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미일 정상회담에 가려진 오키나와의 눈물

입력 2017.02.12 (16:24) 수정 2017.02.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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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미일 국방회담에 이은 첫 미일 정상회담은 호사가들의 풍성한 화제를 낳았다. 안보 및 경제 분야 논의와 합의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보면,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나고 시 헤노코 이전이며, 이를 위해 양국이 협력'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앞서 국방장관 회담에서도 합의한 내용을 재확인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결론이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양국 정부의 군사·외교적 이익과 지역주민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해온 사안이다. 미일정상의 합의는 이미 법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정치적으로 재확인한 것이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신들의 합의'인 셈이다.

식민지·전쟁으로 얼룩진 슬픔의 섬

오키나와는 17세기까지 무역 등으로 번영한 독립 왕국이었다. 1609년 일본에 정복된 뒤, 1879년 일본에 강제 편입됐다. 태평양 전쟁 때는 양국의 교전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1945년 초 미군이 점령한 이후, 1972년 일본에 관할권을 반환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군사거점이다. 베트남전 때도 이곳은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주일 미군 2만 8천여 명 중 약70%가 오키나와에 있다. 본섬의 미군 시설만 30여 개, 일본 전체 미군기지의 약 75%정도이다. 오키나와의 면적은 일본 전체의 1%도 안된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천혜의 자연조건과 갖가지 문화유산을 갖췄기 때문에 구태여 군부대 주둔의 경제 효과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미군의 전략 거점...고통받는 주민들

오키나와 산하에 중국과의 영유권 다툼이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가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일본정부는 지역에 막대한 개발 예산을 지원하며, 지역여론을 무마했다. 항공기 소음과 사고 위험, 게다가 미군(군무원 포함)범죄까지, 불편과 고통은 지역 주민의 몫으로 남았다.

후텐마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본섬 기노완 시의 한복판에 있다. 활주로와 해병대 기숙사 등이 있다. 비행장 면적은 4.8㎢, 시 전체의 25%에 해당한다. 토지의 90%가 사유지로 알려져 있다. 도시에 둘러싸인 비행장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으로 불렸다.

1995년 미군 해병이 초등학교 여학생을 감금 성폭행하는 끔직한 범죄가 벌어졌다. '미군 추방운동'에 불이 붙었다. 1996년 기지 이전이 결정됐다. 일본 정부의 비용부담으로 기지를 옮겨가기로 했다.

주민들은 반대..법은 '국익'의 편

주민들은 오키나와 바깥으로 나갈 것을 원했다. 2006년, 논란 끝의 결론은 오키나와 현 나고 시 이전이었다. 헤노코 해안을 매립하기로 했다. 확장 이전이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일본의 비용부담으로 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게 됐다. 오키나와 바깥으로의 이전 계획은 미국의 반발로 무산됐다.

환경 파괴는 불가피했다. 산호초는 오키나와가 자랑하는 귀중한 자연자원이다. 지역 주민의 반대운동이 거세졌다. 잇따른 미군 범죄와 미군기 추락사고는 지역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지 이전 계획은 일본 역대 정권의 난제였다.

2012년 재집권한 아베 총리가 총대를 맸다. 예산 지원을 무기로 당시 오키나와 지사를 압박했다. 2013년 지사는 헤노코 이전하는 계획을 수용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 선거에서 시장과 지사를 '반대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 지사는 자치행정권을 무기로 미군 철수 운동의 선두에 섰다. 헤노코 해안의 매립 승인을 취소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맞대결은 소송전으로 번졌다. 2016년(지난해) 12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아베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후텐마 기지로 인한 주민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헤노코 지역에 기지를 세울 수밖에 없다", "현 전체적으로 미군기지로 인한 부담이 줄어든다"는 결론이었다. 오키나와 지사는 다른 수단으로 맞서겠다고 했지만, 매립공사 착수는 시간 문제로 보였다.

정상회담을 앞둔 속도전...미국에 선물?

지난해 12월, 후텐마 기지의 미군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가 해안에 불시착했다. 경찰의지역 폄훼발언에 겹쳐 지역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 공사 착수는 미일 정상회담에 임박해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2017년(올해) 1월 31일, 오키나와 지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원의원 10여 명을 만나, 오키나와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2월 3일, 미일 국방장관은 '헤노코 이전이위험 제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확인했다.

4일, 오키나와 지사는 미국 현지에서 이를 '무례한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시장은 미 국무부 일본부장과 만나 '화근을 남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는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답했다. 회담은 평행선으로 끝났다.

5일, 일본 정부는 매립공사 시작을 공식화했다. 6일, 매립용 콘크리트 블럭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오고, 7일, 블럭을 투입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최대 14톤의 블럭 220개가 투입된다. '오탁 방지막'이 설치되면, 매립 예정지 주변의 방파제 건설이 시작된다.


공사가 시작되자, 매립 예정지 인근에서는 주민 등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나고 시장은 "정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의를 존중하라"는 호소는 호소로 끝났다.


6일, 관방장관이 나서서 '헤노코 이전은 불가피하다'고 재확인했다. 그리고 11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헤노코 이전'은 마침점을 찍었다.


'매립공사 착수'는 공교롭게도 미일 정상회담에 임박해 단행됐다. 마치 아베 총리의 트럼프 대통령 만남에 즈음한 '또하나의 선물'처럼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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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2 16:24:20
    • 수정2017-02-12 16: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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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미일 국방회담에 이은 첫 미일 정상회담은 호사가들의 풍성한 화제를 낳았다. 안보 및 경제 분야 논의와 합의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보면,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나고 시 헤노코 이전이며, 이를 위해 양국이 협력'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앞서 국방장관 회담에서도 합의한 내용을 재확인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결론이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양국 정부의 군사·외교적 이익과 지역주민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해온 사안이다. 미일정상의 합의는 이미 법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정치적으로 재확인한 것이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신들의 합의'인 셈이다.

식민지·전쟁으로 얼룩진 슬픔의 섬

오키나와는 17세기까지 무역 등으로 번영한 독립 왕국이었다. 1609년 일본에 정복된 뒤, 1879년 일본에 강제 편입됐다. 태평양 전쟁 때는 양국의 교전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1945년 초 미군이 점령한 이후, 1972년 일본에 관할권을 반환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군사거점이다. 베트남전 때도 이곳은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주일 미군 2만 8천여 명 중 약70%가 오키나와에 있다. 본섬의 미군 시설만 30여 개, 일본 전체 미군기지의 약 75%정도이다. 오키나와의 면적은 일본 전체의 1%도 안된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천혜의 자연조건과 갖가지 문화유산을 갖췄기 때문에 구태여 군부대 주둔의 경제 효과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미군의 전략 거점...고통받는 주민들

오키나와 산하에 중국과의 영유권 다툼이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가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일본정부는 지역에 막대한 개발 예산을 지원하며, 지역여론을 무마했다. 항공기 소음과 사고 위험, 게다가 미군(군무원 포함)범죄까지, 불편과 고통은 지역 주민의 몫으로 남았다.

후텐마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본섬 기노완 시의 한복판에 있다. 활주로와 해병대 기숙사 등이 있다. 비행장 면적은 4.8㎢, 시 전체의 25%에 해당한다. 토지의 90%가 사유지로 알려져 있다. 도시에 둘러싸인 비행장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으로 불렸다.

1995년 미군 해병이 초등학교 여학생을 감금 성폭행하는 끔직한 범죄가 벌어졌다. '미군 추방운동'에 불이 붙었다. 1996년 기지 이전이 결정됐다. 일본 정부의 비용부담으로 기지를 옮겨가기로 했다.

주민들은 반대..법은 '국익'의 편

주민들은 오키나와 바깥으로 나갈 것을 원했다. 2006년, 논란 끝의 결론은 오키나와 현 나고 시 이전이었다. 헤노코 해안을 매립하기로 했다. 확장 이전이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일본의 비용부담으로 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게 됐다. 오키나와 바깥으로의 이전 계획은 미국의 반발로 무산됐다.

환경 파괴는 불가피했다. 산호초는 오키나와가 자랑하는 귀중한 자연자원이다. 지역 주민의 반대운동이 거세졌다. 잇따른 미군 범죄와 미군기 추락사고는 지역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지 이전 계획은 일본 역대 정권의 난제였다.

2012년 재집권한 아베 총리가 총대를 맸다. 예산 지원을 무기로 당시 오키나와 지사를 압박했다. 2013년 지사는 헤노코 이전하는 계획을 수용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 선거에서 시장과 지사를 '반대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 지사는 자치행정권을 무기로 미군 철수 운동의 선두에 섰다. 헤노코 해안의 매립 승인을 취소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맞대결은 소송전으로 번졌다. 2016년(지난해) 12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아베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후텐마 기지로 인한 주민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헤노코 지역에 기지를 세울 수밖에 없다", "현 전체적으로 미군기지로 인한 부담이 줄어든다"는 결론이었다. 오키나와 지사는 다른 수단으로 맞서겠다고 했지만, 매립공사 착수는 시간 문제로 보였다.

정상회담을 앞둔 속도전...미국에 선물?

지난해 12월, 후텐마 기지의 미군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가 해안에 불시착했다. 경찰의지역 폄훼발언에 겹쳐 지역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 공사 착수는 미일 정상회담에 임박해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2017년(올해) 1월 31일, 오키나와 지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원의원 10여 명을 만나, 오키나와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2월 3일, 미일 국방장관은 '헤노코 이전이위험 제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확인했다.

4일, 오키나와 지사는 미국 현지에서 이를 '무례한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시장은 미 국무부 일본부장과 만나 '화근을 남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는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답했다. 회담은 평행선으로 끝났다.

5일, 일본 정부는 매립공사 시작을 공식화했다. 6일, 매립용 콘크리트 블럭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오고, 7일, 블럭을 투입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최대 14톤의 블럭 220개가 투입된다. '오탁 방지막'이 설치되면, 매립 예정지 주변의 방파제 건설이 시작된다.


공사가 시작되자, 매립 예정지 인근에서는 주민 등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나고 시장은 "정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의를 존중하라"는 호소는 호소로 끝났다.


6일, 관방장관이 나서서 '헤노코 이전은 불가피하다'고 재확인했다. 그리고 11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헤노코 이전'은 마침점을 찍었다.


'매립공사 착수'는 공교롭게도 미일 정상회담에 임박해 단행됐다. 마치 아베 총리의 트럼프 대통령 만남에 즈음한 '또하나의 선물'처럼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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