960년 4월 25일, 국민학생들의 시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그러나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분노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궐기해 부패한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스스로 되찾은 것이다.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돼 있다. 힘 실어주니 ‘권력 싸움’…군사 정권 ‘1등 공신’ 제2공화국이 탄생했고 국민은 민주당에 권한을 위임했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민주당이 분열했다. 혁명 이후 국민들은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빠른 안정과 발전을 기대했지만,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 싸움에 골몰했다. 사회적 혼란이 길어지며 사람들의 불만은 커졌고, 이 틈을 타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다. 박정희 당시 부사령관 등이 구성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하루 만에 나라를 장악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이 체제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독재로 이어졌다. 목숨을 바쳐 민주공화국을 이룩한 국민은 정치권의 무능 탓에 다시 길고 혹독한 유신 시절을 맞게 된 것이다.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일, 부산 그렇게 왜곡돼 흐르던 역사는 1987년 6월, 또 한 번의 민중봉기를 맞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 발표가 국민들의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켰다. 다시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군사정권이 백골단과 탱크를 앞세워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긴 세월 독재정권에 침묵함으로써 사실상 동조해왔던 '화이트칼라'들이 시위에 앞장선 것이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당시 대학생) 열사 피격 그리고 이 한 장의 사진이 6.10 민주항쟁에 불씨를 당겼다. 전두환 정권은 전국의 광장을 폐쇄하고 모든 길목을 차단하며 전면전을 벌였다. 이날 서울 시내에 투입된 병력만 160개 중대, 2만 2천여 명에 이른다. 당시 정치권과 공권력은 이들을 불순한 좌파 세력으로 몰고, 위기감을 조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밤이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고, 하루에 2만 발씩 쏘아대는 최루탄을 견디기 위해 기발한 방법들을 공유하며 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6월 29일, 서슬 퍼랬던 독재정권이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직선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다. 물안경, 비닐 봉지, 비닐 랩…매운 최루탄 가스 막으려 등장한 아이디어 소품들 ‘1987년 6·29 선언’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 또 배신…국민은 승리, 정치는 패배 하지만 정치권은 또다시 국민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당시 야권의 거물이었던 김대중, 김영삼이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표가 나뉘어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다. 민중의 피와 목숨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군사정권 연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훗날 이 일에 대해 '천추의 한'이라고 털어놨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며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밝혔다. 광장에 다시 촛불이 물결치고 있다. 기회는 삼 세 번이라고 했다. 세 번째 거리로 나선 국민들이 정치권에 묻는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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