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검사 못 믿겠다는 ‘미인도’ 유족, 판사는 어떨까?

입력 2016.12.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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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7개월여의 수사 끝에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지었으나 유족 측이 반발하며 법적 대응을 할 계획임을 밝혀 미인도 진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유족 측 변호인인 배금자 변호사는 검찰의 진품 결론은 황당하다며 내년 1월 중 고등검찰에 항고하고, 항고가 기각될 경우에 대비해 재정신청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관련 민사소송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인도 진위 여부 판정이 법정으로 갈 경우 최종심인 대법원까지 가는 지리한 싸움이 될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유족 측과 국립현대미술관이 25년간이나 자존심을 걸고 다툼을 벌여온 데다 국가기관인 검찰의 자존심과 신뢰마저 걸린 만큼 형사소송이나 민사소송의 각 당사자가 법원의 판결도 쉽게 수긍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전시를 하면서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를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며 소개하자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항의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천 화백은 이 작품의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 경위 등을 추적해 이 그림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1999년 고서화 위작 사건으로 구속된 권 모 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진술하면서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조범의 말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이때 천 화백은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과 함께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는 이른바 '절필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떠난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잠잠하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지난해 10월 천경자 화백의 별세가 확인되면서 다시 가열됐다. 천 화백의 사위인 문범강 조지타운대 교수는 기자 간담회에서 천 화백 생전에 확인한 결과 천 화백이 '자신은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라고 했다며 위작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미국에 사는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 씨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인도가 진품이 아닌 데도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6명을 고소 고발하면서 '미인도' 위작 여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12월 19일 검찰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수사결과를 설명하고 있다.12월 19일 검찰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수사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7개월여에 걸친 수사 끝에 지난 12월 19일 있었던 수사 결과 발표에서 검찰은 논란이 된 미인도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안목 감정은 물론 X선, 원적외선, 컴퓨터 영상 분석, DNA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총동원해 다양하게 검증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천 화백 특유의 작품 제작 기법이 미인도에 그대로 구현됐다고 판단했다. 여러 차례 두텁게 덧칠 작업을 하고, 희귀하고 값비싼 '석채' 안료를 사용한 점 등도 위작자의 통상적인 제작 방법과는 다르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육안으로 잘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이 1982년 작 '여인', 1977년 작 '후원' 등 천 화백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미인도에서도 나타나는 점을 주요 근거로 봤다.

수 없이 수정과 덧칠을 반복해 작품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천 화백의 독특한 채색기법도 판단의 잣대였다. 덧칠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그림 밑층에 다른 밑그림이 나타나는데 이는 천 화백의 1968년 작 '청춘의 문'에서도 나타난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위작의 경우 원작을 보고 그대로 베끼거나 약간의 변형을 가한 스케치 위에 짧은 시간 내에 채색을 하므로 다른 밑그림이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천 화백 유족 측과 피고소인 측, 미술계로부터 추천받은 전문가들의 안목 감정에서도 진품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고 한다. 추천을 받은 9명의 감정위원 대부분은 색채 사용과 두터운 덧칠, 붓터치, 선의 묘사, 밑그림 위에 수정한 흔적 등을 토대로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애초 미인도 위작자로 자처했다가 진술을 번복한 권 모 씨도 검찰 조사과정에서 미인도를 확인한 뒤 "명품에 가까운 수작이다. 위작 수준으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검찰은 또 미인도 유통 경로의 출발점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검찰에 따르면 1977년 천 화백이 중앙정보부 간부 오 모 씨의 부탁으로 미인도를 비롯한 그림 2점을 제공했고, 이 간부의 부인이 대학 동문인 김재규 부장의 부인에게 미인도를 다시 선물했다. 이어 김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인 1980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끌던 계엄사령부 산하 기부재산처리위원회에 미인도를 헌납했다. 이후 미인도는 당시 재무부와 문화공보부를 거쳐 그해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 최종 이관됐다. 미인도라는 이름도 당시 국가 감정 과정에서 붙여졌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이번 수사과정에서 유족 측의 의뢰로 미인도를 감정해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린 프랑스 감정회사 '뤼메이에르 테크놀로지'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층단층분석 기법을 통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에 숨겨진 그림을 찾아냈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이 회사 감정팀은 미인도를 촬영해 천 화백의 다른 진품 9개 작품과 비교 분석한 결과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론을 내고, 11월 초 미인도 감정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이 위작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한 계산식을 함께 비교한 다른 진품에 적용한 결과 진품 확률이 4%대로 낮게 나오는 등 감정 결과의 신빙성이 떨어져 결과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위의 여러 가지 사항을 근거로 검찰은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짓고, 고소·고발된 6명 가운데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5명은 무혐의 처분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정 모 씨에 대해서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25년을 끌어온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을 종결지었다.

12월 27일 유족 측 변호인 배금자 변호사가 향후 법적 대응을 설명하고 있다.12월 27일 유족 측 변호인 배금자 변호사가 향후 법적 대응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족 측과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유족 측 공동변호인단은 반박 보도자료에서 '미인도의 원 소장자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사실이 진품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미인도를 선물했다고 지목된 오 모 중앙정보부 대구분실장에 관한 이야기는 천 화백이 꺼낸 이야기이며, 오 씨가 그림을 가져간 사실은 있지만 '미인도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라고 밝혔다.


맨눈으로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이 확인됐다거나 희귀하고 값비싼 석채 안료를 사용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송곳 같은 도구로 본을 뜨는 것은 동양화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며 '암석에서 추출하는 석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누구나 쓸 수 있어서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검찰 진품 결론을 반박하는 천 화백 차녀 김정희 교수검찰 진품 결론을 반박하는 천 화백 차녀 김정희 교수

아울러 검찰이 X선·원적외선·컴퓨터 영상 분석·DNA 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동원했다고 한 데 대해서도 "원적외선 기법 등은 1950년대부터 사용했으며 첨단 기법과 거리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미술 전문가들의 '안목 감정'에 대해서도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12월 27일 장 페니코 뤼미에르 감정팀 사장이 검찰 수사를 반박하고 있다.12월 27일 장 페니코 뤼미에르 감정팀 사장이 검찰 수사를 반박하고 있다.

뤼메이에르 테크놀로지 장 페니코 사장도 12월 27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인도를 감정한 근거와 기법 등을 밝히며 위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외선에서 원적외선에 이르는 13개 스펙트럼 필터와 특수 카메라 렌즈를 활용해 그림 1개당 천650개의 단층을 촬영해 작품 간의 차이점을 분석했지만, 한국 검찰은 이를 참고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검찰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사용한 수학적 방법을 자체 실험에서 대입해 봤더니 진품조차 진품으로 나올 가능성이 4%라는 검찰 발표에 대해 "어떤 수식과 방법으로 계산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작품에서 위작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술품의 진위 여부는 대부분 과학적 감정과 안목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천경자·이우환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전문가를 자처하는 감정사들의 '감정' 결과는 물론이고, 권위 있는 수사기관의 결과에도 불복할 경우 논란이 장기화하며 미술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법정 싸움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시비를 바라보는 미술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의 마음도 우울하고 참담하다.


따라서 미술계는 거장들의 위작 논란을 계기로 미술품 거래가 투명하고 건전하게 이뤄질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술품 유통업 허가·등록기준 마련, 미술품 등록 및 거래 이력 신고제 도입, 미술품 유통 단속반 운영, 국가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술품 거래 투명화제도화에 따른 거래 위축을 방지하기 위해 중저가 미술품을 구입할 때 무이자로 대출하고, 미술품 양도세 과세 대상을 6천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리는 등의 시장 활성화 대책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인도는 위작 논란이 제기된 1991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수사 편의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서 나왔다. 법정 다툼이 진행될 경우 재판 편의를 위해 두 번째로 법정에도 나올 것이다. 미인도 진위 여부가 하루 빨리 판정돼 진품이든 위작이든 미인도가 어두운 수장고에서 나와 전시관의 밝은 세상에서 미술 애호가와 온 국민을 맞아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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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플러스] 검사 못 믿겠다는 ‘미인도’ 유족, 판사는 어떨까?
    • 입력 2016-12-30 18: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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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7개월여의 수사 끝에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지었으나 유족 측이 반발하며 법적 대응을 할 계획임을 밝혀 미인도 진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유족 측 변호인인 배금자 변호사는 검찰의 진품 결론은 황당하다며 내년 1월 중 고등검찰에 항고하고, 항고가 기각될 경우에 대비해 재정신청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관련 민사소송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인도 진위 여부 판정이 법정으로 갈 경우 최종심인 대법원까지 가는 지리한 싸움이 될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유족 측과 국립현대미술관이 25년간이나 자존심을 걸고 다툼을 벌여온 데다 국가기관인 검찰의 자존심과 신뢰마저 걸린 만큼 형사소송이나 민사소송의 각 당사자가 법원의 판결도 쉽게 수긍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전시를 하면서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를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며 소개하자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항의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천 화백은 이 작품의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 경위 등을 추적해 이 그림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1999년 고서화 위작 사건으로 구속된 권 모 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진술하면서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조범의 말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이때 천 화백은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과 함께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는 이른바 '절필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떠난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잠잠하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지난해 10월 천경자 화백의 별세가 확인되면서 다시 가열됐다. 천 화백의 사위인 문범강 조지타운대 교수는 기자 간담회에서 천 화백 생전에 확인한 결과 천 화백이 '자신은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라고 했다며 위작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미국에 사는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 씨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인도가 진품이 아닌 데도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6명을 고소 고발하면서 '미인도' 위작 여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12월 19일 검찰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수사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7개월여에 걸친 수사 끝에 지난 12월 19일 있었던 수사 결과 발표에서 검찰은 논란이 된 미인도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안목 감정은 물론 X선, 원적외선, 컴퓨터 영상 분석, DNA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총동원해 다양하게 검증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천 화백 특유의 작품 제작 기법이 미인도에 그대로 구현됐다고 판단했다. 여러 차례 두텁게 덧칠 작업을 하고, 희귀하고 값비싼 '석채' 안료를 사용한 점 등도 위작자의 통상적인 제작 방법과는 다르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육안으로 잘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이 1982년 작 '여인', 1977년 작 '후원' 등 천 화백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미인도에서도 나타나는 점을 주요 근거로 봤다.

수 없이 수정과 덧칠을 반복해 작품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천 화백의 독특한 채색기법도 판단의 잣대였다. 덧칠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그림 밑층에 다른 밑그림이 나타나는데 이는 천 화백의 1968년 작 '청춘의 문'에서도 나타난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위작의 경우 원작을 보고 그대로 베끼거나 약간의 변형을 가한 스케치 위에 짧은 시간 내에 채색을 하므로 다른 밑그림이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천 화백 유족 측과 피고소인 측, 미술계로부터 추천받은 전문가들의 안목 감정에서도 진품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고 한다. 추천을 받은 9명의 감정위원 대부분은 색채 사용과 두터운 덧칠, 붓터치, 선의 묘사, 밑그림 위에 수정한 흔적 등을 토대로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애초 미인도 위작자로 자처했다가 진술을 번복한 권 모 씨도 검찰 조사과정에서 미인도를 확인한 뒤 "명품에 가까운 수작이다. 위작 수준으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검찰은 또 미인도 유통 경로의 출발점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검찰에 따르면 1977년 천 화백이 중앙정보부 간부 오 모 씨의 부탁으로 미인도를 비롯한 그림 2점을 제공했고, 이 간부의 부인이 대학 동문인 김재규 부장의 부인에게 미인도를 다시 선물했다. 이어 김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인 1980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끌던 계엄사령부 산하 기부재산처리위원회에 미인도를 헌납했다. 이후 미인도는 당시 재무부와 문화공보부를 거쳐 그해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 최종 이관됐다. 미인도라는 이름도 당시 국가 감정 과정에서 붙여졌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이번 수사과정에서 유족 측의 의뢰로 미인도를 감정해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린 프랑스 감정회사 '뤼메이에르 테크놀로지'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층단층분석 기법을 통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에 숨겨진 그림을 찾아냈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이 회사 감정팀은 미인도를 촬영해 천 화백의 다른 진품 9개 작품과 비교 분석한 결과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론을 내고, 11월 초 미인도 감정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이 위작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한 계산식을 함께 비교한 다른 진품에 적용한 결과 진품 확률이 4%대로 낮게 나오는 등 감정 결과의 신빙성이 떨어져 결과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위의 여러 가지 사항을 근거로 검찰은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짓고, 고소·고발된 6명 가운데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5명은 무혐의 처분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정 모 씨에 대해서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25년을 끌어온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을 종결지었다.

12월 27일 유족 측 변호인 배금자 변호사가 향후 법적 대응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족 측과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유족 측 공동변호인단은 반박 보도자료에서 '미인도의 원 소장자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사실이 진품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미인도를 선물했다고 지목된 오 모 중앙정보부 대구분실장에 관한 이야기는 천 화백이 꺼낸 이야기이며, 오 씨가 그림을 가져간 사실은 있지만 '미인도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라고 밝혔다.


맨눈으로 관찰되지 않는 압인선이 확인됐다거나 희귀하고 값비싼 석채 안료를 사용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송곳 같은 도구로 본을 뜨는 것은 동양화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며 '암석에서 추출하는 석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누구나 쓸 수 있어서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검찰 진품 결론을 반박하는 천 화백 차녀 김정희 교수
아울러 검찰이 X선·원적외선·컴퓨터 영상 분석·DNA 분석 등 과학감정 기법을 동원했다고 한 데 대해서도 "원적외선 기법 등은 1950년대부터 사용했으며 첨단 기법과 거리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미술 전문가들의 '안목 감정'에 대해서도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12월 27일 장 페니코 뤼미에르 감정팀 사장이 검찰 수사를 반박하고 있다.
뤼메이에르 테크놀로지 장 페니코 사장도 12월 27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인도를 감정한 근거와 기법 등을 밝히며 위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외선에서 원적외선에 이르는 13개 스펙트럼 필터와 특수 카메라 렌즈를 활용해 그림 1개당 천650개의 단층을 촬영해 작품 간의 차이점을 분석했지만, 한국 검찰은 이를 참고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검찰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사용한 수학적 방법을 자체 실험에서 대입해 봤더니 진품조차 진품으로 나올 가능성이 4%라는 검찰 발표에 대해 "어떤 수식과 방법으로 계산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작품에서 위작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술품의 진위 여부는 대부분 과학적 감정과 안목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천경자·이우환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전문가를 자처하는 감정사들의 '감정' 결과는 물론이고, 권위 있는 수사기관의 결과에도 불복할 경우 논란이 장기화하며 미술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법정 싸움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시비를 바라보는 미술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의 마음도 우울하고 참담하다.


따라서 미술계는 거장들의 위작 논란을 계기로 미술품 거래가 투명하고 건전하게 이뤄질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술품 유통업 허가·등록기준 마련, 미술품 등록 및 거래 이력 신고제 도입, 미술품 유통 단속반 운영, 국가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술품 거래 투명화제도화에 따른 거래 위축을 방지하기 위해 중저가 미술품을 구입할 때 무이자로 대출하고, 미술품 양도세 과세 대상을 6천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리는 등의 시장 활성화 대책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인도는 위작 논란이 제기된 1991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수사 편의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서 나왔다. 법정 다툼이 진행될 경우 재판 편의를 위해 두 번째로 법정에도 나올 것이다. 미인도 진위 여부가 하루 빨리 판정돼 진품이든 위작이든 미인도가 어두운 수장고에서 나와 전시관의 밝은 세상에서 미술 애호가와 온 국민을 맞아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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