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재미있는 아시안게임 피겨스케이팅의 스타들

입력 2017.02.22 (11:15) 수정 2017.02.2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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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아시안게임, 아시아 피겨 중흥기와 함께


1986년 시작된 동계아시안게임은 공교롭게도 아시아 피겨의 상승기와 어우려져 있다.

1989년 일본의 이토 미도리가 아시아 선수론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발전을 거듭한 아시아 피겨는 2006년 토리노 올림픽 여자 싱글에서 일본 아라카와 시즈카가 금메달을 딴 것을 시작으로 2010밴쿠버 올림픽 김연아의 여자 싱글 금메달, 2010년 밴쿠버 올림픽 페어부문 쉔슈에-자오홍보의 금메달, 2014년 남자 싱글에서 일본 하뉴 유즈류의 금메달등 한중일 모두 올림픽 금메달을 딸 정도로 성장했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아시안게임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은 물론 4대륙 선수권이나 각국 내셔널 챔피언십보다 권위가 떨어지는게 사실이지만, 그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계아시안게임은 아시아 피겨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등용문 역할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중국 쉔슈에-자오홍보,아시안게임 4연속 금메달에서 올림픽 금메달까지

중국 페어의 상징 쉔 슈에-자오 홍보중국 페어의 상징 쉔 슈에-자오 홍보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페어팀 쉔슈에-자오홍보는 96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99년과 2003년 2007년 까지 모두 4번이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고, 결과는 4번 모두 금메달이었다.

전설적인 코치 야오 빈의 지도아래 숱한 명작을 만들어낸 중국 페어 1세대의 간판인 쉔-자오팀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특히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인 '투란도트'는 2003년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만든 음악일 뿐더러,쉔-자오의 연기중 아직도 회자되는 명작인데,2003년 아시안게임에서도 그들의 투란도트는 큰 울림을 주는 연기였다.

이들은 2007년이후 은퇴, 결혼, 복귀의 과정을 거친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마지막 무대를 올림픽 금메달로 장식하며, 선수로서 최고의 결말을 완성했다.

일본 아라카와 시즈카,아시안게임 은-금에서 올림픽 금메달로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아라카와 시즈카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아라카와 시즈카

10대 시절 일본 피겨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천재 소녀 아라카와 시즈카, 그녀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1999년 첫 번째 출전했던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그녀는 4년뒤 2003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는데, 이것이 그녀의 피겨 인생에서 재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2002년 올림픽 출전을 놓친뒤 시름에 잠겨있던 아라카와는 2003년 아시안게임 우승이후 달라지기 시작했고,2004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또다시 슬럼프에 빠졌지만,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일본의 영웅이 됐다.

그랑프리 파이널은 물론이고,그랑프리 시리즈 우승도 없는 그녀지만,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낸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중국 첸 루, 루루의 눈물

중국 여자 싱글의 상징과도 같은 여인 첸 루. 영미권에선 루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10년 연속 중국선수권 챔피언이자, 2005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이다.1996년 아시안게임에선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96년 세계선수권에선 특유의 예술적인 연기로 예술점에서 6.0 만점을 받는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도 은메달에 그치자,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선 프리스케이팅 마지막 점프에서 예상하지 않은 3회전-3회전 점프를 성공시키면서 연기를 끝냈고, 연기이후 감정이 복받친듯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많은 이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당시 미국 방송은 '웰컴백 루루'라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결국 첸루는 94년-98년 2회 연속 올림픽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국 장민,시대를 잘못만난 4회전 점퍼

중국 소림 피겨의 시작 장민중국 소림 피겨의 시작 장민

중국의 장민은 아시안게임을 물론,주요 대회 금메달 기록이 전혀 없지만 피겨 역사에 이름을 남긴 특이한 선수이다.

18살이던 94년 릴레함메르 대회에 첫 출전했는데, 당시 국제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전혀 없었던 그는 쇼트에서 당시로는 드문 트리플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시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프리에선 무려 4회전 토룹을 성공시켰는데, 올림픽에서 4회전 점프를 성공시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9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선 쇼트프로그램에서 4회전 토룹을 성공해,쇼트프로그램 사상 최초의 4회전 기록도 장민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선수였다. 지금처럼 기술점을 따로 채점했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6.0만점으로 채점하던 시기, 장민은 4회전 기록만을 남긴채 실력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아시안게임 성적은 96년 은메달과 2003년 동메달을 기록했다.

중국 천하속 북한의 페어스케이팅 금메달

아시안게임은 여자싱글은 일본이 금메달 4개로 가장 많지만 남자 싱글과 페어, 아이스댄스에서 중국이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1회 대회 페어는 북한의 남혜영-김혁 팀이 금메달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가 페어에서 단 한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한 것은 감안하면 북한의 페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는 셈이다.

카자흐스탄의 데니스 텐이 지난 2011년 대회 남자 싱글 금메달을 따낸뒤, 3년뒤 소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경력도 있다.우리나라는 아이스댄스 양태화-이천군,여자 싱글의 곽민정이 따낸 동메달 2개 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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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7-02-22 11:16:29
    취재K

동계 아시안게임, 아시아 피겨 중흥기와 함께


1986년 시작된 동계아시안게임은 공교롭게도 아시아 피겨의 상승기와 어우려져 있다.

1989년 일본의 이토 미도리가 아시아 선수론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발전을 거듭한 아시아 피겨는 2006년 토리노 올림픽 여자 싱글에서 일본 아라카와 시즈카가 금메달을 딴 것을 시작으로 2010밴쿠버 올림픽 김연아의 여자 싱글 금메달, 2010년 밴쿠버 올림픽 페어부문 쉔슈에-자오홍보의 금메달, 2014년 남자 싱글에서 일본 하뉴 유즈류의 금메달등 한중일 모두 올림픽 금메달을 딸 정도로 성장했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아시안게임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은 물론 4대륙 선수권이나 각국 내셔널 챔피언십보다 권위가 떨어지는게 사실이지만, 그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계아시안게임은 아시아 피겨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등용문 역할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중국 쉔슈에-자오홍보,아시안게임 4연속 금메달에서 올림픽 금메달까지

중국 페어의 상징 쉔 슈에-자오 홍보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페어팀 쉔슈에-자오홍보는 96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99년과 2003년 2007년 까지 모두 4번이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고, 결과는 4번 모두 금메달이었다.

전설적인 코치 야오 빈의 지도아래 숱한 명작을 만들어낸 중국 페어 1세대의 간판인 쉔-자오팀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특히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인 '투란도트'는 2003년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만든 음악일 뿐더러,쉔-자오의 연기중 아직도 회자되는 명작인데,2003년 아시안게임에서도 그들의 투란도트는 큰 울림을 주는 연기였다.

이들은 2007년이후 은퇴, 결혼, 복귀의 과정을 거친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마지막 무대를 올림픽 금메달로 장식하며, 선수로서 최고의 결말을 완성했다.

일본 아라카와 시즈카,아시안게임 은-금에서 올림픽 금메달로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아라카와 시즈카
10대 시절 일본 피겨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천재 소녀 아라카와 시즈카, 그녀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1999년 첫 번째 출전했던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그녀는 4년뒤 2003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는데, 이것이 그녀의 피겨 인생에서 재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2002년 올림픽 출전을 놓친뒤 시름에 잠겨있던 아라카와는 2003년 아시안게임 우승이후 달라지기 시작했고,2004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또다시 슬럼프에 빠졌지만,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일본의 영웅이 됐다.

그랑프리 파이널은 물론이고,그랑프리 시리즈 우승도 없는 그녀지만,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낸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중국 첸 루, 루루의 눈물

중국 여자 싱글의 상징과도 같은 여인 첸 루. 영미권에선 루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10년 연속 중국선수권 챔피언이자, 2005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이다.1996년 아시안게임에선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96년 세계선수권에선 특유의 예술적인 연기로 예술점에서 6.0 만점을 받는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도 은메달에 그치자,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선 프리스케이팅 마지막 점프에서 예상하지 않은 3회전-3회전 점프를 성공시키면서 연기를 끝냈고, 연기이후 감정이 복받친듯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많은 이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당시 미국 방송은 '웰컴백 루루'라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결국 첸루는 94년-98년 2회 연속 올림픽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국 장민,시대를 잘못만난 4회전 점퍼

중국 소림 피겨의 시작 장민
중국의 장민은 아시안게임을 물론,주요 대회 금메달 기록이 전혀 없지만 피겨 역사에 이름을 남긴 특이한 선수이다.

18살이던 94년 릴레함메르 대회에 첫 출전했는데, 당시 국제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전혀 없었던 그는 쇼트에서 당시로는 드문 트리플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시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프리에선 무려 4회전 토룹을 성공시켰는데, 올림픽에서 4회전 점프를 성공시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9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선 쇼트프로그램에서 4회전 토룹을 성공해,쇼트프로그램 사상 최초의 4회전 기록도 장민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선수였다. 지금처럼 기술점을 따로 채점했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6.0만점으로 채점하던 시기, 장민은 4회전 기록만을 남긴채 실력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아시안게임 성적은 96년 은메달과 2003년 동메달을 기록했다.

중국 천하속 북한의 페어스케이팅 금메달

아시안게임은 여자싱글은 일본이 금메달 4개로 가장 많지만 남자 싱글과 페어, 아이스댄스에서 중국이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1회 대회 페어는 북한의 남혜영-김혁 팀이 금메달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가 페어에서 단 한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한 것은 감안하면 북한의 페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는 셈이다.

카자흐스탄의 데니스 텐이 지난 2011년 대회 남자 싱글 금메달을 따낸뒤, 3년뒤 소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경력도 있다.우리나라는 아이스댄스 양태화-이천군,여자 싱글의 곽민정이 따낸 동메달 2개 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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