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김정남 사건…러시아의 “그냥 건너뛰기”

입력 2017.02.23 (17:42) 수정 2017.02.23 (17:4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지 10일이 됐는데도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다. 22일 오전 러시아 외무부의 정례 외신기자 브리핑 시간. 마침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 북한 외교관이 연루돼 있다고 발표한 직후여서 외신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김정남 사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묻는 한국, 일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이런 질문을 러시아에 하는 것에 대해 놀랍다. 이번 사건에 대한 질문은 관련국들에 해야 한다고 믿는다. 수사 상황 등 이번 이슈는 말레이시아 당국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번 일에 연관이 없다."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앞서 지난 15일, 김정남 피살 사건이 처음 보도된 그 이튿날 정례 브리핑에서 자하로바 대변인은 좀 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김정남 피살 사건에 대해 질문한 일본 기자에 대해 자하로바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고 확인했나? 북한 측에서 확인을 받았나? 도쿄에서 확인받았나?”

(일본 기자) “잘 모르겠다.”

“웃긴다. 당신은 북한 측 입장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일본 언론으로서 당신은 일본 측 입장을 들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물어보라.”


러시아 정부로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별로 할 얘기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는 뉘앙스가 확연히 느껴진다.

2월 17일에 열린 ‘북한과 동북아 안보’ 관련 토론회2월 17일에 열린 ‘북한과 동북아 안보’ 관련 토론회

지난 17일 모스크바에서 '북한 요소와 동북아의 다른 안보 위협'이란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는 북한 측 입장에서 이 사건을 해석하려는 듯한 발언이 이어졌다.

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아시아전략연구소장은, 북한이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려고 하는 마당에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톨로라야 소장은 "이번 사건으로 누가 이득을 얻겠는가? 무엇보다 한국의 보수세력이다. 그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이 테러집단이라고 믿도록 유도할 것이다. 벌써 미국의 한 상원의원은, 북한 공작원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기다리지도 않고,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아시아전략연구소장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아시아전략연구소장

톨로라야 소장은 "북한으로서는 이번 사건은 지도자 생일에 선물이 아니라 두통거리다. 나는 북한이 이번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배후가 북한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최근 남한 인사가 김정남과 접촉해 (북한 정권 붕괴에 대비한) 망명 정부를 세울 의도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만일 이 같은 정보를 포착한 북한이 사전에 김정남을 제거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알렉산드르 보론쵸프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교수도, 김정은에게는 김정남을 암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보론쵸프 교수는 "김정일 위원장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 문제가 최종적이고 변경할 수 없게 정리되었다. 김정일은 정신이 온전할 때 후계자를 스스로 임명했다. 김정남의 실질적인 위협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냥 건너뛰기”

 말레이시아 경찰의 ‘김정남 암살 사건’ 관련 기자회견 말레이시아 경찰의 ‘김정남 암살 사건’ 관련 기자회견

러시아가 이번 사건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은, 김정남 암살 사건이 내포한 폭발력 때문에 향후 한반도 상황에 적지 않은 후폭풍을 몰고 오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지 소식통은 이를 러시아 특유의 "그냥 건너뛰기, 모른 체하기"(Russia will just skip this event)라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갖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도 집권층이 외국에 나가 있는 정적들을 독극물로 제거한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북한 내부의 일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식통은, 크렘린 인사들도 북한 정권이 김정남을 죽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는 김정남 암살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서 상황이 더욱 악화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든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 재지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 전경러시아 외무부 전경

러시아와 중국은,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해, 한반도에 사드 배치 미국의 전략자산 증강 배치 등 군사적 갈등 상황이 고조되는 것에 반대해 왔다. 대신 6자회담 재개 등 대화와 외교적 방법의 해결을 주장해 왔다.

중국이 최근 북한산 석탄 수입금지 조처를 한 것은, 미국이 중국에 줄곧 요구해 온 대북 제재 강화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대신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러시아가 겉으로는 김정남 암살 사건에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내심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은근히 든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김정남 사건…러시아의 “그냥 건너뛰기”
    • 입력 2017-02-23 17:42:44
    • 수정2017-02-23 17:46:33
    특파원 리포트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지 10일이 됐는데도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다. 22일 오전 러시아 외무부의 정례 외신기자 브리핑 시간. 마침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 북한 외교관이 연루돼 있다고 발표한 직후여서 외신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김정남 사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묻는 한국, 일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이런 질문을 러시아에 하는 것에 대해 놀랍다. 이번 사건에 대한 질문은 관련국들에 해야 한다고 믿는다. 수사 상황 등 이번 이슈는 말레이시아 당국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번 일에 연관이 없다."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앞서 지난 15일, 김정남 피살 사건이 처음 보도된 그 이튿날 정례 브리핑에서 자하로바 대변인은 좀 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김정남 피살 사건에 대해 질문한 일본 기자에 대해 자하로바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고 확인했나? 북한 측에서 확인을 받았나? 도쿄에서 확인받았나?” (일본 기자) “잘 모르겠다.” “웃긴다. 당신은 북한 측 입장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일본 언론으로서 당신은 일본 측 입장을 들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물어보라.” 러시아 정부로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별로 할 얘기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는 뉘앙스가 확연히 느껴진다. 2월 17일에 열린 ‘북한과 동북아 안보’ 관련 토론회 지난 17일 모스크바에서 '북한 요소와 동북아의 다른 안보 위협'이란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는 북한 측 입장에서 이 사건을 해석하려는 듯한 발언이 이어졌다. 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아시아전략연구소장은, 북한이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려고 하는 마당에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톨로라야 소장은 "이번 사건으로 누가 이득을 얻겠는가? 무엇보다 한국의 보수세력이다. 그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이 테러집단이라고 믿도록 유도할 것이다. 벌써 미국의 한 상원의원은, 북한 공작원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기다리지도 않고,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게오르기 톨로라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아시아전략연구소장 톨로라야 소장은 "북한으로서는 이번 사건은 지도자 생일에 선물이 아니라 두통거리다. 나는 북한이 이번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배후가 북한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최근 남한 인사가 김정남과 접촉해 (북한 정권 붕괴에 대비한) 망명 정부를 세울 의도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만일 이 같은 정보를 포착한 북한이 사전에 김정남을 제거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알렉산드르 보론쵸프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교수도, 김정은에게는 김정남을 암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보론쵸프 교수는 "김정일 위원장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 문제가 최종적이고 변경할 수 없게 정리되었다. 김정일은 정신이 온전할 때 후계자를 스스로 임명했다. 김정남의 실질적인 위협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냥 건너뛰기”  말레이시아 경찰의 ‘김정남 암살 사건’ 관련 기자회견 러시아가 이번 사건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은, 김정남 암살 사건이 내포한 폭발력 때문에 향후 한반도 상황에 적지 않은 후폭풍을 몰고 오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지 소식통은 이를 러시아 특유의 "그냥 건너뛰기, 모른 체하기"(Russia will just skip this event)라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갖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도 집권층이 외국에 나가 있는 정적들을 독극물로 제거한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북한 내부의 일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식통은, 크렘린 인사들도 북한 정권이 김정남을 죽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는 김정남 암살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서 상황이 더욱 악화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든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 재지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 전경 러시아와 중국은,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해, 한반도에 사드 배치 미국의 전략자산 증강 배치 등 군사적 갈등 상황이 고조되는 것에 반대해 왔다. 대신 6자회담 재개 등 대화와 외교적 방법의 해결을 주장해 왔다. 중국이 최근 북한산 석탄 수입금지 조처를 한 것은, 미국이 중국에 줄곧 요구해 온 대북 제재 강화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대신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러시아가 겉으로는 김정남 암살 사건에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내심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은근히 든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