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흑묘백묘’ 덩샤오핑, 사드는 어떻게 했을까?

입력 2017.02.19 (14:42) 수정 2017.02.1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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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오늘(19일)로 서거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오후 9시쯤, 베이징에 있는 인민해방군 소속 301 병원에서 운명했다.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두툼한 안경 너머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던 추도사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그로부터 20년, 개혁개방의 ‘붉은 홍기’를 들고 앞만 보고 달려온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에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했다. 덩샤오핑은 지금 중국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할까?


덩샤오핑의 고향은 쓰촨(四川) 성 광안(廣安) 시 외곽에 있는 셰싱(協興)진 파이팡(牌坊) 촌이다.중국의 4대 직할 시 중 하나인 충칭(重慶)에서 북쪽으로 150㎞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리고 철도도 놓아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취강’(渠江)에 배를 띄워 충칭을 다녀야 했다. 예전 같으면 벽촌이었을 이곳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까닭은 순전히 덩샤오핑 덕분이다. 덩샤오핑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생가는 지금 ‘덩샤오핑 고향 유적 관광지’(鄧小平故里旅游景區)로 단장되었다. 최근 이곳에 덩샤오핑 서거 20주기를 맞아 전국에서 온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1년 7월 ‘국가중점문물’로 지정된 생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삼합원(三合院) 형식으로 지어졌다. ‘ㄷ’자 모양에 청기와를 얹은 서향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집 앞으로 작은 호수가 있다. 생가 정중앙 처마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쓴 ‘덩샤오핑 동지 고거’ 편액이 걸려 있다.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15살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가에는 아직도 덩샤오핑이 쓰던 전통적인 나무 침대와 책상이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덩샤오핑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한 관람객은 문화혁명 이후 중국은 긴 시간 가난과 쇠잔함에 시달렸지만, 그가 주창한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점점 강해졌고 지금은 세계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생가 부근에 세워진 박물관 격인 진열관은 덩샤오핑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담았다. 역사적인 중국의 개혁 개방 노선을 선언한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 회의(11기 3중전회) 회의장과 1981년 허베이 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사열 당시 덩샤오핑이 탄 '홍치'는 옛 주인을 잃었지만, 예전의 위용을 그대로다. 특히 덩샤오핑이 평소 가장 아끼던 '흑묘백묘 화'는 그의 실용주의 사상을 잘 느낄 수 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로, 19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취한 중국의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말한다. 예로부터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 성은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렸다. 하천이 많고 땅이 비옥해 농사짓기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곡식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를 키워 쥐를 잡았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흑묘백묘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사상도 어릴 적 이곳에서 보고 배운 삶의 지혜가 담겨있다.


덩샤오핑 추모관은 그의 소탈한 풍모를 느낄 수 있도록 생전 집무실과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창틀까지 떼어다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곳에는 덩샤오핑이 해외 국빈으로부터 받은 선물도 전시돼 있는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61년 7월 김일성에게 받은 자개함과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친필로 써 준 휘호다. 김 전 대통령은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밟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임을 명심하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붓글씨로 썼다. 위아래로 전시된 남북 정상의 선물이 추모관에서 묘한 대조를 이뤘다.


생가를 찾는 관광객 중에는 선전과 광저우 등 동부 연안 개발지역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큰 혜택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동상도 고향 생가에 세워진 것보다 선전(深圳) 롄화산(莲花山)에 세워진 것이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덩샤오핑에 대한 전 중국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04년 5월 17일, 저장(浙江) 성 서기 시절 관리들과 함께 생가를 방문해 나무를 식수하고 ‘저장림’이란 표지석을 세웠다. 그리고 8년 뒤인 지난 2012년 12월,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된 뒤 가장 먼저 선전을 찾아 롄화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고 덩샤오핑의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덩샤오핑이 서거한 지 오늘로 20년을 맞았다. 동북아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센카쿠 열도(尖閣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으로 일본과 긴장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나라와는 사드 배치로 갈등 겪고 있다. 지금 중국의 모습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와 거리가 멀다.


덩샤오핑 시대에도 댜오위다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였다. 지난 1978년 10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댜오위다오 분쟁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당시 그는 "양국 정부가 이 문제(센카쿠 분쟁)를 내버려두는 것이 비교적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문제는 더 내버려둬도 괜찮고, '10년(다음 세대, 다음다음 세대)'이 지나 처리해도 된다"고 밝혔다. 이어 덩샤오핑은 "우리 세대 사람들의 지혜가 부족해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좀 더 '현명한 우리 후세들'은 반드시 양측이 모두 받아들이는 해결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센카쿠 분쟁은 아직도 양측 모두가 받아들이는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더욱이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보복의 손은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이런 시진핑 지도부에 대해 덩샤오핑은 '현명한 후세'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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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흑묘백묘’ 덩샤오핑, 사드는 어떻게 했을까?
    • 입력 2017-02-19 14:42:20
    • 수정2017-02-19 14: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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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오늘(19일)로 서거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오후 9시쯤, 베이징에 있는 인민해방군 소속 301 병원에서 운명했다.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두툼한 안경 너머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던 추도사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그로부터 20년, 개혁개방의 ‘붉은 홍기’를 들고 앞만 보고 달려온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에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했다. 덩샤오핑은 지금 중국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할까? 덩샤오핑의 고향은 쓰촨(四川) 성 광안(廣安) 시 외곽에 있는 셰싱(協興)진 파이팡(牌坊) 촌이다.중국의 4대 직할 시 중 하나인 충칭(重慶)에서 북쪽으로 150㎞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리고 철도도 놓아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취강’(渠江)에 배를 띄워 충칭을 다녀야 했다. 예전 같으면 벽촌이었을 이곳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까닭은 순전히 덩샤오핑 덕분이다. 덩샤오핑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생가는 지금 ‘덩샤오핑 고향 유적 관광지’(鄧小平故里旅游景區)로 단장되었다. 최근 이곳에 덩샤오핑 서거 20주기를 맞아 전국에서 온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1년 7월 ‘국가중점문물’로 지정된 생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삼합원(三合院) 형식으로 지어졌다. ‘ㄷ’자 모양에 청기와를 얹은 서향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집 앞으로 작은 호수가 있다. 생가 정중앙 처마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쓴 ‘덩샤오핑 동지 고거’ 편액이 걸려 있다.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15살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가에는 아직도 덩샤오핑이 쓰던 전통적인 나무 침대와 책상이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덩샤오핑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한 관람객은 문화혁명 이후 중국은 긴 시간 가난과 쇠잔함에 시달렸지만, 그가 주창한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점점 강해졌고 지금은 세계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생가 부근에 세워진 박물관 격인 진열관은 덩샤오핑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담았다. 역사적인 중국의 개혁 개방 노선을 선언한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 회의(11기 3중전회) 회의장과 1981년 허베이 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사열 당시 덩샤오핑이 탄 '홍치'는 옛 주인을 잃었지만, 예전의 위용을 그대로다. 특히 덩샤오핑이 평소 가장 아끼던 '흑묘백묘 화'는 그의 실용주의 사상을 잘 느낄 수 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로, 19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취한 중국의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말한다. 예로부터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 성은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렸다. 하천이 많고 땅이 비옥해 농사짓기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곡식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를 키워 쥐를 잡았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흑묘백묘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사상도 어릴 적 이곳에서 보고 배운 삶의 지혜가 담겨있다. 덩샤오핑 추모관은 그의 소탈한 풍모를 느낄 수 있도록 생전 집무실과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창틀까지 떼어다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곳에는 덩샤오핑이 해외 국빈으로부터 받은 선물도 전시돼 있는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61년 7월 김일성에게 받은 자개함과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친필로 써 준 휘호다. 김 전 대통령은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밟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임을 명심하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붓글씨로 썼다. 위아래로 전시된 남북 정상의 선물이 추모관에서 묘한 대조를 이뤘다. 생가를 찾는 관광객 중에는 선전과 광저우 등 동부 연안 개발지역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큰 혜택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동상도 고향 생가에 세워진 것보다 선전(深圳) 롄화산(莲花山)에 세워진 것이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덩샤오핑에 대한 전 중국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04년 5월 17일, 저장(浙江) 성 서기 시절 관리들과 함께 생가를 방문해 나무를 식수하고 ‘저장림’이란 표지석을 세웠다. 그리고 8년 뒤인 지난 2012년 12월,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된 뒤 가장 먼저 선전을 찾아 롄화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고 덩샤오핑의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덩샤오핑이 서거한 지 오늘로 20년을 맞았다. 동북아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센카쿠 열도(尖閣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으로 일본과 긴장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나라와는 사드 배치로 갈등 겪고 있다. 지금 중국의 모습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와 거리가 멀다. 덩샤오핑 시대에도 댜오위다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였다. 지난 1978년 10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댜오위다오 분쟁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당시 그는 "양국 정부가 이 문제(센카쿠 분쟁)를 내버려두는 것이 비교적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문제는 더 내버려둬도 괜찮고, '10년(다음 세대, 다음다음 세대)'이 지나 처리해도 된다"고 밝혔다. 이어 덩샤오핑은 "우리 세대 사람들의 지혜가 부족해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좀 더 '현명한 우리 후세들'은 반드시 양측이 모두 받아들이는 해결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센카쿠 분쟁은 아직도 양측 모두가 받아들이는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더욱이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보복의 손은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이런 시진핑 지도부에 대해 덩샤오핑은 '현명한 후세'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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