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비운의 성혜림, 묘마저 없어질까…

입력 2017.02.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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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서쪽 끝에 있는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의 13구역. 지난 13일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지난 2002년 성혜림이 65세의 나이로 숨진 뒤 이곳에 묘지를 조성했다.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입구‘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입구

이 묘지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데비치' 국립묘지(우리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함)의 분원 격으로, 옛 소련과 러시아의 고위 정치인, 유명 작가와 배우 등이 묻힌 곳이다. 성 씨의 묘지에서 불과 10여m 거리에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아들 내외가 묻힌 무덤이 있기도 하다. 원래는 외국 국적의 사망자는 이 묘지에 묻힐 수 없는데, 북한 당국이 "성 씨의 시신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없으니 북한의 국모(國母) 수준으로 안치해 달라”고 러시아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 덮인 성혜림의 묘눈 덮인 성혜림의 묘

김정남이 피살됐다는 뉴스가 나온 이튿날(2월 15일), 성혜림의 묘지를 찾았다. 성씨의 묘 봉분에는 며칠간 내린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묘비 앞에는 누군가 두고 간 꽃다발이 다 시들은 채 놓여 있었다. 한눈에 묘지가 제때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검은색 대리석 묘비 앞쪽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1937.1.24~2002.5.18)가 새겨져 있고, 묘비 뒤편에는 '묘주 김정남'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김정남은 생모 성혜림이 소련으로 건너와 모스크바 남서쪽 바빌로바 85번지에 살던 때에도 병든 노모를 위해 한식당에 몰래 찾아와 미음과 김치 등을 챙겨다 준 효자로 소문나 있다.

김정남은 성혜림이 사망하자 2005년에 이곳에 묘지를 조성하고 성 씨의 기일이나 설, 추석 등 각종 명절 때 이곳에 들러 묘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김정남이 마지막으로 성 씨의 묘지를 찾은 것은 2009년 10월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했다.

묘지 관리인에게 북한 사람들이 묘지를 자주 방문하느냐고 묻자, "우리는 방문객들을 일일이 모니터하지는 않는다. 이 묘지는 누구라도 와서 헌화하고 참배하는 곳이다. 묘지 관리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인데, 만약 요청을 해오면 우리가 청소 등 관리를 해주기도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묘지 13구역묘지 13구역

현지 소식통은, 김정남이 없어도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2014년까지는 성 씨의 묘지에 각종 명절 때마다 헌화하는 등 그나마 관리를 해왔지만, 이후에는 묘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묘주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성 씨의 묘가 완전히 방치되거나, 김정남의 흔적 지우기 차원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비운의 여인 성혜림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김정남의 생모 성혜림

성혜림은 193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 풍문여중을 다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를 따라 월북했다.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영화배우가 된 뒤 19살의 나이에 월북작가 리기영의 장남인 리평과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

뛰어난 미모로 북한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하던 중 영화광인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강제 이혼하고 1969년부터 5살 연하인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했다. 1971년 아들 김정남을 낳았지만, 당시 북한에는 유교적·보수적 문화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던 터라 김일성은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일성이 1974년 김정일에게 김영숙과 결혼하라고 지시하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외국행을 종용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은, 당시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한 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나가시오. 노후는 잘 보장해 주겠소" 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뒤 성혜림은 불면증과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의 병을 얻어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다. 성 씨가 모스크바로 떠난 뒤, 김정남을 맡아 키운 것은 성 씨의 어머니 김원주와 언니 성혜랑이었다.

김정일의 사랑을 잃고 아들마저 고국에 남겨둔 채 머나먼 이국땅 모스크바에서 외롭게 살던 성 씨는 결국 2002년 5월 유선암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생모 성혜림을 못내 그리워하던 아들 김정남 마저 이복동생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중국과 마카오 등지를 떠돌다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되면서, 성혜림 김정남 모자는 모두 이국땅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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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비운의 성혜림, 묘마저 없어질까…
    • 입력 2017-02-17 16:48:00
    특파원 리포트
모스크바 서쪽 끝에 있는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의 13구역. 지난 13일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지난 2002년 성혜림이 65세의 나이로 숨진 뒤 이곳에 묘지를 조성했다.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입구
이 묘지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데비치' 국립묘지(우리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함)의 분원 격으로, 옛 소련과 러시아의 고위 정치인, 유명 작가와 배우 등이 묻힌 곳이다. 성 씨의 묘지에서 불과 10여m 거리에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아들 내외가 묻힌 무덤이 있기도 하다. 원래는 외국 국적의 사망자는 이 묘지에 묻힐 수 없는데, 북한 당국이 "성 씨의 시신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없으니 북한의 국모(國母) 수준으로 안치해 달라”고 러시아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 덮인 성혜림의 묘
김정남이 피살됐다는 뉴스가 나온 이튿날(2월 15일), 성혜림의 묘지를 찾았다. 성씨의 묘 봉분에는 며칠간 내린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묘비 앞에는 누군가 두고 간 꽃다발이 다 시들은 채 놓여 있었다. 한눈에 묘지가 제때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검은색 대리석 묘비 앞쪽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1937.1.24~2002.5.18)가 새겨져 있고, 묘비 뒤편에는 '묘주 김정남'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김정남은 생모 성혜림이 소련으로 건너와 모스크바 남서쪽 바빌로바 85번지에 살던 때에도 병든 노모를 위해 한식당에 몰래 찾아와 미음과 김치 등을 챙겨다 준 효자로 소문나 있다.

김정남은 성혜림이 사망하자 2005년에 이곳에 묘지를 조성하고 성 씨의 기일이나 설, 추석 등 각종 명절 때 이곳에 들러 묘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김정남이 마지막으로 성 씨의 묘지를 찾은 것은 2009년 10월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했다.

묘지 관리인에게 북한 사람들이 묘지를 자주 방문하느냐고 묻자, "우리는 방문객들을 일일이 모니터하지는 않는다. 이 묘지는 누구라도 와서 헌화하고 참배하는 곳이다. 묘지 관리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인데, 만약 요청을 해오면 우리가 청소 등 관리를 해주기도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묘지 13구역
현지 소식통은, 김정남이 없어도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2014년까지는 성 씨의 묘지에 각종 명절 때마다 헌화하는 등 그나마 관리를 해왔지만, 이후에는 묘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묘주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성 씨의 묘가 완전히 방치되거나, 김정남의 흔적 지우기 차원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비운의 여인 성혜림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
성혜림은 193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 풍문여중을 다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를 따라 월북했다.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영화배우가 된 뒤 19살의 나이에 월북작가 리기영의 장남인 리평과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

뛰어난 미모로 북한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하던 중 영화광인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강제 이혼하고 1969년부터 5살 연하인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했다. 1971년 아들 김정남을 낳았지만, 당시 북한에는 유교적·보수적 문화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던 터라 김일성은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일성이 1974년 김정일에게 김영숙과 결혼하라고 지시하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외국행을 종용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은, 당시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한 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나가시오. 노후는 잘 보장해 주겠소" 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뒤 성혜림은 불면증과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의 병을 얻어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다. 성 씨가 모스크바로 떠난 뒤, 김정남을 맡아 키운 것은 성 씨의 어머니 김원주와 언니 성혜랑이었다.

김정일의 사랑을 잃고 아들마저 고국에 남겨둔 채 머나먼 이국땅 모스크바에서 외롭게 살던 성 씨는 결국 2002년 5월 유선암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생모 성혜림을 못내 그리워하던 아들 김정남 마저 이복동생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중국과 마카오 등지를 떠돌다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되면서, 성혜림 김정남 모자는 모두 이국땅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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