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의 덫…덴쓰와 훼미리마트

입력 2017.01.02 (18:03) 수정 2017.02.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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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새해를 며칠 앞두고,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입사원의 과로자살'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부당노동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이 사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월 100시간이 넘는 잔업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월 100시간이 넘는 잔업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

'과로자살'. 2016년(지난해) 일본 경제·노동계를 뒤흔든 사건이다. 2015년 말 대기업 신입사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정부는 전형적인 과로자살이라며 산업재해 결정을 내렸다.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호소했다.

아베 총리가 후속조치를 약속했고, 당국의 대대적인 실태조사가 이어졌다. 여성 직원들에게 불법 장시간 노동을 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과거에 이미 주의 조치를 받았음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고, 노동시간을 축소 기록한 사실도 발각됐다. 도쿄 노동국은 노동기준법 위반 혐의로 덴쓰의 경영진을 불구속 입건했다.

고강도 조사 뒤에야 경영진이 책임 인정

덴쓰의 책임 인정과 사과는 정부의 고강도 조사와 형사 처벌 절차에 즈음에 나왔다. 덴쓰의 이시이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깊은 책임을 느낀다"며 머리를 숙였다. 1월 이사회에서 사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월 이사회에서 대표권을 반납하지만, 오는 3월 열리는 주주총회 때까지는 이사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유족에 대한 사죄를 우선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진작부터 유족을 만나려 했지만, 좀처럼 허가를 받지 못했으며, 12월 25일에야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시이 사장은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려고 일을 거절하지 못한 직원을 탓할 수는 없으며, 경영 행위로서 제동을 걸거나 일정 기준을 만들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한다'는 뜻도 밝혔다.

덴쓰의 나카모토 부사장은 해당 직원의 사망에 대해 '업무시간 급증과 일에 대한 노력,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심각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노동조합과의 계약에 위반하는 장시간 노동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법 준수 의식이 희박했던 점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악명높은 노동관행...반복된 비극

초거대 광고그룹 ‘덴쓰’초거대 광고그룹 ‘덴쓰’

덴쓰는 초거대 광고그룹이다. 2015년 말 결산에서 그룹 전체 매출이 4조 엔을 넘어섰다. 한화로 40조 원 이상이다. 전 세계 직원이 4만 7천여 명에 이른다. 텔레비전·신문 광고 중개와 광고 기획, 대형 이벤트 기획과 운영, 월드컵 중계권 판매 등 광대한 사업영역을 자랑한다.

덴쓰의 노동강도는 악명이 높았다. 이른바 '귀신 10법칙' 또는 '악마 10법칙'이라 불리는 10가지 '계명'이 전승되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일은 스스로 만든다 ▶큰 일에 부딪쳐라 ▶죽어도 포기하지 말라 ▶마찰을 두려워하면 비굴하고 미련하게 된다 등. 경영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미덕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일만 하라'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사건의 파문이 커지자, 덴쓰는 노동환경 개선과 준법 근로를 약속했다. '귀신 10법칙'도 직원 수첩에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과로사 문제는 처음이 아니다. 여러 차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사건이 재발됐다.

1991년 입사 2년차 직원이 과로 때문에 자살했고, 2000년 대법원은 직원의 과로자살이 회사 책임이라고 판결했다. 회사는 깊이 반성한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2013년 병으로 사망한 30대 직원이 3년 만에 과로로 인한 산재로 인정됐다.

이번 과로자살 파문은 이례적으로 경영지 형사책임과 회사대표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바뀔 것인가?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 정책으로 추진해온 일본 정부에 이번 사건은 '일 시키는 관행'을 기업 자율에게 맡겨둬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듯하다. 후생노동성은 불법적인 장시간 노동을 일삼는 기업의 이름을 일정 기준에 따라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과로로 인한 산재가 반복되는 기업의 실명도 공개하기로 했다. 실제 노동시간과 신고 시간이 다를 경우에는 기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과로사 재판'...프랜차이즈 가맹점 직원의 비극


장시간 노동 관행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편의점 대기업 '훼미리마트'의 가맹점 직원이 장시간 노동을 반복하다 숨진 사건을 두고 재판이 열렸다. 이른바 '과로사 재판'이다.

4년 전 오사카에 있는 훼미리마트 가맹점에서 60대 남성 직원이 숨졌다. 근무 중 의식을 잃고 사다리에서 추락해 머리를 다친 뒤, 16일 뒤 사망했다. 유족은 남성이 사고 직전 6개월 동안 한 달 200시간 이상의 초과 근무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가맹점 주인과 회사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유족 측은 '가혹한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받는 편의점 직원이 많다'며, 고인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소송을 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2일 법원 중재로 양측의 화해가 이뤄졌다. 회사 측과 가맹점 주인은 공동으로 피해자 유족에게 4,300만 엔의 합의금을 지급하고, 가맹점이 노동법을 지키도록 지도하는 데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대기업과 직접 고용관계가 없는 가맹점 직원의 과로사에 대해 대기업이 사실상 직접 보상을 약속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훼미리마트 측은 "노사 계약은 가맹점주와 직원 사이에 이뤄진 것이지만, 프랜차이즈 본부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가맹점주들이 노동 법규를 준수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에 대해 '과로사 변호단 전국연락회의' 측은 '편의점의 가맹점포가 영세해서 점주와 직원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도록 방치한 책임이 프랜차이즈 본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의 과로사를 막기 위해서는 본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오자키 후생노동성 장관은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과로사를 제로로 만들고, 건강하고 충실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장시간 노동 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발언이다. '일하는 방식 개혁'에 매진하고 있는 아베 정부의 시도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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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시간 노동의 덫…덴쓰와 훼미리마트
    • 입력 2017-01-02 18:03:41
    • 수정2017-02-01 17:44:35
    특파원 리포트
2017년 새해를 며칠 앞두고,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입사원의 과로자살'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부당노동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이 사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월 100시간이 넘는 잔업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 '과로자살'. 2016년(지난해) 일본 경제·노동계를 뒤흔든 사건이다. 2015년 말 대기업 신입사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정부는 전형적인 과로자살이라며 산업재해 결정을 내렸다.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호소했다. 아베 총리가 후속조치를 약속했고, 당국의 대대적인 실태조사가 이어졌다. 여성 직원들에게 불법 장시간 노동을 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과거에 이미 주의 조치를 받았음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고, 노동시간을 축소 기록한 사실도 발각됐다. 도쿄 노동국은 노동기준법 위반 혐의로 덴쓰의 경영진을 불구속 입건했다. 고강도 조사 뒤에야 경영진이 책임 인정 덴쓰의 책임 인정과 사과는 정부의 고강도 조사와 형사 처벌 절차에 즈음에 나왔다. 덴쓰의 이시이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깊은 책임을 느낀다"며 머리를 숙였다. 1월 이사회에서 사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월 이사회에서 대표권을 반납하지만, 오는 3월 열리는 주주총회 때까지는 이사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유족에 대한 사죄를 우선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진작부터 유족을 만나려 했지만, 좀처럼 허가를 받지 못했으며, 12월 25일에야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시이 사장은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려고 일을 거절하지 못한 직원을 탓할 수는 없으며, 경영 행위로서 제동을 걸거나 일정 기준을 만들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한다'는 뜻도 밝혔다. 덴쓰의 나카모토 부사장은 해당 직원의 사망에 대해 '업무시간 급증과 일에 대한 노력,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심각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노동조합과의 계약에 위반하는 장시간 노동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법 준수 의식이 희박했던 점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악명높은 노동관행...반복된 비극 초거대 광고그룹 ‘덴쓰’ 덴쓰는 초거대 광고그룹이다. 2015년 말 결산에서 그룹 전체 매출이 4조 엔을 넘어섰다. 한화로 40조 원 이상이다. 전 세계 직원이 4만 7천여 명에 이른다. 텔레비전·신문 광고 중개와 광고 기획, 대형 이벤트 기획과 운영, 월드컵 중계권 판매 등 광대한 사업영역을 자랑한다. 덴쓰의 노동강도는 악명이 높았다. 이른바 '귀신 10법칙' 또는 '악마 10법칙'이라 불리는 10가지 '계명'이 전승되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일은 스스로 만든다 ▶큰 일에 부딪쳐라 ▶죽어도 포기하지 말라 ▶마찰을 두려워하면 비굴하고 미련하게 된다 등. 경영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미덕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일만 하라'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사건의 파문이 커지자, 덴쓰는 노동환경 개선과 준법 근로를 약속했다. '귀신 10법칙'도 직원 수첩에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과로사 문제는 처음이 아니다. 여러 차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사건이 재발됐다. 1991년 입사 2년차 직원이 과로 때문에 자살했고, 2000년 대법원은 직원의 과로자살이 회사 책임이라고 판결했다. 회사는 깊이 반성한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2013년 병으로 사망한 30대 직원이 3년 만에 과로로 인한 산재로 인정됐다. 이번 과로자살 파문은 이례적으로 경영지 형사책임과 회사대표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바뀔 것인가?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 정책으로 추진해온 일본 정부에 이번 사건은 '일 시키는 관행'을 기업 자율에게 맡겨둬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듯하다. 후생노동성은 불법적인 장시간 노동을 일삼는 기업의 이름을 일정 기준에 따라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과로로 인한 산재가 반복되는 기업의 실명도 공개하기로 했다. 실제 노동시간과 신고 시간이 다를 경우에는 기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과로사 재판'...프랜차이즈 가맹점 직원의 비극 장시간 노동 관행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편의점 대기업 '훼미리마트'의 가맹점 직원이 장시간 노동을 반복하다 숨진 사건을 두고 재판이 열렸다. 이른바 '과로사 재판'이다. 4년 전 오사카에 있는 훼미리마트 가맹점에서 60대 남성 직원이 숨졌다. 근무 중 의식을 잃고 사다리에서 추락해 머리를 다친 뒤, 16일 뒤 사망했다. 유족은 남성이 사고 직전 6개월 동안 한 달 200시간 이상의 초과 근무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가맹점 주인과 회사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유족 측은 '가혹한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받는 편의점 직원이 많다'며, 고인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소송을 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2일 법원 중재로 양측의 화해가 이뤄졌다. 회사 측과 가맹점 주인은 공동으로 피해자 유족에게 4,300만 엔의 합의금을 지급하고, 가맹점이 노동법을 지키도록 지도하는 데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대기업과 직접 고용관계가 없는 가맹점 직원의 과로사에 대해 대기업이 사실상 직접 보상을 약속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훼미리마트 측은 "노사 계약은 가맹점주와 직원 사이에 이뤄진 것이지만, 프랜차이즈 본부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가맹점주들이 노동 법규를 준수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에 대해 '과로사 변호단 전국연락회의' 측은 '편의점의 가맹점포가 영세해서 점주와 직원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도록 방치한 책임이 프랜차이즈 본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의 과로사를 막기 위해서는 본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오자키 후생노동성 장관은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과로사를 제로로 만들고, 건강하고 충실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장시간 노동 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발언이다. '일하는 방식 개혁'에 매진하고 있는 아베 정부의 시도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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