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민주주의의 독버섯, 블랙리스트

입력 2017.01.1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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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을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린 영화 ‘로마의 휴일’은 1954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모두 3개 부문의 상을 거머쥐었다.

헵번이 받은 여우주연상 외에 각본상과 의상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 화려한 수상 뒤에는 말 못할 사연도 숨겨져 있었다.

각본상을 실제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이다.

원작자는 달톤 트럼보였지만 수상자는 이안 맥리랜 헌터였다.

헌터는 단지 이름만 빌려줬다.

영화 ‘트럼보’ 포스터. 2016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다.영화 ‘트럼보’ 포스터. 2016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다.

트럼보가 직접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인 트럼보는 공산당에 가입하고 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전력이 있다.

그는 이런 전력 때문에 미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되는데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다”며 증언을 거부한다.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닥치기 직전이었다.

트럼보 처럼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며 의회 증언을 거부한 작가와 감독들은 또 있었다.

모두 10명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할리우드 10’으로 불렀다.

‘할리우드 10’은 일종의 미국판 영화계 블랙리스트였던 셈이다.

그 뒤 이들은 대형 영화제작사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작품 활동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전향서를 제출해 일거리를 얻느냐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트럼보는 제3의 길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가명을 써서 창작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이 때 태어난 시나리오가 ‘로마의 휴일’이다.

정치 권력과 자본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트럼보는 ‘로마의 휴일’ 외에도 ‘용감한 사람’, ‘스파르타쿠스’, ‘빠삐용’ 등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들을 썼다.

아카데미위원회는 트럼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1993년에 그의 부인에게 각본상을 수여했다.

뒤늦게나마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과거 군사 독재 시기엔 대중가요와 영화, 연극 등에 대한 사전 검열이 철저하게 이뤄졌다.과거 군사 독재 시기엔 대중가요와 영화, 연극 등에 대한 사전 검열이 철저하게 이뤄졌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쳤던 우리의 경우 상황은 훨씬 더 비참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데 블랙리스트를 적극 활용했다.

가요와 영화, 연극 등 대중적 파급 효과가 큰 매체에 대한 사전 검열을 통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유로운 유통을 막았다.

‘아침이슬’과 ‘고래사냥’ 등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는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영화도 혹독한 가위질을 당한 뒤 상영된 경우가 많았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무기력한 청춘 묘사라는 이유로 원본의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채 개봉됐다.

검열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보니 당연히 일관성도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 잘렸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곤 했다.

다양한 문화 담론 형성과 다양한 예술적 창조가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지난 12일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시위를 하고 있다.지난 12일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시위를 하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도 음습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검 조사 결과 무려 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별 연설을 통해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회의 다양성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 풍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내 편, 남의 편을 갈라놓고 남의 편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눌러버린다.

블랙리스트는 싫은 소리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표출한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다는 점에서 야만적이다.

무엇보다 블랙리스트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반인간적이다.

그런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독버섯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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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플러스] 민주주의의 독버섯, 블랙리스트
    • 입력 2017-01-15 09:01:32
    뉴스플러스
오드리 헵번을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린 영화 ‘로마의 휴일’은 1954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모두 3개 부문의 상을 거머쥐었다.

헵번이 받은 여우주연상 외에 각본상과 의상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 화려한 수상 뒤에는 말 못할 사연도 숨겨져 있었다.

각본상을 실제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이다.

원작자는 달톤 트럼보였지만 수상자는 이안 맥리랜 헌터였다.

헌터는 단지 이름만 빌려줬다.

영화 ‘트럼보’ 포스터. 2016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다.
트럼보가 직접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인 트럼보는 공산당에 가입하고 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전력이 있다.

그는 이런 전력 때문에 미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되는데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다”며 증언을 거부한다.

당시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닥치기 직전이었다.

트럼보 처럼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며 의회 증언을 거부한 작가와 감독들은 또 있었다.

모두 10명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할리우드 10’으로 불렀다.

‘할리우드 10’은 일종의 미국판 영화계 블랙리스트였던 셈이다.

그 뒤 이들은 대형 영화제작사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작품 활동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전향서를 제출해 일거리를 얻느냐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트럼보는 제3의 길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가명을 써서 창작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이 때 태어난 시나리오가 ‘로마의 휴일’이다.

정치 권력과 자본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트럼보는 ‘로마의 휴일’ 외에도 ‘용감한 사람’, ‘스파르타쿠스’, ‘빠삐용’ 등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들을 썼다.

아카데미위원회는 트럼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1993년에 그의 부인에게 각본상을 수여했다.

뒤늦게나마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과거 군사 독재 시기엔 대중가요와 영화, 연극 등에 대한 사전 검열이 철저하게 이뤄졌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쳤던 우리의 경우 상황은 훨씬 더 비참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데 블랙리스트를 적극 활용했다.

가요와 영화, 연극 등 대중적 파급 효과가 큰 매체에 대한 사전 검열을 통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유로운 유통을 막았다.

‘아침이슬’과 ‘고래사냥’ 등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는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영화도 혹독한 가위질을 당한 뒤 상영된 경우가 많았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무기력한 청춘 묘사라는 이유로 원본의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채 개봉됐다.

검열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보니 당연히 일관성도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 잘렸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곤 했다.

다양한 문화 담론 형성과 다양한 예술적 창조가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지난 12일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시위를 하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도 음습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검 조사 결과 무려 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별 연설을 통해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회의 다양성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 풍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내 편, 남의 편을 갈라놓고 남의 편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눌러버린다.

블랙리스트는 싫은 소리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표출한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다는 점에서 야만적이다.

무엇보다 블랙리스트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반인간적이다.

그런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독버섯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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