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S그룹 문건’의 굴욕…삼성, ‘무노조 경영’ 버릴까?

입력 2017.02.11 (09:00) 수정 2017.02.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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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삼성물산 사내 게시판에 생소한 게시물이 등장했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명령에 따른 공고문입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주도한 직원을 해고한 것이 불법행위였음을 알리도록 강제당한 겁니다. 이른바 '무노조 경영'을 내세워온 삼성으로선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삼성의 굴욕을 이끌어낸 노동자는 조장희 씨(금속노조 삼성지회 부지회장)입니다. 2011년 7월 삼성에버랜드에 노조가 설립되는 날 해고됐습니다. 노조 홍보를 위해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조 씨는 자신이 노조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에 해고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정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1심과 2심에서 이겼고, 대법원도 지난해 12월 29일 조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5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지난해 12월 29일 조장희 씨 해고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지난해 12월 29일 조장희 씨 해고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법원, "삼성이 'S그룹 문건'에 따라 조 씨 해고"

재판의 최대 쟁점은 'S그룹 노사전략'이라는 문건을 증거로 인정받느냐 여부였습니다. 2013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폭로한 이 문건에는 삼성 계열사들의 최고 경영진에게 노조 설립을 방해하고 무력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 상세하게 담겼습니다. 조장희 씨 등을 '문제인력'으로 지칭하며 대처하라는 지침도 포함됐습니다.

115쪽 분량 가운데 '노조 파괴'와 관련된 문구들을 정리해봤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삼성이 위 문건을 만들었으며, 이 문건의 지침에 따라 조 씨를 해고한 것이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도,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1심과 2심, 3심까지 법원이 일관되게 그 증거 능력을 인정한 '노조 파괴' 문건을 만들고, 그에 따라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S그룹 문건' 사태, 국회와 검찰은 뭘 했나?

2013년 10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문건이 공개된 당일, 삼성그룹은 블로그를 통해 "고위 임원들의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바람직한 조직문화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내부 문건임을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 6일 뒤 태도를 바꿨습니다. "해당 자료 전체를 받아 검토한 결과, 삼성에서 만든 자료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삼성에서 만든 문서라면 제목에 S그룹이라고 쓸 리가 없으며, 문서양식도 삼성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문건 공개가 큰 파문을 일으키자, 정의당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삼성 청문회' 개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새누리당의 반대로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이건희 회장과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등 삼성 임원진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문건 작성 자체는 범죄 사실이 아니다.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그룹 차원에서 부당노동행위에 개입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건희 회장 등을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결국, 에버랜드 부사장 등 4명이 총 3천만 원의 벌금형으로 약식기소된 게 처벌의 전부가 됐습니다.

삼성, 대법원 판결 후에도 'S그룹 문건' 인정 안 해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로도 삼성은 문건이 삼성과 관계없다는 주장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삼성 관계자는 "그 문건과 부당해고가 관련이 있다는 판결이지, 문건을 삼성이 만들었다고 특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은 민사소송의 결과일 뿐, 형사적으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니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입장입니다.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삼성이 그 문건을 작성하지 않았다면 괴문건으로 인해 삼성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셈"이라며 "삼성이 떳떳하다면 이제라도 해당 문건의 출처를 수사해달라고 검찰에 의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헌법 "자주적 단결권" vs. 삼성 "무노조 경영"
​​
우리나라 헌법 33조는 '단결권' 등 노동 삼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78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무노조 경영'이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반헌법적 가치'를 '경영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셈입니다.​​​


'S그룹 문건'과 조장호 씨 해고를 둘러싼 지난 5년간의 이야기는 '반헌법적'인 '무노조 경영' 신화가 민주공화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돼올 수 있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조장희 씨는 6년 가까운 시간을 실직자로 지내며 거대 기업과 싸워야 했습니다. 1심과 2심에서 이겼지만, 대법원까지 가야 했습니다. 대법원에서까지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도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가해자로 판정받은 사람들에게는 3천만 원 벌금형이 전부였습니다. 에버랜드는 그 사이 제일모직을 거쳐 삼성물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조 씨는 크게 달라진 환경과 시간을 뛰어넘어 6년 전처럼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도할 수 있을까요? 법원 판결에서는 졌지만, 삼성은 노조 주동자에게 어떤 고통을 가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노조 무력화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삼성 쇄신책, '무노조 경영' 폐기 담길까

삼성이 특검 수사가 끝나면 '쇄신책'을 내놓을 거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약속했던 미래전략실 해체를 비롯해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 국민연금 손실 논란과 관련한 사회공헌 기금 출연 등이 거론되는 모양새입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미래전략실 해체는 이미 공개된 순서인 데다, 사회공헌 기금도 자칫하면 돈으로 때우려 한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어 보다 의미 있는 내용을 담기 위해 여러모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경영학자는 "삼성이 글로벌스탠다드에 부합하지 못한 게 두 가지 있다. 경영권 세습과 무노조 경영"이라며 "경영권 세습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무노조 경영이라도 포기해야 쇄신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의 14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2월 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의 14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2월 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박근혜 구속'을 외치며 청와대를 향했던 촛불이 최근 들어 '이재용 구속'을 외치며 삼성으로도 향하고 있습니다. 불을 붙인 건 '국민연금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노동자들의 헌법적 권리마저 부정하면서 법망을 피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물려받은 이재용 체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특검과 촛불 앞에 선 이재용 부회장은 쇄신책에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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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S그룹 문건’의 굴욕…삼성, ‘무노조 경영’ 버릴까?
    • 입력 2017-02-11 09:00:35
    • 수정2017-02-11 09:18:33
    취재후·사건후

이달 초 삼성물산 사내 게시판에 생소한 게시물이 등장했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명령에 따른 공고문입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주도한 직원을 해고한 것이 불법행위였음을 알리도록 강제당한 겁니다. 이른바 '무노조 경영'을 내세워온 삼성으로선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삼성의 굴욕을 이끌어낸 노동자는 조장희 씨(금속노조 삼성지회 부지회장)입니다. 2011년 7월 삼성에버랜드에 노조가 설립되는 날 해고됐습니다. 노조 홍보를 위해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조 씨는 자신이 노조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에 해고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정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1심과 2심에서 이겼고, 대법원도 지난해 12월 29일 조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5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지난해 12월 29일 조장희 씨 해고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법원, "삼성이 'S그룹 문건'에 따라 조 씨 해고"

재판의 최대 쟁점은 'S그룹 노사전략'이라는 문건을 증거로 인정받느냐 여부였습니다. 2013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폭로한 이 문건에는 삼성 계열사들의 최고 경영진에게 노조 설립을 방해하고 무력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 상세하게 담겼습니다. 조장희 씨 등을 '문제인력'으로 지칭하며 대처하라는 지침도 포함됐습니다.

115쪽 분량 가운데 '노조 파괴'와 관련된 문구들을 정리해봤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삼성이 위 문건을 만들었으며, 이 문건의 지침에 따라 조 씨를 해고한 것이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도,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1심과 2심, 3심까지 법원이 일관되게 그 증거 능력을 인정한 '노조 파괴' 문건을 만들고, 그에 따라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S그룹 문건' 사태, 국회와 검찰은 뭘 했나?

2013년 10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문건이 공개된 당일, 삼성그룹은 블로그를 통해 "고위 임원들의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바람직한 조직문화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내부 문건임을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 6일 뒤 태도를 바꿨습니다. "해당 자료 전체를 받아 검토한 결과, 삼성에서 만든 자료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삼성에서 만든 문서라면 제목에 S그룹이라고 쓸 리가 없으며, 문서양식도 삼성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문건 공개가 큰 파문을 일으키자, 정의당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삼성 청문회' 개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새누리당의 반대로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이건희 회장과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등 삼성 임원진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문건 작성 자체는 범죄 사실이 아니다.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그룹 차원에서 부당노동행위에 개입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건희 회장 등을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결국, 에버랜드 부사장 등 4명이 총 3천만 원의 벌금형으로 약식기소된 게 처벌의 전부가 됐습니다.

삼성, 대법원 판결 후에도 'S그룹 문건' 인정 안 해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로도 삼성은 문건이 삼성과 관계없다는 주장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삼성 관계자는 "그 문건과 부당해고가 관련이 있다는 판결이지, 문건을 삼성이 만들었다고 특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은 민사소송의 결과일 뿐, 형사적으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니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입장입니다.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삼성이 그 문건을 작성하지 않았다면 괴문건으로 인해 삼성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셈"이라며 "삼성이 떳떳하다면 이제라도 해당 문건의 출처를 수사해달라고 검찰에 의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헌법 "자주적 단결권" vs. 삼성 "무노조 경영"
​​
우리나라 헌법 33조는 '단결권' 등 노동 삼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78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무노조 경영'이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반헌법적 가치'를 '경영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셈입니다.​​​


'S그룹 문건'과 조장호 씨 해고를 둘러싼 지난 5년간의 이야기는 '반헌법적'인 '무노조 경영' 신화가 민주공화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돼올 수 있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조장희 씨는 6년 가까운 시간을 실직자로 지내며 거대 기업과 싸워야 했습니다. 1심과 2심에서 이겼지만, 대법원까지 가야 했습니다. 대법원에서까지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도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가해자로 판정받은 사람들에게는 3천만 원 벌금형이 전부였습니다. 에버랜드는 그 사이 제일모직을 거쳐 삼성물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조 씨는 크게 달라진 환경과 시간을 뛰어넘어 6년 전처럼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도할 수 있을까요? 법원 판결에서는 졌지만, 삼성은 노조 주동자에게 어떤 고통을 가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노조 무력화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삼성 쇄신책, '무노조 경영' 폐기 담길까

삼성이 특검 수사가 끝나면 '쇄신책'을 내놓을 거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약속했던 미래전략실 해체를 비롯해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 국민연금 손실 논란과 관련한 사회공헌 기금 출연 등이 거론되는 모양새입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미래전략실 해체는 이미 공개된 순서인 데다, 사회공헌 기금도 자칫하면 돈으로 때우려 한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어 보다 의미 있는 내용을 담기 위해 여러모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경영학자는 "삼성이 글로벌스탠다드에 부합하지 못한 게 두 가지 있다. 경영권 세습과 무노조 경영"이라며 "경영권 세습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무노조 경영이라도 포기해야 쇄신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의 14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2월 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박근혜 구속'을 외치며 청와대를 향했던 촛불이 최근 들어 '이재용 구속'을 외치며 삼성으로도 향하고 있습니다. 불을 붙인 건 '국민연금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노동자들의 헌법적 권리마저 부정하면서 법망을 피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물려받은 이재용 체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특검과 촛불 앞에 선 이재용 부회장은 쇄신책에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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