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① 러시아 월드컵 경기장에서 북한 노동자를 만나다

입력 2016.12.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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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기사] ☞ 러 월드컵 경기장 北노동자들…컨테이너 쪽잠 ‘노예노동’

모스크바 북서쪽,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난달 이름도 어려운 이 도시를 찾은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와 차이콥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화 예술을 취재하기 위해서도,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궁전과 사원들이 즐비한 이 도시를, 저는 북한 노동자를 만나보기 위해 찾았습니다.


북한은 세계 곳곳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돈의 70% 가량은 이른바 '충성자금'이라는 명목하에 북한 당국으로 들어가고 대부분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과 김정은 통치자금 등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보통 북한의 해외 파견노동자들을 '외화벌이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북한이 노동자들을 가장 많이 내보내는 국가는 중국이고 다음이 러시아입니다.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정치적 부침이 있긴 했지만, 러시아는 오랜 기간 스탈린식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의 후견국 역할을 해왔습니다. 1948년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 정권 수립을 주도한 나라가 구소련이니까요.

지금은 김일성 손자인 김정은이 3대 세습독재를 이어가고 있고, 러시아는 여전히 강력한 대북 제재 속에도 북한에 전력을 공급하거나 한·미·일의 독자제재를 비난하며 김정은 독재정권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습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는 3만 명에서 최대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과거에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일하는 벌목공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건설 노동자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 쪽, 모스크바보다 더 유럽에 근접한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많이 진출해있었습니다. KBS 취재팀도 북한 노동자를 만나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 건설현장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러시아 월드컵을 위해 건설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러시아 월드컵을 위해 건설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

도심에서 차로 30분. 취재진 눈앞에 공사가 한창인 대규모 경기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위해 건설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이었는데요. 경기장 주변에는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이 바쁘게 오가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벨이라는 러시아 현지 기자를 통해 최근 이곳에 북한 노동자들이 투입돼 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지지부진한 경기장 건설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됐다는 겁니다.


현지 노동자들에게 물어 찾아간 곳은 경기장 건설현장 바로 옆, 이른바 '컨테이너 시티'였습니다. 말 그대로 경기장 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각국 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컨테이너 촌입니다. 마치 적재된 화물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컨테이너는 노동자들의 숙소였고, 가까이에서 보니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했습니다. 취재팀은 이곳에서 현지인의 도움을 얻어 북한 노동자들의 숙소를 찾아냈습니다.


미로 같은 컨테이너 숲을 지나 그중 한 곳의 문을 열자 안에서 쉬고 있던 북한 노동자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1평, 그러니까 3.3 제곱미터 남짓한 컨테이너 안에는 북한 노동자 5명가량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2층 침대를 3개나 두었는데, 위 칸에 있는 사람은 몸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견 노동자로 일하다 올해 국내에 들어왔다는 한 탈북민은 취재진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놨습니다. 이곳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에서 최대 20시간까지 중노동을 하며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한 달에 손에 쥘 수 있는 노동의 대가는 50달러, 우리 돈 6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싼 임금에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항의 한 번 안 하는 북한 노동자들. 열악한 작업 환경에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1명이 숨졌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새해 첫날 1명이 분신했습니다. 극한 상황을 견뎌왔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분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한해,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 10여 명이 먼 타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한국 파독 광부 VS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

러시아로 떠나기 전, 과연 북한 노동자들을 노예노동에 시달린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작업환경이 열악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양에서 버는 것보단 낫다는 지적도 있었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한국에도 외화벌이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6, 70년대 한국의 파독 광부들 역시 이역만리 타지에서 힘든 생활을 했죠. 고된 채광작업에 못 견뎌 제3국으로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의 대가로 재산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은 다릅니다. 지급되는 임금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할당된 충성자금을 내지 못하면 오히려 빚만 떠안기도 합니다. 당 간부들이 중간에서 임금을 착복하고, '빚쟁이' 신분이라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오가도 못하는, 말 그대로 난민으로 전락하는 거죠.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내에도 여러 차례 보도됐죠.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이들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습니다. 힘없는 북한 노동자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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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① 러시아 월드컵 경기장에서 북한 노동자를 만나다
    • 입력 2016-12-28 15:37:13
    취재후·사건후
[연관기사] ☞ 러 월드컵 경기장 北노동자들…컨테이너 쪽잠 ‘노예노동’

모스크바 북서쪽,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난달 이름도 어려운 이 도시를 찾은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와 차이콥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화 예술을 취재하기 위해서도,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궁전과 사원들이 즐비한 이 도시를, 저는 북한 노동자를 만나보기 위해 찾았습니다.


북한은 세계 곳곳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돈의 70% 가량은 이른바 '충성자금'이라는 명목하에 북한 당국으로 들어가고 대부분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과 김정은 통치자금 등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보통 북한의 해외 파견노동자들을 '외화벌이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북한이 노동자들을 가장 많이 내보내는 국가는 중국이고 다음이 러시아입니다.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정치적 부침이 있긴 했지만, 러시아는 오랜 기간 스탈린식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의 후견국 역할을 해왔습니다. 1948년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 정권 수립을 주도한 나라가 구소련이니까요.

지금은 김일성 손자인 김정은이 3대 세습독재를 이어가고 있고, 러시아는 여전히 강력한 대북 제재 속에도 북한에 전력을 공급하거나 한·미·일의 독자제재를 비난하며 김정은 독재정권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습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는 3만 명에서 최대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과거에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일하는 벌목공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건설 노동자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 쪽, 모스크바보다 더 유럽에 근접한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많이 진출해있었습니다. KBS 취재팀도 북한 노동자를 만나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 건설현장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러시아 월드컵을 위해 건설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
도심에서 차로 30분. 취재진 눈앞에 공사가 한창인 대규모 경기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위해 건설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이었는데요. 경기장 주변에는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이 바쁘게 오가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벨이라는 러시아 현지 기자를 통해 최근 이곳에 북한 노동자들이 투입돼 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지지부진한 경기장 건설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됐다는 겁니다.


현지 노동자들에게 물어 찾아간 곳은 경기장 건설현장 바로 옆, 이른바 '컨테이너 시티'였습니다. 말 그대로 경기장 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각국 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컨테이너 촌입니다. 마치 적재된 화물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컨테이너는 노동자들의 숙소였고, 가까이에서 보니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했습니다. 취재팀은 이곳에서 현지인의 도움을 얻어 북한 노동자들의 숙소를 찾아냈습니다.


미로 같은 컨테이너 숲을 지나 그중 한 곳의 문을 열자 안에서 쉬고 있던 북한 노동자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1평, 그러니까 3.3 제곱미터 남짓한 컨테이너 안에는 북한 노동자 5명가량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2층 침대를 3개나 두었는데, 위 칸에 있는 사람은 몸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견 노동자로 일하다 올해 국내에 들어왔다는 한 탈북민은 취재진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놨습니다. 이곳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에서 최대 20시간까지 중노동을 하며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한 달에 손에 쥘 수 있는 노동의 대가는 50달러, 우리 돈 6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싼 임금에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항의 한 번 안 하는 북한 노동자들. 열악한 작업 환경에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1명이 숨졌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새해 첫날 1명이 분신했습니다. 극한 상황을 견뎌왔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분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한해,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 10여 명이 먼 타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한국 파독 광부 VS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

러시아로 떠나기 전, 과연 북한 노동자들을 노예노동에 시달린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작업환경이 열악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양에서 버는 것보단 낫다는 지적도 있었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한국에도 외화벌이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6, 70년대 한국의 파독 광부들 역시 이역만리 타지에서 힘든 생활을 했죠. 고된 채광작업에 못 견뎌 제3국으로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의 대가로 재산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은 다릅니다. 지급되는 임금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할당된 충성자금을 내지 못하면 오히려 빚만 떠안기도 합니다. 당 간부들이 중간에서 임금을 착복하고, '빚쟁이' 신분이라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오가도 못하는, 말 그대로 난민으로 전락하는 거죠.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내에도 여러 차례 보도됐죠.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이들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습니다. 힘없는 북한 노동자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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