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여왕’에서 ‘불명예 퇴진’까지…되돌아본 박 대통령 정치인생 19년

입력 2017.03.10 (11:22) 수정 2017.03.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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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오늘(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인용을 결정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19년 정치인생도 막을 내리게 됐다.

'선거의 여왕’이란 찬사를 받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그리고 오늘 탄핵 인용으로 불명예 퇴진까지 박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되짚어 봤다.

IMF 위기에 정치 입문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숨지면서 어머니 대신 만 22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지만, 역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역시 총탄에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도 세간에서 사라졌다.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세상 속으로 다시 등장하며 정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제가 나서서 국민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다시 한 번 한국 경제의 도약에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대중 앞에 나섰다.

‘선거의 여왕’으로 승승장구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에 당선된 박 전 대통령은 2001년엔 이회창 총재에 반발 당 개혁을 요구하다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등 자신의 확고한 정치 신념을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정치인 박근혜를 각인시켰다.

이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온 박 전 대통령은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낸다.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가결 시킨 한나라당은 국민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당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다. 같은 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은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며 정치인으로서 한 계단 더 올라섰다.

서울 여의도공원에 컨테이너와 천막 등으로 ‘천막당사’를 설치한 후, 그곳에서 당 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났고 이러한 기류를 타고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의 당내 입지 역시 더욱 단단해졌다.

특히 2006년 5월 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 중 지충호 씨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찔려 안면에 자상을 입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얻고 대권 주자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승승장구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시련도 닥친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박 전 대통령은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와 함께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계가 대거 공천에서 배제당하는 이른바 ‘공천 학살’을 겪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친박들에 보내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한테 거세게 맞섰다.

친박연대는 ‘박근혜 마케팅’을 통해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또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뢰’를 강조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반대 토론자로 나서 발언을 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 결국 친박들은 야당과 연대해 수정안을 국회에서 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의 당시 선택에 대해 이명박 정부 관계자들은 반발했지만, 국민들에게는 박 전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인식돼 대권후보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원동력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의혹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구원투수로 재차 등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의 이름과 로고 등을 모두 바꾸는 개혁을 추진했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19대 총선에서 야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을 차지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서 불명예 퇴진까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곧은 이미지와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고, 같은 해 12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 아버지 서거 이후 39년 만에 화려하게 청와대에 재입성한 것이다.

취임 이후에도 30%대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창조경제, 대북 압박정책, 노동개혁, 국정 역사교과서 등 박근혜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독선과 불통이라는 비판이 임기 내내 국정 수행의 발목을 잡았고 급기야 집권 4년 차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한 자리 숫자까지 급락한다.

이후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국민들이 늘어나면서 국회는 지난 12월 박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리고 오늘 박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자신의 19년 정치 인생을 씁쓸하게 마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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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거의 여왕’에서 ‘불명예 퇴진’까지…되돌아본 박 대통령 정치인생 19년
    • 입력 2017-03-10 11:22:57
    • 수정2017-03-10 19:01:13
    취재K
헌법재판소가 오늘(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인용을 결정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19년 정치인생도 막을 내리게 됐다.

'선거의 여왕’이란 찬사를 받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그리고 오늘 탄핵 인용으로 불명예 퇴진까지 박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되짚어 봤다.

IMF 위기에 정치 입문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숨지면서 어머니 대신 만 22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지만, 역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역시 총탄에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도 세간에서 사라졌다.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세상 속으로 다시 등장하며 정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제가 나서서 국민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다시 한 번 한국 경제의 도약에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대중 앞에 나섰다.

‘선거의 여왕’으로 승승장구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에 당선된 박 전 대통령은 2001년엔 이회창 총재에 반발 당 개혁을 요구하다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등 자신의 확고한 정치 신념을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정치인 박근혜를 각인시켰다.

이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온 박 전 대통령은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낸다.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가결 시킨 한나라당은 국민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당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다. 같은 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은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며 정치인으로서 한 계단 더 올라섰다.

서울 여의도공원에 컨테이너와 천막 등으로 ‘천막당사’를 설치한 후, 그곳에서 당 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났고 이러한 기류를 타고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의 당내 입지 역시 더욱 단단해졌다.

특히 2006년 5월 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 중 지충호 씨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찔려 안면에 자상을 입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얻고 대권 주자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승승장구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시련도 닥친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박 전 대통령은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와 함께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계가 대거 공천에서 배제당하는 이른바 ‘공천 학살’을 겪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친박들에 보내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한테 거세게 맞섰다.

친박연대는 ‘박근혜 마케팅’을 통해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또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뢰’를 강조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반대 토론자로 나서 발언을 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 결국 친박들은 야당과 연대해 수정안을 국회에서 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의 당시 선택에 대해 이명박 정부 관계자들은 반발했지만, 국민들에게는 박 전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인식돼 대권후보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원동력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의혹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구원투수로 재차 등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의 이름과 로고 등을 모두 바꾸는 개혁을 추진했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19대 총선에서 야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을 차지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서 불명예 퇴진까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곧은 이미지와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고, 같은 해 12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 아버지 서거 이후 39년 만에 화려하게 청와대에 재입성한 것이다.

취임 이후에도 30%대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창조경제, 대북 압박정책, 노동개혁, 국정 역사교과서 등 박근혜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독선과 불통이라는 비판이 임기 내내 국정 수행의 발목을 잡았고 급기야 집권 4년 차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한 자리 숫자까지 급락한다.

이후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국민들이 늘어나면서 국회는 지난 12월 박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리고 오늘 박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자신의 19년 정치 인생을 씁쓸하게 마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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