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좁아요”…흑두루미 집단 가출?

입력 2017.02.12 (11:58) 수정 2017.02.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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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순천만입니다. 갯벌 한가운데 흑두루미떼가 모여 있습니다. 갯벌은 천적이 접근할 수 없어서 흑두루미가 좋아하는 잠자리입니다. 동이 트면 흑두루미들은 기지개를 켜고 날 준비를 합니다. 먹이터로 가는 것이죠. 이 순간을 보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스름 여명 속에서 필드스코프와 망원경으로 흑두루미떼를 관찰하는 사람들, 바로 '순천만 생태해설사'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마다 반복하는 활동입니다. 왜 굳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흑두루미를 보러 오는 걸까요? 잘 자는지 살피려고?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업무, '개체 수 파악'을 위해서입니다.


순천만 위로 날아가는 흑두루미순천만 위로 날아가는 흑두루미

한곳에 모여 잠을 자던 흑두루미가 차례차례 가족 단위로 날아오를 때, 그 숫자를 세면 전체 개체 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흑두루미가 여기저기 흩어지기 때문에 숫자 파악이 어렵습니다. 밤에는 어두워서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새벽녘, 잠을 깨고 날아오를 때가 최적의 순간입니다.


이날 파악된 두루미류는 흑두루미가 1,660, 재두루미 7, 검은목두루미 3, 캐나다두루미 3마리로 모두 1,673마리입니다. 일주일 전 1,737마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조금 줄었네요. 1996년 흑두루미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70여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20년 만에 이제 1,700마리를 넘었습니다. 경이로운 기록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에는 2천 마리도 가능해 보입니다. 천 마리 학을 기원했던 '천학(千鶴)의 꿈'을 넘어 어느새 2,000마리를 기대하게 된 겁니다.

순천시 대대들순천시 대대들

농경지에서 먹이를 찾는 흑두루미 가족농경지에서 먹이를 찾는 흑두루미 가족

갯벌 바로 위에는 넓은 농경지, 대대들이 있습니다. 흑두루미를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요. 친환경농법으로 농사짓고, 수확한 뒤 볏짚을 깔아둡니다. 매일 먹이도 뿌려줍니다. 행여 날다가 다리가 걸려 다칠까 봐 전봇대도 모두 뽑아냈습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들판이지요. 예전부터 흑두루미들의 주된 먹이터로 이용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는 흑두루미가 대대들에서 많이 보이질 않네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순천시 해창들순천시 해창들

수백 마리 흑두루미가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는 곳, 여기는 대대들에서 북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해창들입니다. 여기 흑두루미가 558마리, 이날 아침 가장 많은 무리가 모인 먹이터입니다. 과거에는 주로 대대들에 큰 무리가 모였지만 이제는 그 중심이 해창들로 옮겨간 셈입니다. 흑두루미가 천 마리를 넘어서면서 먹이터가 대대들 주변으로 확대된 겁니다. 이제는 해창들에도 먹이를 뿌려주고 있지요.


잠자리와 먹이터 지도를 보면 흑두루미의 확산 형태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대대들에서 서쪽으로 인월들과 장산들까지, 남동쪽으로는 여수시와 맞닿은 하사리까지 먹이터가 확대됐습니다. 한때 하사리에는 2백 마리가 넘는 흑두루미가 모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취재진이 찾아간 지난 1월에는 6마리가 하사리에서 목격됐습니다.

여수와 인접한 하사리에서 발견된 흑두루미 가족여수와 인접한 하사리에서 발견된 흑두루미 가족

하사리는 잠자리인 순천만 갯벌에서 3.5㎞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대대들이나 해창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먼 곳이죠. 위 사진을 보면 어린 개체 두 마리와 부모, 이렇게 4마리 한가족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녀석들은 왜 무리에게서 떨어져서 굳이 여기까지 날아왔을까요? 한적한 곳이 좋아서일까요? 아무튼, 독립심이나 개척 정신이 남달라 보입니다. 흑두루미의 가출(?)은 여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보성군 영등리에서 발견횐 흑두루미 가족보성군 영등리에서 발견횐 흑두루미 가족

역시 새끼 두 마리와 부모로 구성된 흑두루미 한 가족, 여기는 순천이 아닙니다. 순천만에서 13㎞가량 떨어진 보성군 영등리 벌판입니다. 순천만에서 보성까지 날아온 겁니다. 지난 2014년 처음으로 영등리에서 흑두루미가 발견됐습니다. 그 뒤로 적게는 한두 가족에서부터 많게는 최대 70여 마리의 흑두루미가 해마다 여기를 찾아옵니다. 하구 건너편인 보성군 호동리에도 흑두루미가 옵니다. 사실상 보성군까지 서식지가 확대된 겁니다.


벌교천 하구에도 갯벌이 펼쳐져 있습니다. 농경지에서 먹이를 먹던 흑두루미들이 벌교천 갯벌에서 쉬곤 합니다. 먹이터에 사람이나 천적이 나타나면 바로 옆 갯벌로 피했다가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휴식처인 갯벌과 먹이터인 농경지가 함께 있는 거죠. 지금은 흑두루미가 순천만에서 잠을 자고 보성으로 건너오지만, 나중에는 벌교천 하구에서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벌교천 하구 역시 순천만에 못지 않은 흑두루미 명소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겁니다.

벌교천 갯벌에서 쉬는 흑두루미벌교천 갯벌에서 쉬는 흑두루미


갯벌과 농경지는 인근 고흥과 해남에도 있습니다. 순천만 흑두루미 개체 수가 지금처럼 늘어난다면 보성과 고흥, 해남까지 남해안을 따라 흑두루미 서식지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최근까지 계속된 개체 수 증가 추세를 보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흑두루미를 보호하려는 주민들과 당국의 의지가 필요하겠죠. 이른바 '남해안 흑두루미 벨트', 일본 이즈미에 못지 않은 세계적 두루미 명소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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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만 좁아요”…흑두루미 집단 가출?
    • 입력 2017-02-12 11:58:37
    • 수정2017-02-12 14:06:33
    취재K
새벽녘 순천만입니다. 갯벌 한가운데 흑두루미떼가 모여 있습니다. 갯벌은 천적이 접근할 수 없어서 흑두루미가 좋아하는 잠자리입니다. 동이 트면 흑두루미들은 기지개를 켜고 날 준비를 합니다. 먹이터로 가는 것이죠. 이 순간을 보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스름 여명 속에서 필드스코프와 망원경으로 흑두루미떼를 관찰하는 사람들, 바로 '순천만 생태해설사'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마다 반복하는 활동입니다. 왜 굳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흑두루미를 보러 오는 걸까요? 잘 자는지 살피려고?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업무, '개체 수 파악'을 위해서입니다.


순천만 위로 날아가는 흑두루미
한곳에 모여 잠을 자던 흑두루미가 차례차례 가족 단위로 날아오를 때, 그 숫자를 세면 전체 개체 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흑두루미가 여기저기 흩어지기 때문에 숫자 파악이 어렵습니다. 밤에는 어두워서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새벽녘, 잠을 깨고 날아오를 때가 최적의 순간입니다.


이날 파악된 두루미류는 흑두루미가 1,660, 재두루미 7, 검은목두루미 3, 캐나다두루미 3마리로 모두 1,673마리입니다. 일주일 전 1,737마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조금 줄었네요. 1996년 흑두루미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70여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20년 만에 이제 1,700마리를 넘었습니다. 경이로운 기록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에는 2천 마리도 가능해 보입니다. 천 마리 학을 기원했던 '천학(千鶴)의 꿈'을 넘어 어느새 2,000마리를 기대하게 된 겁니다.

순천시 대대들
농경지에서 먹이를 찾는 흑두루미 가족
갯벌 바로 위에는 넓은 농경지, 대대들이 있습니다. 흑두루미를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요. 친환경농법으로 농사짓고, 수확한 뒤 볏짚을 깔아둡니다. 매일 먹이도 뿌려줍니다. 행여 날다가 다리가 걸려 다칠까 봐 전봇대도 모두 뽑아냈습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들판이지요. 예전부터 흑두루미들의 주된 먹이터로 이용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는 흑두루미가 대대들에서 많이 보이질 않네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순천시 해창들
수백 마리 흑두루미가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는 곳, 여기는 대대들에서 북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해창들입니다. 여기 흑두루미가 558마리, 이날 아침 가장 많은 무리가 모인 먹이터입니다. 과거에는 주로 대대들에 큰 무리가 모였지만 이제는 그 중심이 해창들로 옮겨간 셈입니다. 흑두루미가 천 마리를 넘어서면서 먹이터가 대대들 주변으로 확대된 겁니다. 이제는 해창들에도 먹이를 뿌려주고 있지요.


잠자리와 먹이터 지도를 보면 흑두루미의 확산 형태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대대들에서 서쪽으로 인월들과 장산들까지, 남동쪽으로는 여수시와 맞닿은 하사리까지 먹이터가 확대됐습니다. 한때 하사리에는 2백 마리가 넘는 흑두루미가 모인 적도 있다고 합니다. 취재진이 찾아간 지난 1월에는 6마리가 하사리에서 목격됐습니다.

여수와 인접한 하사리에서 발견된 흑두루미 가족
하사리는 잠자리인 순천만 갯벌에서 3.5㎞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대대들이나 해창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먼 곳이죠. 위 사진을 보면 어린 개체 두 마리와 부모, 이렇게 4마리 한가족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녀석들은 왜 무리에게서 떨어져서 굳이 여기까지 날아왔을까요? 한적한 곳이 좋아서일까요? 아무튼, 독립심이나 개척 정신이 남달라 보입니다. 흑두루미의 가출(?)은 여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보성군 영등리에서 발견횐 흑두루미 가족
역시 새끼 두 마리와 부모로 구성된 흑두루미 한 가족, 여기는 순천이 아닙니다. 순천만에서 13㎞가량 떨어진 보성군 영등리 벌판입니다. 순천만에서 보성까지 날아온 겁니다. 지난 2014년 처음으로 영등리에서 흑두루미가 발견됐습니다. 그 뒤로 적게는 한두 가족에서부터 많게는 최대 70여 마리의 흑두루미가 해마다 여기를 찾아옵니다. 하구 건너편인 보성군 호동리에도 흑두루미가 옵니다. 사실상 보성군까지 서식지가 확대된 겁니다.


벌교천 하구에도 갯벌이 펼쳐져 있습니다. 농경지에서 먹이를 먹던 흑두루미들이 벌교천 갯벌에서 쉬곤 합니다. 먹이터에 사람이나 천적이 나타나면 바로 옆 갯벌로 피했다가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휴식처인 갯벌과 먹이터인 농경지가 함께 있는 거죠. 지금은 흑두루미가 순천만에서 잠을 자고 보성으로 건너오지만, 나중에는 벌교천 하구에서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벌교천 하구 역시 순천만에 못지 않은 흑두루미 명소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겁니다.

벌교천 갯벌에서 쉬는 흑두루미

갯벌과 농경지는 인근 고흥과 해남에도 있습니다. 순천만 흑두루미 개체 수가 지금처럼 늘어난다면 보성과 고흥, 해남까지 남해안을 따라 흑두루미 서식지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최근까지 계속된 개체 수 증가 추세를 보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흑두루미를 보호하려는 주민들과 당국의 의지가 필요하겠죠. 이른바 '남해안 흑두루미 벨트', 일본 이즈미에 못지 않은 세계적 두루미 명소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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