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48억으로 삼성 경영권 “불법은 없었다?”

입력 2016.12.03 (10:03) 수정 2016.12.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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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삼성그룹 총수 일가를 위해 국민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전면적 수사에 나서면서,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은 많은 논란에 휘말리면서도 법적으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재벌들에게도 교과서나 참고서가 됐지요. 한국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부를 만들어가는 기법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방정식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다 담아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검찰 수사와도 관련된, 가장 중요한 줄기 하나만 따라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삼성가의 장자 이재용 씨가 48억 원을 5조 원으로 불리면서 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개별 사건들로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 많지만, 전체를 꿰어 들여다볼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경제 공부도 됩니다.

에버랜드 주인들, 헐값 ‘노다지’ 포기하다

20년 전인 1996년 10월부터 시작합니다. 놀이동산 운영이 가장 큰 사업이었던 주식회사 에버랜드가 당시로선 이름조차 생소한 '전환사채(CB)'라는 걸 발행합니다. 전환사채를 사두면 채권처럼 이자를 받다가 언제든 주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시 비상장 기업인 에버랜드의 장외시장 주가는 8만 5천 원을 넘었고, 세법상 가격은 12만 7천 원 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꿀 때 쳐주는 가격은 주당 7천7백 원. 말 그대로 헐값이었죠. 사두기만 하면 몇 배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에버랜드 이사회는 이 전환사채를 주주들(대부분 삼성 계열사)에게 배정하되, 주주가 포기하면 제3자에게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최대주주인 중앙일보(48%)를 비롯해 제일모직(14%), 삼성물산(5%) 등 계열사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전환사채를 사지 않았습니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유학생 이재용, 48억으로 놀이동산 최대주주

그러자, 에버랜드 이사회는 결의한 대로 제3자에게 배정합니다. 제3자는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이건희 회장의 4자녀(고 이윤형 씨 포함)로 결정됐습니다.

당시 미국 유학생인 28살 이재용 씨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60억 원(증여세 16억 낸 합법적 증여였습니다)으로 계열사 주식을 사고파는 재테크를 잘해서 2년 만에 6백억 원으로 불려둔 상태였습니다.

주주들이 100% 포기한 전환사채 가운데 절반을 이재용 씨가, 나머지 절반을 세 여동생이 사들였습니다. 이재용 씨가 낸 돈은 48억 3천만 원. 이 씨와 여동생들은 사들인 전환사채를 곧바로 주식으로 바꿨습니다.

전환가격이 워낙 쌌기 때문에 그렇게 바꾼 주식은 125만 주나 됐습니다. 그전까지 발행된 에버랜드 주식 전체(70만 주)보다 훨씬 많았지요. 이재용 씨는 전환사채 투자로 62만여 주를 갖게 돼 지분율 25.1%로 국내 최대 놀이동산 회사의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법대 교수 43명이 '태클'을 걸었습니다. 총수 일가를 위해 계열사들이 이익을 포기했다며 배임 등의 혐의로 이건희 회장과 에버랜드 사장 등을 고발했습니다. 재판은 1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관들은 6대 5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주주들이 스스로 손실을 감수한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불법은 없었던 겁니다.

[연관 기사] ☞ 12년 만에 ‘면죄부 판결’…의미와 파장은?

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①…계열사 일감으로 급성장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가 된 뒤 놀이동산 회사는 빠르게 몸집이 커져갔습니다. 1999년 4천억 원이던 자기자본이 증자 한 번 하지 않았는데 10년 뒤 2조 3천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놀이동산 운영을 넘어 건설과 급식, 건물관리 등으로 사업 확장을 잘해나간 덕분입니다.

에버랜드의 일감에 신경 써주는 '착한 기업'들이 많았기에 가능했습니다. 2013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살펴봤더니, 에버랜드는 삼성 계열사 43곳의 단체급식을 맡아서 연간 1조 4천억 원을 벌었더군요. 계열사들의 건물 관리도 비슷했습니다.

에버랜드의 내부거래 비중은 46% 선까지 치솟았습니다. 100원 가운데 46원을 계열사들에게서 번 겁니다. 요즘 같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없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불법은 없었습니다.

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②…삼성생명 사들여 ‘대박’

놀이동산 회사의 더 주목할 만한 변신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가 된 다음해인 1997년, 에버랜드는 사업과 전혀 관계없는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삼성생명 주식 42만 주(2.2%)를 1주당 9천 원에 샀습니다. 98년에는 훨씬 더 많이 사들입니다. 368만 주(20.7%)로 늘어납니다. 매입 가격은 역시 9천 원.

1년 뒤인 99년 삼성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때 이건희 회장이 갖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채권단에 내놓으며 주당 70만 원을 인정받았으니, 에버랜드는 선견지명을 갖고 '노다지'를 사들인 셈입니다.

이재용 씨 가족기업이 되다시피 한 에버랜드(이건희 일가 지분율 54%)에 누가 그렇게 많은 주식을 헐값으로 팔았을까요? 삼성 전·현직 임원 35명이었습니다. 이들 임원이 어떻게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 싼 값에 넘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병철 창업주의 지분이 임원들 명의로 숨겨져 있다가 상속세 없이 대물림된 것이란 의혹만 제기됐을 뿐, 불법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8년에 전·현직 삼성 임원들이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생명 지분 16%를 갖고 있다가 삼성 특검에 적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삼성생명은 고객들이 낸 보험료로 삼성전자 지분을 계속 사들여 최대주주가 됩니다. 에버랜드의 최대주주인 이재용 씨가 자연스럽게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겁니다.

에버랜드가 3백억 원 남짓으로 사들인 삼성생명 지분은 11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노다지'가 됩니다. 2010년 삼성생명이 증시에 상장돼 4조 원짜리 자산이 된 겁니다. 상호회사 성격이 강한 생명보험사의 상장 차익은 보험 계약자와 나눠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쟁이 거셌지만, 법원은 모두 주주의 몫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불법은 없었습니다.

[연관 기사] ☞ 삼성생명, 5백 원짜리가 11만 원으로

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③…‘삼성바이오’ 최대주주 되다

2011년 삼성그룹은 미래 성장동력으로 바이오제약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합니다. 계열사 돈을 모아 '삼성바이오로직스'라는 회사를 만듭니다. 최초 자본금 3천억 원을 삼성전자 40%, 에버랜드 40%, (구)삼성물산 10%, 외국인투자자 10%, 이렇게 나눠냅니다.


당시 증시는 기업 규모와 현금 동원력 등을 따져봤을 때 삼성전자와 에버랜드가 동일한 비율로 출자한 것을 의외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상 총수 가족기업에게 미래가치가 높은 사업 기회를 최대한 밀어준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코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삼성전자의 '통 큰 양보'는 에버랜드가 4년 뒤 삼성물산과 합병하면서 합병 비율을 산정할 때 유리한 고지에 오르는 '신의 한 수'가 됩니다.

제일모직(에버랜드) 상장, 48억 -> 3조 5천억

에버랜드는 2013년 말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을 인수하고, 회사 이름도 제일모직으로 바꿉니다. (뉴)제일모직(에버랜드)은 오랜 은둔 생활(비상장)에서 벗어나 2014년 12월 증시에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형제 기업들이 일감을 꾸준히 밀어주고, 삼성생명을 싸게 사들여 '대박'을 터뜨리고, 삼성전자와 동등한 지분으로 미래 사업을 이끌고 있으니, 투자자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상장 첫 날, 이재용 씨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는 3조 5천억 원이 됐습니다.


이재용 씨는 1996년 48억 원을 투자한 뒤 단 한 주도 사거나 팔지 않고 주식을 그대로 보유해왔습니다. 에버랜드 경영에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의 철학처럼, 놀이동산 회사의 미래를 잘 내다보고 장기투자를 했을 뿐입니다.

[연관 기사] ☞ 삼성SDS 이어 제일모직까지…편법 승계 논란 가열

(뉴)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3조 5천억 -> 5조

아직 갈 길이 남았습니다. 삼성그룹은 (뉴)제일모직이 데뷔한 지 1년도 안 돼 삼성물산과 합치기로 합니다. 두 회사가 힘을 모으면 사업에 시너지(상승) 효과가 생길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증시에서는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등이 탐나는 데 삼성물산 주식이 별로 없어서 고민인 총수 일가를 위한 '묘수'라고 봤습니다.

이재용 씨는 제일모직 지분 23.2%를 갖고 있었고, 삼성물산 주식은 한 주도 없었습니다. 이러면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할수록 통합 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의 지분율이 높아지고, 계열사 지배력도 강해집니다.

하지만, 합병 비율은 증시에서 주가로 결정되고, 합병 시점은 두 회사의 경영진이 판단합니다. 아무리 총수 일가라 해도 합병 비율을 유리하게 만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재용 씨에게는 운이 잘 따라주는 것 같습니다. 합병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제일모직 주가는 꾸준히 오르고 삼성물산 주가는 내려갔습니다.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에 따라 주식을 사고파는 국민연금도 공교롭게 모직은 사고 물산은 팔면서 제일모직 주가가 오르고 삼성물산 주가가 내려가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경영진은 하필이면 삼성물산 주가가 낮고 제일모직 주가가 높은 시점에 합병 결정을 내렸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없었습니다.

제일모직 1주가 삼성물산 3주의 가치를 갖는다는 1:0.35의 합병 비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제일모직이 투자한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의 존재였습니다. 증시는 삼바의 미래 가치가 높다며 매우 후한 평가를 해줬습니다.

합병 때까지 제일모직이 삼바에 투자한 금액은 4천 8백억 원이었는데, 합병 비율을 계산할 때 제일모직의 삼바 지분가치는 6조 6천억 원으로 평가(국민연금공단)받았습니다. 투자를 시작한 지 4년,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 기업의 가치가 투자금의 10배 넘게 평가받은 겁니다.

큰 형님 삼성전자를 비롯한 형제 회사들의 양보로 알짜배기 미래 기업의 최대주주가 된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두 회사의 합병을 통해 이재용 씨의 제일모직 지분 23.2%는 통합 삼성물산 지분 16.5%로 바뀌었습니다. 재용 씨는 제일모직(에버랜드)의 최대주주였을 뿐 삼성물산 주식은 한 주도 없었는데, 합병으로 탄생한 거대 삼성물산에서 최대주주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지난해 9월 통합 삼성물산이 상장된 첫날, 이재용 씨가 보유한 지분 16.5%의 가치는 5조 1천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3조 5천억 원이 합병을 거치면서 9개월 새 1조 6천억 원 더 늘어난 셈입니다.

자산만 늘어난 게 아닙니다. 옛 삼성물산이 갖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1%를 이재용 씨가 통제할 수 있게 된 게 어쩌면 더 중요한 소득일 겁니다.

‘최순실 게이트’로 큰 고비…불법은 계속 없을까

1996년의 48억 원은 이렇게 20년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5조 원으로 불어났습니다. 유학생 이재용 씨는 주식 48억 원어치를 꼭 쥐고만 있었을 뿐인데, 삼성그룹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대체로 운이 좋았고 주변의 배려와 양보를 종종 받았을 뿐 불법은 없었습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이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와 얽힌 의혹이 일면서 큰 고비를 맞고 있지만, "불법은 없었다"는 이재용 씨의 신화가 깨질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연관 기사] ☞ ‘최순실-삼성-국민연금?’ 정말 국민을 배신했나

우리 사회에는 세습을 통한 삼성의 경영권 안정과 국민경제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권과 관료집단, 사법부, 언론계 등 이른바 '권력 집단'에서 그런 성향은 더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운을 좋게 만드는 큰 힘이었습니다. 그 기운은 여전히 강해 보입니다.

이재용 씨가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사들이던 무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두고두고 회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 후 20년, '이재용의 삼성'은 몇 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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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48억으로 삼성 경영권 “불법은 없었다?”
    • 입력 2016-12-03 10:03:07
    • 수정2016-12-05 17:42:11
    취재후·사건후
국민연금이 삼성그룹 총수 일가를 위해 국민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전면적 수사에 나서면서,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은 많은 논란에 휘말리면서도 법적으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재벌들에게도 교과서나 참고서가 됐지요. 한국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부를 만들어가는 기법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방정식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다 담아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검찰 수사와도 관련된, 가장 중요한 줄기 하나만 따라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삼성가의 장자 이재용 씨가 48억 원을 5조 원으로 불리면서 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개별 사건들로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 많지만, 전체를 꿰어 들여다볼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경제 공부도 됩니다.

에버랜드 주인들, 헐값 ‘노다지’ 포기하다

20년 전인 1996년 10월부터 시작합니다. 놀이동산 운영이 가장 큰 사업이었던 주식회사 에버랜드가 당시로선 이름조차 생소한 '전환사채(CB)'라는 걸 발행합니다. 전환사채를 사두면 채권처럼 이자를 받다가 언제든 주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시 비상장 기업인 에버랜드의 장외시장 주가는 8만 5천 원을 넘었고, 세법상 가격은 12만 7천 원 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꿀 때 쳐주는 가격은 주당 7천7백 원. 말 그대로 헐값이었죠. 사두기만 하면 몇 배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에버랜드 이사회는 이 전환사채를 주주들(대부분 삼성 계열사)에게 배정하되, 주주가 포기하면 제3자에게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최대주주인 중앙일보(48%)를 비롯해 제일모직(14%), 삼성물산(5%) 등 계열사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전환사채를 사지 않았습니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유학생 이재용, 48억으로 놀이동산 최대주주

그러자, 에버랜드 이사회는 결의한 대로 제3자에게 배정합니다. 제3자는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이건희 회장의 4자녀(고 이윤형 씨 포함)로 결정됐습니다.

당시 미국 유학생인 28살 이재용 씨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60억 원(증여세 16억 낸 합법적 증여였습니다)으로 계열사 주식을 사고파는 재테크를 잘해서 2년 만에 6백억 원으로 불려둔 상태였습니다.

주주들이 100% 포기한 전환사채 가운데 절반을 이재용 씨가, 나머지 절반을 세 여동생이 사들였습니다. 이재용 씨가 낸 돈은 48억 3천만 원. 이 씨와 여동생들은 사들인 전환사채를 곧바로 주식으로 바꿨습니다.

전환가격이 워낙 쌌기 때문에 그렇게 바꾼 주식은 125만 주나 됐습니다. 그전까지 발행된 에버랜드 주식 전체(70만 주)보다 훨씬 많았지요. 이재용 씨는 전환사채 투자로 62만여 주를 갖게 돼 지분율 25.1%로 국내 최대 놀이동산 회사의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법대 교수 43명이 '태클'을 걸었습니다. 총수 일가를 위해 계열사들이 이익을 포기했다며 배임 등의 혐의로 이건희 회장과 에버랜드 사장 등을 고발했습니다. 재판은 1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관들은 6대 5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주주들이 스스로 손실을 감수한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불법은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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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①…계열사 일감으로 급성장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가 된 뒤 놀이동산 회사는 빠르게 몸집이 커져갔습니다. 1999년 4천억 원이던 자기자본이 증자 한 번 하지 않았는데 10년 뒤 2조 3천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놀이동산 운영을 넘어 건설과 급식, 건물관리 등으로 사업 확장을 잘해나간 덕분입니다.

에버랜드의 일감에 신경 써주는 '착한 기업'들이 많았기에 가능했습니다. 2013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살펴봤더니, 에버랜드는 삼성 계열사 43곳의 단체급식을 맡아서 연간 1조 4천억 원을 벌었더군요. 계열사들의 건물 관리도 비슷했습니다.

에버랜드의 내부거래 비중은 46% 선까지 치솟았습니다. 100원 가운데 46원을 계열사들에게서 번 겁니다. 요즘 같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없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불법은 없었습니다.

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②…삼성생명 사들여 ‘대박’

놀이동산 회사의 더 주목할 만한 변신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가 된 다음해인 1997년, 에버랜드는 사업과 전혀 관계없는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삼성생명 주식 42만 주(2.2%)를 1주당 9천 원에 샀습니다. 98년에는 훨씬 더 많이 사들입니다. 368만 주(20.7%)로 늘어납니다. 매입 가격은 역시 9천 원.

1년 뒤인 99년 삼성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때 이건희 회장이 갖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채권단에 내놓으며 주당 70만 원을 인정받았으니, 에버랜드는 선견지명을 갖고 '노다지'를 사들인 셈입니다.

이재용 씨 가족기업이 되다시피 한 에버랜드(이건희 일가 지분율 54%)에 누가 그렇게 많은 주식을 헐값으로 팔았을까요? 삼성 전·현직 임원 35명이었습니다. 이들 임원이 어떻게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 싼 값에 넘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병철 창업주의 지분이 임원들 명의로 숨겨져 있다가 상속세 없이 대물림된 것이란 의혹만 제기됐을 뿐, 불법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8년에 전·현직 삼성 임원들이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생명 지분 16%를 갖고 있다가 삼성 특검에 적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삼성생명은 고객들이 낸 보험료로 삼성전자 지분을 계속 사들여 최대주주가 됩니다. 에버랜드의 최대주주인 이재용 씨가 자연스럽게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겁니다.

에버랜드가 3백억 원 남짓으로 사들인 삼성생명 지분은 11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노다지'가 됩니다. 2010년 삼성생명이 증시에 상장돼 4조 원짜리 자산이 된 겁니다. 상호회사 성격이 강한 생명보험사의 상장 차익은 보험 계약자와 나눠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쟁이 거셌지만, 법원은 모두 주주의 몫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불법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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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동산 회사의 변신 ③…‘삼성바이오’ 최대주주 되다

2011년 삼성그룹은 미래 성장동력으로 바이오제약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합니다. 계열사 돈을 모아 '삼성바이오로직스'라는 회사를 만듭니다. 최초 자본금 3천억 원을 삼성전자 40%, 에버랜드 40%, (구)삼성물산 10%, 외국인투자자 10%, 이렇게 나눠냅니다.


당시 증시는 기업 규모와 현금 동원력 등을 따져봤을 때 삼성전자와 에버랜드가 동일한 비율로 출자한 것을 의외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상 총수 가족기업에게 미래가치가 높은 사업 기회를 최대한 밀어준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코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삼성전자의 '통 큰 양보'는 에버랜드가 4년 뒤 삼성물산과 합병하면서 합병 비율을 산정할 때 유리한 고지에 오르는 '신의 한 수'가 됩니다.

제일모직(에버랜드) 상장, 48억 -> 3조 5천억

에버랜드는 2013년 말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을 인수하고, 회사 이름도 제일모직으로 바꿉니다. (뉴)제일모직(에버랜드)은 오랜 은둔 생활(비상장)에서 벗어나 2014년 12월 증시에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형제 기업들이 일감을 꾸준히 밀어주고, 삼성생명을 싸게 사들여 '대박'을 터뜨리고, 삼성전자와 동등한 지분으로 미래 사업을 이끌고 있으니, 투자자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상장 첫 날, 이재용 씨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는 3조 5천억 원이 됐습니다.


이재용 씨는 1996년 48억 원을 투자한 뒤 단 한 주도 사거나 팔지 않고 주식을 그대로 보유해왔습니다. 에버랜드 경영에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의 철학처럼, 놀이동산 회사의 미래를 잘 내다보고 장기투자를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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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갈 길이 남았습니다. 삼성그룹은 (뉴)제일모직이 데뷔한 지 1년도 안 돼 삼성물산과 합치기로 합니다. 두 회사가 힘을 모으면 사업에 시너지(상승) 효과가 생길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증시에서는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등이 탐나는 데 삼성물산 주식이 별로 없어서 고민인 총수 일가를 위한 '묘수'라고 봤습니다.

이재용 씨는 제일모직 지분 23.2%를 갖고 있었고, 삼성물산 주식은 한 주도 없었습니다. 이러면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할수록 통합 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의 지분율이 높아지고, 계열사 지배력도 강해집니다.

하지만, 합병 비율은 증시에서 주가로 결정되고, 합병 시점은 두 회사의 경영진이 판단합니다. 아무리 총수 일가라 해도 합병 비율을 유리하게 만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재용 씨에게는 운이 잘 따라주는 것 같습니다. 합병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제일모직 주가는 꾸준히 오르고 삼성물산 주가는 내려갔습니다.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에 따라 주식을 사고파는 국민연금도 공교롭게 모직은 사고 물산은 팔면서 제일모직 주가가 오르고 삼성물산 주가가 내려가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경영진은 하필이면 삼성물산 주가가 낮고 제일모직 주가가 높은 시점에 합병 결정을 내렸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없었습니다.

제일모직 1주가 삼성물산 3주의 가치를 갖는다는 1:0.35의 합병 비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제일모직이 투자한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의 존재였습니다. 증시는 삼바의 미래 가치가 높다며 매우 후한 평가를 해줬습니다.

합병 때까지 제일모직이 삼바에 투자한 금액은 4천 8백억 원이었는데, 합병 비율을 계산할 때 제일모직의 삼바 지분가치는 6조 6천억 원으로 평가(국민연금공단)받았습니다. 투자를 시작한 지 4년,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 기업의 가치가 투자금의 10배 넘게 평가받은 겁니다.

큰 형님 삼성전자를 비롯한 형제 회사들의 양보로 알짜배기 미래 기업의 최대주주가 된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두 회사의 합병을 통해 이재용 씨의 제일모직 지분 23.2%는 통합 삼성물산 지분 16.5%로 바뀌었습니다. 재용 씨는 제일모직(에버랜드)의 최대주주였을 뿐 삼성물산 주식은 한 주도 없었는데, 합병으로 탄생한 거대 삼성물산에서 최대주주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지난해 9월 통합 삼성물산이 상장된 첫날, 이재용 씨가 보유한 지분 16.5%의 가치는 5조 1천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3조 5천억 원이 합병을 거치면서 9개월 새 1조 6천억 원 더 늘어난 셈입니다.

자산만 늘어난 게 아닙니다. 옛 삼성물산이 갖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1%를 이재용 씨가 통제할 수 있게 된 게 어쩌면 더 중요한 소득일 겁니다.

‘최순실 게이트’로 큰 고비…불법은 계속 없을까

1996년의 48억 원은 이렇게 20년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5조 원으로 불어났습니다. 유학생 이재용 씨는 주식 48억 원어치를 꼭 쥐고만 있었을 뿐인데, 삼성그룹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대체로 운이 좋았고 주변의 배려와 양보를 종종 받았을 뿐 불법은 없었습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이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와 얽힌 의혹이 일면서 큰 고비를 맞고 있지만, "불법은 없었다"는 이재용 씨의 신화가 깨질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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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세습을 통한 삼성의 경영권 안정과 국민경제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권과 관료집단, 사법부, 언론계 등 이른바 '권력 집단'에서 그런 성향은 더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운을 좋게 만드는 큰 힘이었습니다. 그 기운은 여전히 강해 보입니다.

이재용 씨가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사들이던 무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두고두고 회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 후 20년, '이재용의 삼성'은 몇 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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