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애 가문’을 아시나요?…3·1 운동의 숨은 주역들

입력 2017.02.28 (14:39) 수정 2017.03.0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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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일제 강점기,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강한 열망을 표출했던 3ㆍ1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문' 낭독과 학생,시민들의 만세 시위로 시작됐다는 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3ㆍ1운동의 성공 배경에 한 가문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KBS 3ㆍ1절 특집 다큐멘터리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은 3ㆍ1운동의 주역이지만 베일에 가려져있던 '김순애 가문'을 집중 조명했다.

'김순애 가문'은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약을 펼친 대지주 출신의 명문가였다.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고,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ㆍ8 독립선언과 3ㆍ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에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김순애 가문 사람들이다.

3·1운동의 도화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들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이 즈음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국내외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호재로 생각해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보내려 했다. 이때 중국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한인 청년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은 당 대표이자 민족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순애의 남편이다. 김규식은 프랑스와 미국 및 유럽 각국에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소식이 국내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 유학생을 중심으로 '2ㆍ8 독립선언대회'가 열렸다. 이때 김순애의 조카인 김마리아는 조선 여자유학생친목회장으로 '독립선언'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석방된 김마리아는 2ㆍ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밀입국해 독립 시위의 필요성을 전파했다.

남편 김규식을 파리로 떠나보낸 김순애는 국내에서 만세 시위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김순애는 대구에서 김마리아를, 광주에서 동생 김필례 부부를 만나 3ㆍ1운동을 촉구하는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

김순애·김마리아·김필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3ㆍ1운동 후 김순애는 상해에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김순애가 주도한 애국부인회는 독립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뒷바라지했다. 또한 해외 각지에 한국 지도와 태극기 등을 보급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김순애의 조카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서울 지부 회장이 되어 긴밀히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마리아는 모집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김순애의 여동생인 김필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국비 유학생으로 알려졌다. 김필례는 1922년 한국 YWCA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애국계몽 운동과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해 폐교됐던 광주수피아여학교와 정신 여학교를 다시 열었다. 김필례 교장은 평생 민족교육과 여성 교육에 헌신하며 생을 보냈다.

김순애 가문의 ‘최초’ 기록들


김순애의 오빠인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 중 한 명이다. 김필순은 동생인 김순애와 김필례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가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가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필순은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망명을 선택했다. 중국 헤이룽장 성의 치치하얼에서 '북제 진료소'라는 병원을 열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이상촌을 건설해 독립 운동에 헌신하던 김필순은 일본인 첩자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로 불린 김염은 김필순의 아들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불린다. 2004년 홍콩 영화상에서 중국영화사상 30번째 위대한 영화로 선정된 항일 영화 '대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염은 아버지 김필순의 뜻을 이어받아 상업 영화 출연을 거부하고 항일 영화에 출연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명문가

김순애 가문은 몸의 병을 고치는 의사, 마음의 병을 고치는 목회자, 무지를 깨우치는 교육자를 다수 배출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김순애 가문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에 헌신한 공로로 여섯 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제작진은 "특히 대지주 가문의 후손들이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3·1 운동의 숨은 공신 '김순애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KBS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은 3월 1일 (수) 오후 7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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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7-03-02 10: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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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일제 강점기,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강한 열망을 표출했던 3ㆍ1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문' 낭독과 학생,시민들의 만세 시위로 시작됐다는 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3ㆍ1운동의 성공 배경에 한 가문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KBS 3ㆍ1절 특집 다큐멘터리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은 3ㆍ1운동의 주역이지만 베일에 가려져있던 '김순애 가문'을 집중 조명했다.

'김순애 가문'은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약을 펼친 대지주 출신의 명문가였다.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고,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ㆍ8 독립선언과 3ㆍ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에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김순애 가문 사람들이다.

3·1운동의 도화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들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이 즈음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국내외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호재로 생각해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보내려 했다. 이때 중국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한인 청년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은 당 대표이자 민족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순애의 남편이다. 김규식은 프랑스와 미국 및 유럽 각국에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소식이 국내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 유학생을 중심으로 '2ㆍ8 독립선언대회'가 열렸다. 이때 김순애의 조카인 김마리아는 조선 여자유학생친목회장으로 '독립선언'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석방된 김마리아는 2ㆍ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밀입국해 독립 시위의 필요성을 전파했다.

남편 김규식을 파리로 떠나보낸 김순애는 국내에서 만세 시위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김순애는 대구에서 김마리아를, 광주에서 동생 김필례 부부를 만나 3ㆍ1운동을 촉구하는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

김순애·김마리아·김필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3ㆍ1운동 후 김순애는 상해에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김순애가 주도한 애국부인회는 독립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뒷바라지했다. 또한 해외 각지에 한국 지도와 태극기 등을 보급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김순애의 조카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서울 지부 회장이 되어 긴밀히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마리아는 모집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김순애의 여동생인 김필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국비 유학생으로 알려졌다. 김필례는 1922년 한국 YWCA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애국계몽 운동과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해 폐교됐던 광주수피아여학교와 정신 여학교를 다시 열었다. 김필례 교장은 평생 민족교육과 여성 교육에 헌신하며 생을 보냈다.

김순애 가문의 ‘최초’ 기록들


김순애의 오빠인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 중 한 명이다. 김필순은 동생인 김순애와 김필례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가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가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필순은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망명을 선택했다. 중국 헤이룽장 성의 치치하얼에서 '북제 진료소'라는 병원을 열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이상촌을 건설해 독립 운동에 헌신하던 김필순은 일본인 첩자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로 불린 김염은 김필순의 아들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불린다. 2004년 홍콩 영화상에서 중국영화사상 30번째 위대한 영화로 선정된 항일 영화 '대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염은 아버지 김필순의 뜻을 이어받아 상업 영화 출연을 거부하고 항일 영화에 출연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명문가

김순애 가문은 몸의 병을 고치는 의사, 마음의 병을 고치는 목회자, 무지를 깨우치는 교육자를 다수 배출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김순애 가문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에 헌신한 공로로 여섯 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제작진은 "특히 대지주 가문의 후손들이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3·1 운동의 숨은 공신 '김순애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KBS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은 3월 1일 (수) 오후 7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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