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나는 사민주의자다”…마틴 슐츠의 승부수

입력 2017.02.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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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총리는 오는 9월 치러질 독일 총선에서 4선 연임에 성공할 것인가"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 독일 사회의 관심은 온통 이 질문에 집중돼있다. 그동안 '독일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메르켈의 승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최근 들어 선거 전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바로 독일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 (SPD) 소속의 총리 후보, 마틴 슐츠의 출현 때문이다.

호감 가는 외모, 직설적인 화법 그리고 고교 중퇴라는 컴플렉스를 딛고 유럽의 중요 정치인으로 우뚝 선 인생사. 이런 인간적 매력을 바탕으로 마틴 슐츠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꼽힐 정도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 17일 독일 공영방송 ZDF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슐츠는 지지율에서 메르켈을 11%포인트 차이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년간 유럽의회 의장을 지내는 등 유럽의회에서 주로 활동해 독일 정계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지닌 것도 강점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메르켈 피로증'도 거들었다. 벌써 12년째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메르켈에게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도 최근 인상적인 표지에 인상적인 그림을 게재했다. 한없이 작아진 메르켈 동상을, 슐츠가 손가락으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의 내용이다.

독일 슈피겔 지 표지독일 슈피겔 지 표지

이렇게 총리 당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 슐츠가 논쟁적인 승부수를 띄웠다. 한국에는 '하르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겐다 2010' 프로젝트를 과감히 손질하겠다는 것이다.

슐츠의 제안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돼 온 정책 방향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실업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더 오래 주고, 노동자의 은퇴 연금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 독일 특유의 기업 노사 공동결정제도와 관련해선 노동자 참여 권한도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유치원부터 무상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슈뢰더 총리 시절부터 이어져 온 '복지 축소'의 정책 방향을 다시 '복지 증대'의 방향으로 유턴하겠다는 것이다. 슐츠의 총선 구호인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른바 '좌클릭' 정책들을 선언한 것이다.

마틴 슐츠의 기자회견 모습마틴 슐츠의 기자회견 모습

당장 반발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독일 주요 일간지에는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렸다. 독일의 한 사회단체가 실은 광고였다. "독일은 유럽의 병자였다. '아겐다 2010' 덕택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슐츠 당신은 정말 독일을 과거로 되돌리려 하는가?"

일부 언론도 비평에 가세했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더 많이 주는 것이 사회 정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반문이었다. '아겐다 2010'이 침체에 빠진 독일 경제를 다시 일으켰는데, 슐츠의 정책은 지금까지의 성공을 위협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독일 기업자 연맹(BDA) 역시 90년대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냐는 내용의 논평을 내놨다.

슐츠가 이런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슐츠의 대답은 단호했다. "독일은 과오를 저질렀다.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오를 알아차렸을 때,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슐츠의 '좌클릭' 노선 전환은 유럽 정치 지형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충격 속에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당 소속의 올랑드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로 재선 도전을 포기했고, 이탈리아 중도 좌파의 렌치 총리도 개헌 국민투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유럽 주요 좌파 정당들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슐츠만이 선명한 '좌향좌'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우경화 바람의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슐츠는 이미 트럼프를 전 세계의 골칫거리라고 비난하고,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트럼프의 정책들 역시 “터무니없고 위험하다”고 맹비판한 바 있다.

중도 우파 성향의 기독사회당(CSU)의 호르스트 제호퍼 기사당 당수는, 슐츠를 이렇게 평했다. "슐츠는 골수 사회당원, 골수 사회민주주의자이다, 그래서 많은 사민당원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계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소신으로 선거에 맞서겠다는 '골수 사회민주주의자' 슐츠의 정책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될까. 그리고 독일 국민들의 선택은, 훗날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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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나는 사민주의자다”…마틴 슐츠의 승부수
    • 입력 2017-02-23 13:50:44
    특파원 리포트
"메르켈 총리는 오는 9월 치러질 독일 총선에서 4선 연임에 성공할 것인가"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 독일 사회의 관심은 온통 이 질문에 집중돼있다. 그동안 '독일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메르켈의 승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최근 들어 선거 전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바로 독일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 (SPD) 소속의 총리 후보, 마틴 슐츠의 출현 때문이다.

호감 가는 외모, 직설적인 화법 그리고 고교 중퇴라는 컴플렉스를 딛고 유럽의 중요 정치인으로 우뚝 선 인생사. 이런 인간적 매력을 바탕으로 마틴 슐츠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꼽힐 정도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 17일 독일 공영방송 ZDF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슐츠는 지지율에서 메르켈을 11%포인트 차이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년간 유럽의회 의장을 지내는 등 유럽의회에서 주로 활동해 독일 정계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지닌 것도 강점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메르켈 피로증'도 거들었다. 벌써 12년째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메르켈에게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도 최근 인상적인 표지에 인상적인 그림을 게재했다. 한없이 작아진 메르켈 동상을, 슐츠가 손가락으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의 내용이다.

독일 슈피겔 지 표지
이렇게 총리 당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 슐츠가 논쟁적인 승부수를 띄웠다. 한국에는 '하르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겐다 2010' 프로젝트를 과감히 손질하겠다는 것이다.

슐츠의 제안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돼 온 정책 방향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실업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더 오래 주고, 노동자의 은퇴 연금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 독일 특유의 기업 노사 공동결정제도와 관련해선 노동자 참여 권한도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유치원부터 무상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슈뢰더 총리 시절부터 이어져 온 '복지 축소'의 정책 방향을 다시 '복지 증대'의 방향으로 유턴하겠다는 것이다. 슐츠의 총선 구호인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른바 '좌클릭' 정책들을 선언한 것이다.

마틴 슐츠의 기자회견 모습
당장 반발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독일 주요 일간지에는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렸다. 독일의 한 사회단체가 실은 광고였다. "독일은 유럽의 병자였다. '아겐다 2010' 덕택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슐츠 당신은 정말 독일을 과거로 되돌리려 하는가?"

일부 언론도 비평에 가세했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더 많이 주는 것이 사회 정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반문이었다. '아겐다 2010'이 침체에 빠진 독일 경제를 다시 일으켰는데, 슐츠의 정책은 지금까지의 성공을 위협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독일 기업자 연맹(BDA) 역시 90년대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냐는 내용의 논평을 내놨다.

슐츠가 이런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슐츠의 대답은 단호했다. "독일은 과오를 저질렀다.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오를 알아차렸을 때,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슐츠의 '좌클릭' 노선 전환은 유럽 정치 지형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충격 속에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당 소속의 올랑드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로 재선 도전을 포기했고, 이탈리아 중도 좌파의 렌치 총리도 개헌 국민투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유럽 주요 좌파 정당들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슐츠만이 선명한 '좌향좌'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우경화 바람의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슐츠는 이미 트럼프를 전 세계의 골칫거리라고 비난하고,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트럼프의 정책들 역시 “터무니없고 위험하다”고 맹비판한 바 있다.

중도 우파 성향의 기독사회당(CSU)의 호르스트 제호퍼 기사당 당수는, 슐츠를 이렇게 평했다. "슐츠는 골수 사회당원, 골수 사회민주주의자이다, 그래서 많은 사민당원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계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소신으로 선거에 맞서겠다는 '골수 사회민주주의자' 슐츠의 정책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될까. 그리고 독일 국민들의 선택은, 훗날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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