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프로 ‘코끼리씨름단’의 도전

입력 2017.01.10 (16:18) 수정 2017.01.1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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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새해를 이틀 앞둔 지난달 30일, 전남 서남권의 유일한 대형 조선소인 현대삼호중공업 전남 영암 조선소의 독(dock)은 한산해 보였습니다. 독에 거치된 몇몇 선박들의 막바지 건조작업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선박의 수주는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의 완성된 배들이 빠져나간 뒤 그 빈 자리를 채울 배들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세계적인 조선업 불황의 여파를 빗겨나가지 못한 현대삼호중공업. 당장 올해 작업물량이 30% 줄면서 3백 명 가까운 직원이 회사를 떠났고 무급휴직 등의 형태로 임금 삭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협력업체까지 더하면 목포와 영암 등 전남 서부권에서만 4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조선업 불황의 여진은 국내에 남은 마지막 민속 씨름 프로팀에게까지 밀어닥쳤습니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운영하던 국내 마지막 프로팀인 '현대 코끼리 씨름단'이 지난해 말 회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체된 겁니다.

1986년 창단된 현대코끼리씨름단은 팀 자체가 한국 민속씨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한 하나의 역사입니다. 80년대 씨름 전성기를 열었던 천하장사 이만기부터 90년대를 풍미한 이태현, 황규연 등 최고의 선수들이 팀을 거쳐갔습니다.



전성기 시절 씨름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기업이 운영하는 프로 씨름단이 8개나 됐고 씨름 선수들이 각종 텔레비전 광고를 휩쓸었습니다. 씨름 중계 때문에 메인 뉴스 시간이 미뤄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격투기 등 다른 프로스포츠에 밀려 씨름의 인기가 식으면서 프로팀이 잇따라 해체됐습니다. 2006년 이후엔 현대삼호중공업의 코끼리씨름단만 남아 10년 동안 홀로 프로 씨름팀의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그 마지막 프로씨름팀이 지난해 조선업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는 사실상 자치단체 소속 실업팀만 남게 된 셈입니다.


지난해 7월 선수들에게 전해진 '현대 코끼리씨름단'의 해체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2013년과 2014년 천하장사를 2번이나 한 팀의 간판인 이슬기 선수. 이 선수는 2014년 설날 대회에서 십자인대 파열로 오른쪽 무릎을 다친 이후 힘겨운 재활 과정을 이어왔습니다. 이 선수는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면서 그 와중에 접한 씨름단의 해체소식은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기둥 역할을 해주던 존재가 뽑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대학 졸업하고 10년 차인데 현대란 팀에 계속 있을 줄 알았어요. 평생 현대에서 은퇴하고 현대 프렌차이즈 스타로 저는 은퇴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죠. 이제 해단이 되면 뿔뿔이 흩어져서 같은 팀이었던 선수들을 시합에서 상대로 만나게 되니까 그거 자체가 싫더라고요." 이슬기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팀이 해체 수순을 밟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선수들은 지난해 추석 대회는 아예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같은 팀 한라급의 박병훈 선수 역시 당시를 암울했던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선수들도 그렇겠지만 지금 딱 떠올려도 찌릿한게 있습니다. 정말 현대가 워낙 힘들다고 저희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희는 뭐 해체까지는 안 갈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갑작스러웠거든요. 손에 정말 운동이 안 잡히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운동선수니까 운동만 열심히 하라고 말은 해주시지만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민속 씨름의 맥을 이렇게 끊을 순 없다는 마음이 모여 새로운 기회를 열었습니다. 지난해 말 전남 영암군청이 코끼리씨름단을 넘겨받아 재창단한 것입니다. 기존의 현대코끼리씨름단 선수 12명 가운데 8명이 잔류했고, 선수였던 김기태 씨가 새로운 영암군청 팀의 초대 감독을 맡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선수들이 다시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뛸 수 있게 된 겁니다.


김기태 감독은 하나로 뭉치자는 선수들의 단합과 자치단체의 지원이 어우러져 팀을 다시 살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선수들의 의견은 그랬어요. 같이 움직일 수 있는 팀이 있다면 같이 가겠다. 그래서 그 말을 정말 무게있게 저는 받아들였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진실되게 일을 추진했었는데 다행히도 영암 군청에서 허락을 해주셨어요.그래서 어깨가 무겁고 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기업 소속 프로팀일 때 30억 원 정도 됐던 선수단의 예산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선수들의 투지는 더 높아졌습니다. 팀 해체라는 고난을 모두 함께 겪고 이겨낸 식구들이기에 선수단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설날 대회를 앞두고 칼바람이 부는 이른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구슬땀을 흘리는 영암군청 씨름팀 선수들. 자신들의 노력이 단순히 씨름팀 하나의 부활을 넘어서, 침체된 민속 씨름의 부활을 위한 밀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는 씨름단 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끔씩 사석에서 씨름 선배님들로부터 씨름이 전성기였던 시절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부럽습니다. 와. 씨름이 진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선수들이 더 노력해서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도 어렵고 지역경기도 어려운데 저희가 잘하면 그걸 보고 지역 주민들이나 국민들도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선수들 모두 솔직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다 떨쳐내고 올해는 씨름판을 다시 휩쓸어서 우리가 최고라는 걸 다시 보여주고 싶어요"

"씨름 정말 재밌습니다. 제가 해서 그런게 아니고 직접 와서 보면 정말 역동적이고 재밌거든요. 저희가 씨름 한 판을 하기 위해서 1년을 준비합니다. 준비하는데 씨름은 10분에 끝날 수도 있고 1초에 끝날 수도 있어요. 그만큼 역동적인 경기라고 생각해요. 유도는 한판이 있고 반판이 있고 유효가 있지 않습니까? 레슬링은 시간이 있고. 근데 씨름은 그런 것들이 없어요. 그냥 무릎 밑으로 지면에 닿으면 지는 게임이에요. 정말 매력이 있으니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설 명절에는 새해를 남다른 각오로 맞이한 옛 코끼리씨름단 선수들의 도전을 한번 관심있게 지켜보시는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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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프로 ‘코끼리씨름단’의 도전
    • 입력 2017-01-10 16:18:39
    • 수정2017-01-10 16:19:15
    취재K
2017년 새해를 이틀 앞둔 지난달 30일, 전남 서남권의 유일한 대형 조선소인 현대삼호중공업 전남 영암 조선소의 독(dock)은 한산해 보였습니다. 독에 거치된 몇몇 선박들의 막바지 건조작업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선박의 수주는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의 완성된 배들이 빠져나간 뒤 그 빈 자리를 채울 배들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세계적인 조선업 불황의 여파를 빗겨나가지 못한 현대삼호중공업. 당장 올해 작업물량이 30% 줄면서 3백 명 가까운 직원이 회사를 떠났고 무급휴직 등의 형태로 임금 삭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협력업체까지 더하면 목포와 영암 등 전남 서부권에서만 4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조선업 불황의 여진은 국내에 남은 마지막 민속 씨름 프로팀에게까지 밀어닥쳤습니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운영하던 국내 마지막 프로팀인 '현대 코끼리 씨름단'이 지난해 말 회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체된 겁니다.

1986년 창단된 현대코끼리씨름단은 팀 자체가 한국 민속씨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한 하나의 역사입니다. 80년대 씨름 전성기를 열었던 천하장사 이만기부터 90년대를 풍미한 이태현, 황규연 등 최고의 선수들이 팀을 거쳐갔습니다.



전성기 시절 씨름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기업이 운영하는 프로 씨름단이 8개나 됐고 씨름 선수들이 각종 텔레비전 광고를 휩쓸었습니다. 씨름 중계 때문에 메인 뉴스 시간이 미뤄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격투기 등 다른 프로스포츠에 밀려 씨름의 인기가 식으면서 프로팀이 잇따라 해체됐습니다. 2006년 이후엔 현대삼호중공업의 코끼리씨름단만 남아 10년 동안 홀로 프로 씨름팀의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그 마지막 프로씨름팀이 지난해 조선업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는 사실상 자치단체 소속 실업팀만 남게 된 셈입니다.


지난해 7월 선수들에게 전해진 '현대 코끼리씨름단'의 해체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2013년과 2014년 천하장사를 2번이나 한 팀의 간판인 이슬기 선수. 이 선수는 2014년 설날 대회에서 십자인대 파열로 오른쪽 무릎을 다친 이후 힘겨운 재활 과정을 이어왔습니다. 이 선수는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면서 그 와중에 접한 씨름단의 해체소식은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기둥 역할을 해주던 존재가 뽑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대학 졸업하고 10년 차인데 현대란 팀에 계속 있을 줄 알았어요. 평생 현대에서 은퇴하고 현대 프렌차이즈 스타로 저는 은퇴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죠. 이제 해단이 되면 뿔뿔이 흩어져서 같은 팀이었던 선수들을 시합에서 상대로 만나게 되니까 그거 자체가 싫더라고요." 이슬기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팀이 해체 수순을 밟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선수들은 지난해 추석 대회는 아예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같은 팀 한라급의 박병훈 선수 역시 당시를 암울했던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선수들도 그렇겠지만 지금 딱 떠올려도 찌릿한게 있습니다. 정말 현대가 워낙 힘들다고 저희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희는 뭐 해체까지는 안 갈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갑작스러웠거든요. 손에 정말 운동이 안 잡히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운동선수니까 운동만 열심히 하라고 말은 해주시지만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민속 씨름의 맥을 이렇게 끊을 순 없다는 마음이 모여 새로운 기회를 열었습니다. 지난해 말 전남 영암군청이 코끼리씨름단을 넘겨받아 재창단한 것입니다. 기존의 현대코끼리씨름단 선수 12명 가운데 8명이 잔류했고, 선수였던 김기태 씨가 새로운 영암군청 팀의 초대 감독을 맡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선수들이 다시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뛸 수 있게 된 겁니다.


김기태 감독은 하나로 뭉치자는 선수들의 단합과 자치단체의 지원이 어우러져 팀을 다시 살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선수들의 의견은 그랬어요. 같이 움직일 수 있는 팀이 있다면 같이 가겠다. 그래서 그 말을 정말 무게있게 저는 받아들였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진실되게 일을 추진했었는데 다행히도 영암 군청에서 허락을 해주셨어요.그래서 어깨가 무겁고 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기업 소속 프로팀일 때 30억 원 정도 됐던 선수단의 예산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선수들의 투지는 더 높아졌습니다. 팀 해체라는 고난을 모두 함께 겪고 이겨낸 식구들이기에 선수단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설날 대회를 앞두고 칼바람이 부는 이른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구슬땀을 흘리는 영암군청 씨름팀 선수들. 자신들의 노력이 단순히 씨름팀 하나의 부활을 넘어서, 침체된 민속 씨름의 부활을 위한 밀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는 씨름단 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끔씩 사석에서 씨름 선배님들로부터 씨름이 전성기였던 시절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부럽습니다. 와. 씨름이 진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선수들이 더 노력해서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도 어렵고 지역경기도 어려운데 저희가 잘하면 그걸 보고 지역 주민들이나 국민들도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선수들 모두 솔직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다 떨쳐내고 올해는 씨름판을 다시 휩쓸어서 우리가 최고라는 걸 다시 보여주고 싶어요"

"씨름 정말 재밌습니다. 제가 해서 그런게 아니고 직접 와서 보면 정말 역동적이고 재밌거든요. 저희가 씨름 한 판을 하기 위해서 1년을 준비합니다. 준비하는데 씨름은 10분에 끝날 수도 있고 1초에 끝날 수도 있어요. 그만큼 역동적인 경기라고 생각해요. 유도는 한판이 있고 반판이 있고 유효가 있지 않습니까? 레슬링은 시간이 있고. 근데 씨름은 그런 것들이 없어요. 그냥 무릎 밑으로 지면에 닿으면 지는 게임이에요. 정말 매력이 있으니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설 명절에는 새해를 남다른 각오로 맞이한 옛 코끼리씨름단 선수들의 도전을 한번 관심있게 지켜보시는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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