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금품갈취’ 경찰들에 겨우 ‘얼차려!’

입력 2017.02.02 (14:19) 수정 2017.02.0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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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기사] ☞ [뉴스9] 필리핀 경찰수장, 한인 금품갈취 경찰 ‘얼차려’

한국인들을 상대로 경찰이 돈을 뜯어내면 '얼차려'로 팔굽혀펴기만 몇 번 하면 된다?

이것이 현재 필리핀에서 경찰청장이 하고 있는 부정부패경찰에 대한 공식적인 조치라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야말로 '닭이 웃을 일'이다.

로널드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1일 필리핀 중부 관광도시 앙헬레스를 방문해 현지 기자들 앞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강도질한 경찰관들에게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앙헬레스에서는 지난해 12월 말 한국인 골프 관광객 3명이 불법 도박 누명을 쓰고 현지 경찰관들에게 연행됐다. 이들 관광객은 앙헬레스 경찰서에 약 8시간 구금됐다가 30만 페소(약 700만 원)의 몸값을 주고 겨우 풀려났다.

델라로사 청장은 문제의 경찰관 7명을 일일이 질타하고 약 10분간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필리핀 신문들은 2일 이 장면을 보도했다. 현재 이들 경찰관에 대해서는 형사처벌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델라로사 청장은 "16만 5천 명의 경찰관 가운데 3천 명이 '악당'"이라며 비리·부패 경찰관을 이슬람 무장반군이 활동하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 강제로 보내서 근무 중 죽을 수도 있게 하겠다는 겁박이다.

왜 새삼스럽게 이런 '쇼(Show) 같은 얼차려'를 필리핀 경찰청장이 하는 것일까?

지난해 10월 필리핀 경찰들의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인권단체의 시위가 1월 27일 마닐라 경찰청 앞에서 열렸다.지난해 10월 필리핀 경찰들의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인권단체의 시위가 1월 27일 마닐라 경찰청 앞에서 열렸다.

1월 27일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의 경찰청 앞에서는 인권운동가 등 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자리는 필리핀 경찰관들이 한국인 사업가 지 모(53) 씨를 납치·살해한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초법적 살인행위를 중단하라며 정의구현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피 묻은 모형 시신들을 동원해 경찰관들의 지 씨 살해와 마약 용의자 즉결처형을 비난했다.

또 마약 척결을 내세운 경찰의 초법적 살인행위 중단을 촉구하며 정의 구현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한인 사업가 지씨가 살해된 필리핀 경찰청 안의 주차장한인 사업가 지씨가 살해된 필리핀 경찰청 안의 주차장

현재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을 상대로 한 납치 살해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해 10월 한국인 사업가 지모 씨가 필리핀 경찰에 납치돼 경찰서 안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필리핀 경찰들은 한국인 사업가를 마약 소지 혐의로 누명을 씌워 돈을 요구하다 살해하고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그리고 범인들은 이를 숨긴 채, 지 씨의 가족들로부터 500만 페소(1억 2천여만 원)의 몸값을 뜯어내기까지 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연관 기사] ☞ 숨진 한국인 사업가, 필리핀 경찰청 본부서 피살

사건과 쇼의 배경은 이렇다.

필리핀에서는 지난해 6월 말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약과의 유혈전쟁'을 시작했다. 그 후 지금까지 7천여 명의 마약 용의자가 경찰이나 자경단 등에 의해 사살됐다.

그 과정에서 인권 유린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일부 경찰은 마약 단속을 빙자해 한인들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는 짓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한인 사업가 지씨가 납치 살해된 필리핀 중부 관광도시 앙헬레스를 찾아가 퍼포먼스(?)를 벌인 셈이다.

불법을 저지르는 경찰들에게 팔굽혀 펴기 시키기를 시키며 언론사들이 촬영하게 하는 행사로 한인 살해범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겠다는 뜻일까.

◆ 필리핀은 진심으로 사과했나?

필리핀 정부는 자국 경찰관에 의한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에 대해 1월 24일 공식으로 사과했다.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이날 유가족에게 애도를 전하면서 "우리는 이 돌이킬 수 없는 인명의 손실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데 "사법력을 총동원하고 있다"면서 "한국 국민이 우리의 진실하고 더는 깊을 수 없는 유감을 받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필리핀 검찰은 최근 이와 관련해 현직 경찰관 2명 등 7명을 납치와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지난 21일 사의를 표명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를 반려했다. 오히려 같은 날 치러진 델라로사 청장의 생일잔치에까지 참석해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뒤늦게 지 씨의 부인 최모 씨를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만나 사과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필리핀 경찰청 본부 주차장 안에 임시 설치된 지 씨 분향소를 대체할 공식 분향소 설치와 지 씨 명예회복 조치 등 유족 요구사항을 수락했다. 이날 면담에 한국 측에선 김재신 주필리핀대사가 배석했다.

두테르테(왼쪽 2번째) 필리핀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각)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지난해 10월 납치·살해된 한국인 사업가 지모(53세) 씨의 부인 최모 씨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두테르테(왼쪽 2번째) 필리핀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각)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지난해 10월 납치·살해된 한국인 사업가 지모(53세) 씨의 부인 최모 씨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후 필리핀에선 현직 경찰관에 의한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이 정치·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외국인 피해 범죄로는 이례적으로 1월 26일 필리핀 상원의 청문회까지 열렸다. 경찰의 도덕성과 신뢰성에 치명타를 가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된 것이다.

필리핀 상원 공공질서위원회가 이날 개최한 청문회에는 지 모(53) 씨 납치·살해의 주범으로 체포된 리키 이사벨 경사와 증인, 로널드 델라로사 경찰청장 등이 출석했다. 지 씨 부인(53)도 참석했으며 청문회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판필로 락손 의원은 "지 씨 사건은 비극적인 일"이라며 "경찰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심을 잃을 만하다"고 비판했다.

한국인 사업가 지씨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사벨 경사한국인 사업가 지씨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사벨 경사

그러나 청문회에서는 지 씨의 피랍 사건을 놓고 경찰 총수와 용의자 간에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필리핀 경찰청은 몸값을 노린 이사벨 경사가 주범으로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사벨 경사의 부인이 지 씨 납치에 쓰인 차량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고 지 씨와 함께 납치됐다가 풀려난 가정부도 이사벨 경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사벨 경사를 포함한 범인들이 지 씨 납치 직후 은행 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찾아가는 모습이 폐쇄회로(CC) TV에 잡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이사벨 경사는 사건 당일 지 씨 동네에 간 적이 없으며 범행 차량의 번호판은 자신의 부인 차량을 복제한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 이사벨 경사는 경찰청에서 자신의 상관인 마약단속팀장이 지 씨를 총으로 때리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사벨 경사는 이 사건의 배후에 경찰 간부 2명이 있으며 자신은 희생양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이 사건에 경찰 간부는 물론 법무부 소속 국가수사국(NBI) 민간인 직원의 연루 의혹까지 제기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의 대응은 적절했나?

그런데 이번 사건의 중대성과 한국인 안전의 취약성을 놓고 볼 때 한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사건이 발생한 뒤 대한민국 외교부는 "주 필리핀대사관은 사건 접수 직후 앙헬레스 영사협력원을 피해자 숙소로 파견해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주필리핀대사관 총영사는 필리핀 경찰청 차장에게 현지 경찰에 의한 사건인 점 등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철저한 수사를 하라고 촉구하는 문서를 송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필리핀대사관은 필리핀 경찰위원회(비리 경찰관 조사 및 처벌 담당)에도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월 24일까지도 "필리핀 경찰관의 개입이 확인된 지난 17일 이후 김재신 주 필리핀 대사가 외교장관, 경찰청장, 검찰총장, 국가수사국 국장 등을 면담하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필리핀 외교장관과의 전화통화 등으로 항의하는 선에서 우리 정부는 1차 대응을 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의 반응은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외교적 결례에 가까운 반응에 비춰볼 때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한인 피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의 55번째 생일잔치에 참석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며 사실상 한국 정부를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인데 대한 지적이었다.

보다 강력한 항의와 외교적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비판과 자조적 여론이 SNS에 쏟아졌다. 여기에는 한국과 필리핀의 국력까지 비교하며 우리가 우습게 보이는 것 아니냐, 외교관들이 자국민 보호는 제대로 하는 것이냐는 등의 댓글이 잇따랐다.

사태가 엄중한 데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응이 없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정부는 1월 31일에야 필리핀에서 발생한 경찰관에 의한 재외국민 피살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한국과 필리핀 양국 간 외교치안 분야의 협의 체제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사건은 필리핀 공권력의 조직적 불법 행위에 의한 체류 우리 국민에 대한 범죄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며, 유사 사건 재발방지 대책 강구를 위해서 기존의 한-필리핀 차관급 정책협의회에서의 의제협의 강화와 함께 영사외교 채널 정례화 문제도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대변인은 "지난 29일 두테르테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서 경찰 내 부패척결 및 조직 재정비의 의지를 밝힌 데 주목하고 있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실효적 조처를 취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리더십의 부재 때문에 외교적 대응도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필리핀의 한인 납치 살해사건뿐 아니라, 대만에서 발생한 택시기사의 한국 여성 성폭행 사건과 부산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일본정부의 강경 대응에 대한 소극적 태도까지 외교부의 대응에 대한 신뢰도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외교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외교 현장에서 신속히 판단하고 적절한 조치를 제때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세월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과 사람을 완비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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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 금품갈취’ 경찰들에 겨우 ‘얼차려!’
    • 입력 2017-02-02 14:19:01
    • 수정2017-02-02 22: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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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기사] ☞ [뉴스9] 필리핀 경찰수장, 한인 금품갈취 경찰 ‘얼차려’ 한국인들을 상대로 경찰이 돈을 뜯어내면 '얼차려'로 팔굽혀펴기만 몇 번 하면 된다? 이것이 현재 필리핀에서 경찰청장이 하고 있는 부정부패경찰에 대한 공식적인 조치라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야말로 '닭이 웃을 일'이다. 로널드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1일 필리핀 중부 관광도시 앙헬레스를 방문해 현지 기자들 앞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강도질한 경찰관들에게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앙헬레스에서는 지난해 12월 말 한국인 골프 관광객 3명이 불법 도박 누명을 쓰고 현지 경찰관들에게 연행됐다. 이들 관광객은 앙헬레스 경찰서에 약 8시간 구금됐다가 30만 페소(약 700만 원)의 몸값을 주고 겨우 풀려났다. 델라로사 청장은 문제의 경찰관 7명을 일일이 질타하고 약 10분간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필리핀 신문들은 2일 이 장면을 보도했다. 현재 이들 경찰관에 대해서는 형사처벌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델라로사 청장은 "16만 5천 명의 경찰관 가운데 3천 명이 '악당'"이라며 비리·부패 경찰관을 이슬람 무장반군이 활동하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 강제로 보내서 근무 중 죽을 수도 있게 하겠다는 겁박이다. 왜 새삼스럽게 이런 '쇼(Show) 같은 얼차려'를 필리핀 경찰청장이 하는 것일까? 지난해 10월 필리핀 경찰들의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인권단체의 시위가 1월 27일 마닐라 경찰청 앞에서 열렸다. 1월 27일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의 경찰청 앞에서는 인권운동가 등 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자리는 필리핀 경찰관들이 한국인 사업가 지 모(53) 씨를 납치·살해한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초법적 살인행위를 중단하라며 정의구현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피 묻은 모형 시신들을 동원해 경찰관들의 지 씨 살해와 마약 용의자 즉결처형을 비난했다. 또 마약 척결을 내세운 경찰의 초법적 살인행위 중단을 촉구하며 정의 구현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한인 사업가 지씨가 살해된 필리핀 경찰청 안의 주차장 현재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을 상대로 한 납치 살해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해 10월 한국인 사업가 지모 씨가 필리핀 경찰에 납치돼 경찰서 안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필리핀 경찰들은 한국인 사업가를 마약 소지 혐의로 누명을 씌워 돈을 요구하다 살해하고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그리고 범인들은 이를 숨긴 채, 지 씨의 가족들로부터 500만 페소(1억 2천여만 원)의 몸값을 뜯어내기까지 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연관 기사] ☞ 숨진 한국인 사업가, 필리핀 경찰청 본부서 피살 사건과 쇼의 배경은 이렇다. 필리핀에서는 지난해 6월 말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약과의 유혈전쟁'을 시작했다. 그 후 지금까지 7천여 명의 마약 용의자가 경찰이나 자경단 등에 의해 사살됐다. 그 과정에서 인권 유린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일부 경찰은 마약 단속을 빙자해 한인들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는 짓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한인 사업가 지씨가 납치 살해된 필리핀 중부 관광도시 앙헬레스를 찾아가 퍼포먼스(?)를 벌인 셈이다. 불법을 저지르는 경찰들에게 팔굽혀 펴기 시키기를 시키며 언론사들이 촬영하게 하는 행사로 한인 살해범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겠다는 뜻일까. ◆ 필리핀은 진심으로 사과했나? 필리핀 정부는 자국 경찰관에 의한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에 대해 1월 24일 공식으로 사과했다. 에르네스토 아벨라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이날 유가족에게 애도를 전하면서 "우리는 이 돌이킬 수 없는 인명의 손실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데 "사법력을 총동원하고 있다"면서 "한국 국민이 우리의 진실하고 더는 깊을 수 없는 유감을 받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필리핀 검찰은 최근 이와 관련해 현직 경찰관 2명 등 7명을 납치와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지난 21일 사의를 표명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를 반려했다. 오히려 같은 날 치러진 델라로사 청장의 생일잔치에까지 참석해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뒤늦게 지 씨의 부인 최모 씨를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만나 사과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필리핀 경찰청 본부 주차장 안에 임시 설치된 지 씨 분향소를 대체할 공식 분향소 설치와 지 씨 명예회복 조치 등 유족 요구사항을 수락했다. 이날 면담에 한국 측에선 김재신 주필리핀대사가 배석했다. 두테르테(왼쪽 2번째) 필리핀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각)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지난해 10월 납치·살해된 한국인 사업가 지모(53세) 씨의 부인 최모 씨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후 필리핀에선 현직 경찰관에 의한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이 정치·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외국인 피해 범죄로는 이례적으로 1월 26일 필리핀 상원의 청문회까지 열렸다. 경찰의 도덕성과 신뢰성에 치명타를 가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된 것이다. 필리핀 상원 공공질서위원회가 이날 개최한 청문회에는 지 모(53) 씨 납치·살해의 주범으로 체포된 리키 이사벨 경사와 증인, 로널드 델라로사 경찰청장 등이 출석했다. 지 씨 부인(53)도 참석했으며 청문회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판필로 락손 의원은 "지 씨 사건은 비극적인 일"이라며 "경찰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심을 잃을 만하다"고 비판했다. 한국인 사업가 지씨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사벨 경사 그러나 청문회에서는 지 씨의 피랍 사건을 놓고 경찰 총수와 용의자 간에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필리핀 경찰청은 몸값을 노린 이사벨 경사가 주범으로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사벨 경사의 부인이 지 씨 납치에 쓰인 차량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고 지 씨와 함께 납치됐다가 풀려난 가정부도 이사벨 경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사벨 경사를 포함한 범인들이 지 씨 납치 직후 은행 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찾아가는 모습이 폐쇄회로(CC) TV에 잡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이사벨 경사는 사건 당일 지 씨 동네에 간 적이 없으며 범행 차량의 번호판은 자신의 부인 차량을 복제한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 이사벨 경사는 경찰청에서 자신의 상관인 마약단속팀장이 지 씨를 총으로 때리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사벨 경사는 이 사건의 배후에 경찰 간부 2명이 있으며 자신은 희생양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이 사건에 경찰 간부는 물론 법무부 소속 국가수사국(NBI) 민간인 직원의 연루 의혹까지 제기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한국의 대응은 적절했나? 그런데 이번 사건의 중대성과 한국인 안전의 취약성을 놓고 볼 때 한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사건이 발생한 뒤 대한민국 외교부는 "주 필리핀대사관은 사건 접수 직후 앙헬레스 영사협력원을 피해자 숙소로 파견해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주필리핀대사관 총영사는 필리핀 경찰청 차장에게 현지 경찰에 의한 사건인 점 등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철저한 수사를 하라고 촉구하는 문서를 송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필리핀대사관은 필리핀 경찰위원회(비리 경찰관 조사 및 처벌 담당)에도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월 24일까지도 "필리핀 경찰관의 개입이 확인된 지난 17일 이후 김재신 주 필리핀 대사가 외교장관, 경찰청장, 검찰총장, 국가수사국 국장 등을 면담하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필리핀 외교장관과의 전화통화 등으로 항의하는 선에서 우리 정부는 1차 대응을 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의 반응은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외교적 결례에 가까운 반응에 비춰볼 때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한인 피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의 55번째 생일잔치에 참석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며 사실상 한국 정부를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인데 대한 지적이었다. 보다 강력한 항의와 외교적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비판과 자조적 여론이 SNS에 쏟아졌다. 여기에는 한국과 필리핀의 국력까지 비교하며 우리가 우습게 보이는 것 아니냐, 외교관들이 자국민 보호는 제대로 하는 것이냐는 등의 댓글이 잇따랐다. 사태가 엄중한 데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응이 없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정부는 1월 31일에야 필리핀에서 발생한 경찰관에 의한 재외국민 피살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한국과 필리핀 양국 간 외교치안 분야의 협의 체제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사건은 필리핀 공권력의 조직적 불법 행위에 의한 체류 우리 국민에 대한 범죄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며, 유사 사건 재발방지 대책 강구를 위해서 기존의 한-필리핀 차관급 정책협의회에서의 의제협의 강화와 함께 영사외교 채널 정례화 문제도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대변인은 "지난 29일 두테르테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서 경찰 내 부패척결 및 조직 재정비의 의지를 밝힌 데 주목하고 있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실효적 조처를 취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리더십의 부재 때문에 외교적 대응도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필리핀의 한인 납치 살해사건뿐 아니라, 대만에서 발생한 택시기사의 한국 여성 성폭행 사건과 부산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일본정부의 강경 대응에 대한 소극적 태도까지 외교부의 대응에 대한 신뢰도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외교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외교 현장에서 신속히 판단하고 적절한 조치를 제때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세월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과 사람을 완비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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