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블랙리스트 사과 믿어도 되나?

입력 2017.01.26 (17:08) 수정 2017.01.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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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관여한 혐의로 전·현직 장관과 차관이 잇따라 구속된 문화체육관광부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부의 한 부처가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한 것은 정부 수립 이래 처음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종사자들의 반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윗선의 지시에 따라 맹목적으로 한 일에도 책임이 따라야한다는 비판을 의식해, 진정한 성찰없이 마지못해 내놓은 반성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있은 문체부 대국민 사과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을 비롯한 유동훈 제2차관, 실국장들이 총출동했다.

이 자리에서 송 장관 대행은 "예술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할 문체부가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밝혔다.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해 문화예술계의 자율성 확립방안을 논의할 기구를 구성하고, 여기에 '문화 옴부즈맨' 기능을 부여, 부당한 개입과 불공정 사례들을 제보 받아 점검·시정하겠다고 말했다. 더하여 문화예술의 표현이나 활동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규정도 마련하겠다고도 밝혔다.


송 장관 대행은 또 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등 문체부 주변 기관의 이른바 '블랙리스트 부역자' 문제에 대해 " 특검 수사, 감사원 감사와 연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설명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처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외부 로펌과 함께 설립 과정,자금 출연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조만간 처리 방향을 발표 하겠다"고 했다.

문체부의 대국민 사과 직후 ‘블랙리스트’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의 모임인 이른바‘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이하 예술행동위)는 성명을 발표하고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면피용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진실 규명과 부역자 청산'부터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질문 받는 송수근 장관 대행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질문 받는 송수근 장관 대행

특히 "사과문을 발표한 ‘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직무대행 및 실국장 일동’은 사과의 주체가 아니라 청산 대상"이라며 “사과 주체부터가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문화예술계에서는 “송 직무대행은 블랙리스트 총괄팀장을 했다는 의혹을 받아 특검의 수사를 받은 인물로 문체부를 이끌 자격이 없다며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16년 10월 국회에서 답변하는 박명진(좌) 위원장과 김세훈 위원장2016년 10월 국회에서 답변하는 박명진(좌) 위원장과 김세훈 위원장

또 블랙리스트 작성에 실무를 맡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김세훈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 산하 기관장들이 총사퇴하는 인적쇄신이 없다면, 이는 “공범으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2015년 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문화창조융합벨트 출범식장에 입장하고 있다.2015년 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문화창조융합벨트 출범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아울러“문화창조융합벨트와 평창 동계올림픽사업 등 문체부의 주요 사업들도 부패와 부정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다시는 이러한 불법적인 문화행정이 재발되지 않도록 본질적이고 제도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문체부의 사과와 문화예술인들의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작금의 블랙리스트 사태는 헌법이 규정한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해친 폭거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헌법 가치를 수호해야할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관여했다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적 청산과 체질 개선이 따르지 않는 사과와 대책은 메아리처럼 공허할 뿐이다. 문체부는 이런 차원에서 특검 수사와는 별개로 진상규명을 위한 자체 조사를 벌여 지시를 따른 실무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할 것 이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문체부와 산하기관 공무원들이 법과 인권을 지킨다는 원칙에 충실했다면 블랙리스트의 손과 발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재에 나온 유진룡 전 장관(좌) 특검에 나온 노태강 전 체육국장헌재에 나온 유진룡 전 장관(좌) 특검에 나온 노태강 전 체육국장

그러나 이 일을 공무원들의 양심과 사명감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공무원들의 맹목적인 순응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공무원이 윗선의 압박에 굴복하거나, 쫓겨나는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대통령과 장관, 청와대와 일반 행정부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장관이나 행정부서를 정치적 수단으로 부릴 때, 이 같은 불합리를 제어할 제도나 장치를 갖추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문은 다시 우리의 헌정질서를 흔들 것이다.

2016년 12월 26일 연극인들이 검열백서준비위원회 발족 포럼을 열고 있다.2016년 12월 26일 연극인들이 검열백서준비위원회 발족 포럼을 열고 있다.

연극계가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박근혜 정부의 검열실태를 고발하는 '검열백서' 제작에 나선다. 연극인들은 지난달 26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에서 모임을 갖고, 오는 3월 1일 '검열백서위원회'를 출범하기로 결의했다. 검열백서에는 작금의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자신들이 주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정부와 공공기관의 검열 사례가 담길 예정이다.

정부도 이 기회에 헌정질서를 뒤흔든 블랙리스트 사태와 최순실 국정농단 백서를 제작해 후대의 대통령과 공직자, 국민들의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국회에 전시돼 논란이 된 박 대통령 누드화국회에 전시돼 논란이 된 박 대통령 누드화

이 백서에는 국회에 전시돼 논란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 얼굴에 누드를 합성한 작품도 담았으면 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권력에 비판을 가하면서도 이 그림을 보면 예술표현의 자유의 본질은 무엇이고,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다시 원점을 맴도는 혼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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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플러스] 블랙리스트 사과 믿어도 되나?
    • 입력 2017-01-26 17:08:29
    • 수정2017-01-27 13: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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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관여한 혐의로 전·현직 장관과 차관이 잇따라 구속된 문화체육관광부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부의 한 부처가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한 것은 정부 수립 이래 처음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종사자들의 반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윗선의 지시에 따라 맹목적으로 한 일에도 책임이 따라야한다는 비판을 의식해, 진정한 성찰없이 마지못해 내놓은 반성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있은 문체부 대국민 사과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을 비롯한 유동훈 제2차관, 실국장들이 총출동했다.

이 자리에서 송 장관 대행은 "예술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할 문체부가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밝혔다.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해 문화예술계의 자율성 확립방안을 논의할 기구를 구성하고, 여기에 '문화 옴부즈맨' 기능을 부여, 부당한 개입과 불공정 사례들을 제보 받아 점검·시정하겠다고 말했다. 더하여 문화예술의 표현이나 활동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규정도 마련하겠다고도 밝혔다.


송 장관 대행은 또 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등 문체부 주변 기관의 이른바 '블랙리스트 부역자' 문제에 대해 " 특검 수사, 감사원 감사와 연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설명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처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외부 로펌과 함께 설립 과정,자금 출연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조만간 처리 방향을 발표 하겠다"고 했다.

문체부의 대국민 사과 직후 ‘블랙리스트’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의 모임인 이른바‘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이하 예술행동위)는 성명을 발표하고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면피용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진실 규명과 부역자 청산'부터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질문 받는 송수근 장관 대행
특히 "사과문을 발표한 ‘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직무대행 및 실국장 일동’은 사과의 주체가 아니라 청산 대상"이라며 “사과 주체부터가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문화예술계에서는 “송 직무대행은 블랙리스트 총괄팀장을 했다는 의혹을 받아 특검의 수사를 받은 인물로 문체부를 이끌 자격이 없다며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16년 10월 국회에서 답변하는 박명진(좌) 위원장과 김세훈 위원장
또 블랙리스트 작성에 실무를 맡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김세훈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 산하 기관장들이 총사퇴하는 인적쇄신이 없다면, 이는 “공범으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2015년 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문화창조융합벨트 출범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아울러“문화창조융합벨트와 평창 동계올림픽사업 등 문체부의 주요 사업들도 부패와 부정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다시는 이러한 불법적인 문화행정이 재발되지 않도록 본질적이고 제도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문체부의 사과와 문화예술인들의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작금의 블랙리스트 사태는 헌법이 규정한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해친 폭거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헌법 가치를 수호해야할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관여했다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적 청산과 체질 개선이 따르지 않는 사과와 대책은 메아리처럼 공허할 뿐이다. 문체부는 이런 차원에서 특검 수사와는 별개로 진상규명을 위한 자체 조사를 벌여 지시를 따른 실무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할 것 이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문체부와 산하기관 공무원들이 법과 인권을 지킨다는 원칙에 충실했다면 블랙리스트의 손과 발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재에 나온 유진룡 전 장관(좌) 특검에 나온 노태강 전 체육국장
그러나 이 일을 공무원들의 양심과 사명감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공무원들의 맹목적인 순응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공무원이 윗선의 압박에 굴복하거나, 쫓겨나는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대통령과 장관, 청와대와 일반 행정부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장관이나 행정부서를 정치적 수단으로 부릴 때, 이 같은 불합리를 제어할 제도나 장치를 갖추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문은 다시 우리의 헌정질서를 흔들 것이다.

2016년 12월 26일 연극인들이 검열백서준비위원회 발족 포럼을 열고 있다.
연극계가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박근혜 정부의 검열실태를 고발하는 '검열백서' 제작에 나선다. 연극인들은 지난달 26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에서 모임을 갖고, 오는 3월 1일 '검열백서위원회'를 출범하기로 결의했다. 검열백서에는 작금의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자신들이 주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정부와 공공기관의 검열 사례가 담길 예정이다.

정부도 이 기회에 헌정질서를 뒤흔든 블랙리스트 사태와 최순실 국정농단 백서를 제작해 후대의 대통령과 공직자, 국민들의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국회에 전시돼 논란이 된 박 대통령 누드화
이 백서에는 국회에 전시돼 논란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 얼굴에 누드를 합성한 작품도 담았으면 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권력에 비판을 가하면서도 이 그림을 보면 예술표현의 자유의 본질은 무엇이고,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다시 원점을 맴도는 혼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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