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이재용 뇌물죄’…삼성은 미국에 천문학적 벌금 낼까?

입력 2017.02.18 (09:02) 수정 2017.02.1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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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일부 언론과 재계에서 '삼성 위기론'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요 사업과 인사,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올 스톱'되고, 글로벌 위상이 실추돼 우리 경제에도 큰 부담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의 구속 수감이 삼성의 사업과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을 줄지, 아니면 재계와 삼성의 광고를 받아야 하는 매체들이 호들갑을 떠는 건지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지켜봐야 판가름이 날 사안입니다. 하지만 재계와 일부 언론이 한목소리로 제기하는 우려 가운데는 그 타당성을 당장 따져볼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FCPA)이 그것입니다.

재계·언론 “미국 부패방지법 적용 우려”

포털사이트에 '삼성'과 '부패방지법'을 검색해보면 많은 기사가 나옵니다. 삼성에 뇌물 혐의가 적용되면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그리되면 막대한 벌금을 물고 미국 내 사업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될 거라는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은 미국 기업이 외국의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1977년 제정됐습니다. 2000년대 들어 외국 기업들에도 많이 적용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지난해까지 가장 많은 벌금을 낸 10개 기업 가운데 7개 기업이 외국 기업입니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 석유회사 Statoil ASA는 이란에서의 사업을 위해 이란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본국인 노르웨이에서 기소돼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법무부가 해외부패방지법을 적용해 벌금 2백여억 원을 미국 정부에 내도록 했습니다.

이 사례를 보면 미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뇌물 제공에 대해서도 이 법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회사의 주식예탁증서(ADR)가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고, 뇌물 가운데 일부를 미국 은행 계좌를 통해 송금했다는 점이 이 법의 적용 요건에 해당됐기 때문입니다.

미국 부패방지법, 어떤 경우에 걸리나?

2013년 12월에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이 작성한 '해외 반부패 입법동향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는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미 부패방지법의 적용 대상이 되려면 다음 3가지 요건 가운데 최소한 하나를 충족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토대로 삼성이 이 법의 적용 대상에 해당하는지를 따져보겠습니다. 특검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한 혐의에 따르면, 뇌물을 제공한 기업은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미국 법에 따라 설립된 기업도, 주 사업장(principal place of business)이 미국에 있는 기업도 아니므로 1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도, 미 증권거래소에 보고 의무가 있는 기업도 아니기에 2번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한 기업도 포함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ADR도 발행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기업 중 ADR 발행업체는 16개사로,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성이 거론된 기업으로는 포스코와 KT, SK텔레콤, LG디스플레이가 해당합니다.

가장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은 3번째 항목입니다. 미국과 관련이 없는 외국 기업이라도 미국 영토 내에서 뇌물 제공과 관련된 행위를 했다면 제재 대상이 된다는 얘기인데요, '미국 영토 내에서'라는 표현이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 확대 해석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뇌물 제공을 협의하거나 송금을 하는 등의 과정에서 미국의 통신망이나 은행 전산망을 이용했다면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의 뇌물 제공 혐의 가운데 국외와 관련된 부분은 최순실 소유 독일 법인인 코레스포츠에 280만 유로를 제공한 것이 유일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미국과의 관련성이 드러난 부분은 아직 없습니다.

“삼성 뇌물죄 성립되면 몇 조 벌금에 관세까지?”

법인세 실효세율을 놓고 이재명 성남시장과 팩트 논쟁을 벌였던 전원책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부패방지법의 벌금 조항은 해당 기업이 뇌물 제공을 통해 얻으려 했던 이익과 연동돼 있습니다. 삼성이 휴대전화를 엄청나게 많이 수출한다고 해서 그 매출액에 비례해 벌금을 매기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또 이 법에 따라 지금까지 벌금을 가장 많이 낸 기업은 독일의 지멘스인데, 9천억 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332개 사업에서 4천2백여 차례에 걸쳐 1조 5천여억 원을 뇌물로 줬는데도 말입니다.

만에 하나, 삼성전자가 이 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해도 미국이 이 때문에 삼성전자 수출품에 관세를 더 붙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미국 내 행정부처에 납품을 못 하게 하는 등의 불이익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무지의 산물? 계산된 과장? 무엇을 노리나

이재용 부회장에게 뇌물죄가 적용된다 해도 삼성이 미 해외부패방지법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한데도 재계와 일부 언론은 뇌물 혐의에 대한 특검 수사가 진전될 때마다 이런 '우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려는 때로 공포를 조장하는 수준까지 치닫습니다. '무지의 산물'일까요? '계산된 과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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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8 09:02:03
    • 수정2017-02-18 09:57:17
    취재후·사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일부 언론과 재계에서 '삼성 위기론'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요 사업과 인사,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올 스톱'되고, 글로벌 위상이 실추돼 우리 경제에도 큰 부담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의 구속 수감이 삼성의 사업과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을 줄지, 아니면 재계와 삼성의 광고를 받아야 하는 매체들이 호들갑을 떠는 건지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지켜봐야 판가름이 날 사안입니다. 하지만 재계와 일부 언론이 한목소리로 제기하는 우려 가운데는 그 타당성을 당장 따져볼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FCPA)이 그것입니다.

재계·언론 “미국 부패방지법 적용 우려”

포털사이트에 '삼성'과 '부패방지법'을 검색해보면 많은 기사가 나옵니다. 삼성에 뇌물 혐의가 적용되면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그리되면 막대한 벌금을 물고 미국 내 사업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될 거라는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은 미국 기업이 외국의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1977년 제정됐습니다. 2000년대 들어 외국 기업들에도 많이 적용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지난해까지 가장 많은 벌금을 낸 10개 기업 가운데 7개 기업이 외국 기업입니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 석유회사 Statoil ASA는 이란에서의 사업을 위해 이란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본국인 노르웨이에서 기소돼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법무부가 해외부패방지법을 적용해 벌금 2백여억 원을 미국 정부에 내도록 했습니다.

이 사례를 보면 미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뇌물 제공에 대해서도 이 법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회사의 주식예탁증서(ADR)가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고, 뇌물 가운데 일부를 미국 은행 계좌를 통해 송금했다는 점이 이 법의 적용 요건에 해당됐기 때문입니다.

미국 부패방지법, 어떤 경우에 걸리나?

2013년 12월에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이 작성한 '해외 반부패 입법동향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는 미국 해외부패방지법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미 부패방지법의 적용 대상이 되려면 다음 3가지 요건 가운데 최소한 하나를 충족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토대로 삼성이 이 법의 적용 대상에 해당하는지를 따져보겠습니다. 특검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한 혐의에 따르면, 뇌물을 제공한 기업은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미국 법에 따라 설립된 기업도, 주 사업장(principal place of business)이 미국에 있는 기업도 아니므로 1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도, 미 증권거래소에 보고 의무가 있는 기업도 아니기에 2번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한 기업도 포함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ADR도 발행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기업 중 ADR 발행업체는 16개사로,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성이 거론된 기업으로는 포스코와 KT, SK텔레콤, LG디스플레이가 해당합니다.

가장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은 3번째 항목입니다. 미국과 관련이 없는 외국 기업이라도 미국 영토 내에서 뇌물 제공과 관련된 행위를 했다면 제재 대상이 된다는 얘기인데요, '미국 영토 내에서'라는 표현이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 확대 해석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뇌물 제공을 협의하거나 송금을 하는 등의 과정에서 미국의 통신망이나 은행 전산망을 이용했다면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의 뇌물 제공 혐의 가운데 국외와 관련된 부분은 최순실 소유 독일 법인인 코레스포츠에 280만 유로를 제공한 것이 유일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미국과의 관련성이 드러난 부분은 아직 없습니다.

“삼성 뇌물죄 성립되면 몇 조 벌금에 관세까지?”

법인세 실효세율을 놓고 이재명 성남시장과 팩트 논쟁을 벌였던 전원책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부패방지법의 벌금 조항은 해당 기업이 뇌물 제공을 통해 얻으려 했던 이익과 연동돼 있습니다. 삼성이 휴대전화를 엄청나게 많이 수출한다고 해서 그 매출액에 비례해 벌금을 매기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또 이 법에 따라 지금까지 벌금을 가장 많이 낸 기업은 독일의 지멘스인데, 9천억 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332개 사업에서 4천2백여 차례에 걸쳐 1조 5천여억 원을 뇌물로 줬는데도 말입니다.

만에 하나, 삼성전자가 이 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해도 미국이 이 때문에 삼성전자 수출품에 관세를 더 붙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미국 내 행정부처에 납품을 못 하게 하는 등의 불이익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무지의 산물? 계산된 과장? 무엇을 노리나

이재용 부회장에게 뇌물죄가 적용된다 해도 삼성이 미 해외부패방지법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한데도 재계와 일부 언론은 뇌물 혐의에 대한 특검 수사가 진전될 때마다 이런 '우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려는 때로 공포를 조장하는 수준까지 치닫습니다. '무지의 산물'일까요? '계산된 과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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