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대 하숙생 구합니다”…‘은퇴농장’의 실험

입력 2017.02.1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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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2.1세. 그야말로 '100세 시대'가 머지 않은 때에 홀로서기를 선언한 어르신들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으로부터 독립한 이들이 모인 곳은 이름하여 '은퇴농장'.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함께 하숙하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실천하고 있다.

'은퇴농장'의 어르신 하숙생들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위치한 은퇴농장에는 총 9명의 하숙생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301호에 사는 안연환(73) 할머니는 2주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 5평짜리 원룸이지만 한 몸을 맡기기엔 안성맞춤이다. 냉장고, 옷장, 침대, 세탁기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도 모두 구비돼 있다.

4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남겨진 안연환 할머니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다. 말할 사람이 없어 일주일 동안 한 마디도 못할 때는 괜히 서러워지기도 했다.


남편과 15년이나 함께 살았던 집이라 몇 년은 버텼지만 이제는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제 살기도 힘든 세대에게 부모가 기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은퇴농장. 고민 끝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고 안 할머니는 말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니 외롭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다. 전원주택에서 살 때보다 하숙생이 된 지금이 더 편하다는 안연환 할머니. 할머니는 은퇴농장에서 홀로서기를 연습하며 새로운 삶을 사는 중이다.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가장 큰 고충은 삼시세끼를 해결하는 것이다. 은퇴농장은 매끼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제공해 어르신들의 불편함을 덜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농장주 김영철(65) 씨.

며칠째 내리는 눈 때문에 방에 갇힌 어르신들을 위해 가자미 회무침을 준비했다. 살아온 환경 만큼이나 식성도 제각각인 어르신들. 아무리 정성을 들인다 해도 매 끼니가 입에 맞을 순 없지만 밥 해먹는 수고만 덜어도 혼자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어르신들에게 처음부터 이곳 생활이 편했던 건 아니다. 은퇴농장 최고령 이문민(93) 할아버지는 '내가 왜 여기 왔을까' 후회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도시에서 살다가 난생 처음 시골 생활을 경험하니 낯설고 불편해서다. 그래도 살다 보니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할 수 있고 좋은 이웃을 사귈 수 있어 좋다.

30년 만에 다시 받는 '월급'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유기농 작물을 직접 재배하며 용돈을 벌기도 한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도 비닐하우스 안은 작업에 한창이다. 달래가 제철인 2월에는 70g씩 무게를 달아 소포장하는 작업을 하면 된다. 물량이 많은 여름에는 오후 5시까지 작업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이 일만 끝내면 오후는 온전한 휴식시간이다.


단순 작업이지만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재미도 있는데다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금액은 작업한 개수에 따라 천차만별. 월급 받는 날은 아침 새소리도 축하인사같다. 30년 만에 받는 노력의 대가는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나그네길 걷다 '이웃'을 만나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흐르듯 떠돌다 가는 인생을 비유한 것일 테다. 은퇴농장 하숙생들은 먼 길을 흘러 여기까지 왔다.

302호 김정희(77, 입주 6년) 할머니가 찾아가는 곳은 701호. 은퇴농장의 '비밀의원' 이재영(68, 입주 6개월)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이 방에 출입증을 얻은 유일한 이웃이다.


대장암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김정희 할머니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한의사 출신은 아니지만 이재영 씨는 수지침과 뜸공부를 꾸준히 해왔다. 병원 한 번 가기 힘든 외진 곳이라 그동안은 어디가 좀 불편해도 참을 때가 많았다. 그런 김정희 할머니에게 이재영 씨는 이곳에 오래 있어서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이곳 어르신들이 특히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매주 금요일 읍내에 있는 목욕탕에 가는 날. 콧바람도 쐬고 은행이나 약국 등 미뤄둔 일도 해결할 수 있어서다. 외진 곳이라 버스가 자주 안 들어와 혼자선 외출도 쉽지 않았는데, 농장주 김영철 씨가 모는 '셔틀버스'덕에 불편함을 덜었다. 매주 어르신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차를 바꾼 것도 벌써 다섯번이나 된다.


읍내의 한 목욕탕에 도착해 찜질복으로 갈아 입은 어르신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혼자일 때는 뭘 해도 귀찮더니 어울려 사니 뭘 해도 재밌다. 함께 살면서 어르신들은 외로움도 잊었다.


마음 기댈 곳 없을 땐 모든 계절이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겐 새봄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서로의 어깨에 묻은 외로움을 털어내고 멋진 황혼을 함께 경작하는 '은퇴농장'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KBS 1TV '사람과 사람들'(2월 15일 방송)에서 다시 볼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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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80대 하숙생 구합니다”…‘은퇴농장’의 실험
    • 입력 2017-02-17 13:48:40
    방송·연예
2014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2.1세. 그야말로 '100세 시대'가 머지 않은 때에 홀로서기를 선언한 어르신들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식으로부터 독립한 이들이 모인 곳은 이름하여 '은퇴농장'.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함께 하숙하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실천하고 있다.

'은퇴농장'의 어르신 하숙생들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위치한 은퇴농장에는 총 9명의 하숙생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301호에 사는 안연환(73) 할머니는 2주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 5평짜리 원룸이지만 한 몸을 맡기기엔 안성맞춤이다. 냉장고, 옷장, 침대, 세탁기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도 모두 구비돼 있다.

4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남겨진 안연환 할머니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다. 말할 사람이 없어 일주일 동안 한 마디도 못할 때는 괜히 서러워지기도 했다.


남편과 15년이나 함께 살았던 집이라 몇 년은 버텼지만 이제는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제 살기도 힘든 세대에게 부모가 기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은퇴농장. 고민 끝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고 안 할머니는 말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니 외롭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다. 전원주택에서 살 때보다 하숙생이 된 지금이 더 편하다는 안연환 할머니. 할머니는 은퇴농장에서 홀로서기를 연습하며 새로운 삶을 사는 중이다.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가장 큰 고충은 삼시세끼를 해결하는 것이다. 은퇴농장은 매끼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제공해 어르신들의 불편함을 덜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농장주 김영철(65) 씨.

며칠째 내리는 눈 때문에 방에 갇힌 어르신들을 위해 가자미 회무침을 준비했다. 살아온 환경 만큼이나 식성도 제각각인 어르신들. 아무리 정성을 들인다 해도 매 끼니가 입에 맞을 순 없지만 밥 해먹는 수고만 덜어도 혼자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어르신들에게 처음부터 이곳 생활이 편했던 건 아니다. 은퇴농장 최고령 이문민(93) 할아버지는 '내가 왜 여기 왔을까' 후회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도시에서 살다가 난생 처음 시골 생활을 경험하니 낯설고 불편해서다. 그래도 살다 보니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할 수 있고 좋은 이웃을 사귈 수 있어 좋다.

30년 만에 다시 받는 '월급'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유기농 작물을 직접 재배하며 용돈을 벌기도 한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도 비닐하우스 안은 작업에 한창이다. 달래가 제철인 2월에는 70g씩 무게를 달아 소포장하는 작업을 하면 된다. 물량이 많은 여름에는 오후 5시까지 작업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이 일만 끝내면 오후는 온전한 휴식시간이다.


단순 작업이지만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재미도 있는데다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금액은 작업한 개수에 따라 천차만별. 월급 받는 날은 아침 새소리도 축하인사같다. 30년 만에 받는 노력의 대가는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나그네길 걷다 '이웃'을 만나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흐르듯 떠돌다 가는 인생을 비유한 것일 테다. 은퇴농장 하숙생들은 먼 길을 흘러 여기까지 왔다.

302호 김정희(77, 입주 6년) 할머니가 찾아가는 곳은 701호. 은퇴농장의 '비밀의원' 이재영(68, 입주 6개월)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이 방에 출입증을 얻은 유일한 이웃이다.


대장암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김정희 할머니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한의사 출신은 아니지만 이재영 씨는 수지침과 뜸공부를 꾸준히 해왔다. 병원 한 번 가기 힘든 외진 곳이라 그동안은 어디가 좀 불편해도 참을 때가 많았다. 그런 김정희 할머니에게 이재영 씨는 이곳에 오래 있어서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이곳 어르신들이 특히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매주 금요일 읍내에 있는 목욕탕에 가는 날. 콧바람도 쐬고 은행이나 약국 등 미뤄둔 일도 해결할 수 있어서다. 외진 곳이라 버스가 자주 안 들어와 혼자선 외출도 쉽지 않았는데, 농장주 김영철 씨가 모는 '셔틀버스'덕에 불편함을 덜었다. 매주 어르신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차를 바꾼 것도 벌써 다섯번이나 된다.


읍내의 한 목욕탕에 도착해 찜질복으로 갈아 입은 어르신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혼자일 때는 뭘 해도 귀찮더니 어울려 사니 뭘 해도 재밌다. 함께 살면서 어르신들은 외로움도 잊었다.


마음 기댈 곳 없을 땐 모든 계절이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겐 새봄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서로의 어깨에 묻은 외로움을 털어내고 멋진 황혼을 함께 경작하는 '은퇴농장'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KBS 1TV '사람과 사람들'(2월 15일 방송)에서 다시 볼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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