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힐러리 딸, 엄마 이어 정계 진출?

입력 2017.03.17 (08:54) 수정 2017.03.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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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의 딸이자, 이제는 힐러리 클린턴의 딸로 더 유명해지고 있는 첼시 클린턴. 대통령의 딸이자 대선 패배자의 딸이기도 한 첼시가 책을 출판한다. 책 출판 날짜가 5월 30일로 아직 두 달도 더 남았는데, 미국 언론들이 앞다투어 책 출간 소식을 다루고 있다. 아마존에서 벌써 구매 사전 예약을 받고 있을 정도다.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제목은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다. 영어 persist란 단어가 번역이 좀 까다로운데, 뭘 고집스럽게 또는 집요하게 계속하는 걸 뜻한다. 한국에서 ‘고집스럽다’, ‘집요하다’는 말이 가진 부정적 감정은 담겨있지 않다. 그보다는 ‘끈기가 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의미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는 영어적 감성이 집요한 걸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지,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집요하다’나 ‘고집스럽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세계를 바꾼 13명의 미국 여성들’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32쪽짜리 그림책이다.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했으니, 어렵고 난해한 내용일 리 없는, 간단한 책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출판 자체가 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책 표지‘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책 표지

첼시 클린턴의 ‘매우 정치적인’ 아동용 책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는 이 책 제목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지난 2월 당시 트럼프 정부의 법무장관 후보 제프 세션스 의원에 대한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반대 연설을 하던 중 지난 1986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망인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가 쓴 서한을 읽는다.

서한은 세션스 장관이 지난 1986년 연방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 킹 여사가 그를 반대하며 쓴 것으로 “세션스가 고령의 흑인 유권자들을 겁에 질리게 하려고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다. 그의 임명은 미 사법체계에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워런 상원의원이 의회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읽어내려가자, 공화당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가 동료 의원에 대한 비판 발언 금지 조항을 어겼다며 크게 반발했고, 워런 의원은 결국 상원의원들의 표결을 통해, 세션스 의원 인준과 관련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받게 됐다. 맥코넬 의원이 이같은 이례적인 조치에 대해, “워런에게 경고도 했고 설명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sisted)"라고 말했던 것이다.

워런 의원은 정말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회의장을 나와 옆방에서, 회의장에서 끝내지 못한 킹 여사 서한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이를 페이스북를 통해 생중계했다.

그런가 하면 버니 샌더스(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했던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 등 2명의 남성 민주당 의원들이 발언 금지 조치에 항의하며 세션스 의원 인준 표결에 앞서 회의장에서, 워런 의원이 읽지 못한 서한 내용을 마저 읽었다. 이들은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페이스북 생중계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런 상황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 특히 여성들이 워런 의원에게 지지를 보냈고,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라는 해시태그가 SNS에 앞다투어 올라왔다.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워런 의원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불의에 저항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말로 떠오른 것이다. 바로 그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됐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이처럼 여성을 지칭하는 ‘나쁜’ 말을 저항성의 상징적 유행어로 바꾼 역사라면, 워런 의원이 한 게 또 있다. 바로 지난 대선 때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감정적 발언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지지 구호로 변모시킨 ‘못된 여성(nasty woman)'이란 말이다.

지난해 10월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사회보장정책에 답변하던 도중 당시 트럼프 후보가 끼어들면서 내뱉은 한 마디, “이런 못된 여성 같으니(such a nasty woman)"는 논란을 낳았다. 부적절한 타이밍은 물론 여성에 대한 감정적 비하 발언으로 많은 여성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워런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갔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 "바로 그 못된 여자들(nasty women)은 강하고 똑똑하다, 그 못된(nasty) 여자들이 못된(nasty) 발로 투표장에서 가서 못된(nasty) 한 표를 던져 트럼프를 몰아낼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를 계기로 SNS에서 많은 여성, 스타들까지 나서 ‘나는 못된 여성이다.(I am a nasty woman)’란 해시태그를 달며 힐러리 클린턴을 지원하고 나섰다. ‘내가 바로 그 못된 여성이다’, ‘못된 여성이 그런 의미라면 기꺼이 못된 여성이 되겠다’는 말이 여성들 사이에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못된 여성(nasty woman)은, 정당한 행동을 하고도 남자들로부터 부당한 비판을 받는 여성들을 상징하는 단어이자, 클린턴 후보의 선거 구호가 된 것이다.

바로 그 워런 의원, 한때는 진보적 성향이 명확하지 않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대체할 후보로 부상했었지만, 결국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꿈’을 지지하며 클린턴의 열렬한 지원자가 되었던 워런 의원이 의회에서 핍박당하면서 유행어가 된 한 마디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를 첼시 클린턴이 책 제목으로 따온 건 그래서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여성의 저항성은 물론 현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저항, 또 어쩌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꿈을 안고,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을 받던 남성 후보에 맞섰던’ 자신의 어머니, 힐러리 클린턴까지 묘하게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13명의 여성 위인 외 1명의 카메오는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 이 책에 나오는 13명의 여성 위인은 다음과 같다.

미국 흑인 여성운동가의 원조인 헤리엇 터브만(흑인), 장애 극복의 상징 헬렌 켈러, 미국 원주민 출신의 세계적 발레리나 마리아 탈치프(미 대륙 원주민), 흑백 분리 교육 정책에 저항했던 루비 브릿지스(흑인), 상하원 의원을 모두 지낸 첫 여성 정치인으로 공화당임에도 매카시즘 반대 양심선언을 했던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히스패닉계 최초의 연방대법관 소냐 소토파이어, 의류노동자 파업을 선도했던 노동운동가 클라라 름리치, 도전적 저널리스트 넬리 블라이,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샐리 라이드와 여성운동가 클로뎃 콜빈(흑인), 육상선수 그리피스 조이너(흑인), 유명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흑인) 등이 등장한다.

흑인 5명, 히스패닉계 1명, 원주민 1명 등 유색인종이 7명으로, 백인보다 더 많다. 책에 나오는 위인들의 구성만 봐도 첼시 클린턴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여성과 장애인, 유색인종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를 향해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13명 외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명의 카메오가 더 나온다고 했다. 한 명의 카메오는 누굴까? 미국 언론들은 그 카메오가 힐러리 클린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힐러리와 첼시 클린턴 모녀힐러리와 첼시 클린턴 모녀

첼시, 엄마가 못 이룬 꿈 도전?

첼시 클린턴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조용히 하란 말을 들어온 사람들,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앉아있으란 말을 들어온 사람들, 가치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작은 사람들로 취급돼온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말이다.

첼시 클린턴은 이처럼 여성과 소수자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특히 여성 문제에서라면 정파성을 가리지 않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 백악관 선임고문인 캘러앤 콘웨이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소파에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 앉아있는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콘웨이가 대통령 집무실을 경시했단 비판을 쏟아냈고, ‘1990년대 집무실에서 있었던 자세와 비슷하다’(이 발언은 빌 클린턴 때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연상시킨 것으로 인식)는 등 원색적인 비난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첼시는 트위터에 ‘그같은 발언은 비열하다며 콘웨이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콘웨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슬림 입국 금지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무슬림과의 연대 시위에 2살 난 딸 샬롯과 함께 참석한 뒤 ‘샬롯의 첫 시위 참여’라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미국 정가에서는 엄마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한 지난해부터 이미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 가능성이 흘러나왔다. 스탠퍼드, 컬럼비아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NBC 기자를 지내기도 했고, 현재는 건강, 교육, 국제 구호, 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에 한 해 3천억여 원을 지원하는 클린턴 재단에서 뒤로 물러난 부모를 대신해 부회장으로 전면에 나서있다.

정치 가문 자제들의 정계 진출에 대해 기득권을 활용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적 환경에서 자라 정치적으로 더 잘 훈련돼 있을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는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에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뻔한 여성을 부모로 두고 있는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지경이다.

케네디 가문, 부시 가문, 쿠오모 가문 등 대를 이어 정계에 진출하는 유명 가문이 흔하다. 게다가 힐러리 클린턴이 투표수에서는 이기고도 미국의 주별 선거인단 확보 제도로 대선에서 석패한 아쉬움으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해져 있다.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첼시 클린턴이 그 부분을 매개로 정계 진출에 더 강력한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당장 내년 중간선거에서 부모인 클린턴 부부가 사는 뉴욕주의 17선거구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이 지역구의 니타 로웨이는 79살의 고령이어서 은퇴 가능성이 있다. 또 2020년에는 커스틴 질리브랜드 의원의 뒤를 이어 뉴욕주 상원의원에 곧바로 출마할 거란 예상까지 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측근들은, 클린턴이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곧바로 첼시가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부모의 배경이 있어도 첼시 클린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모멘텀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에다 대선후보를 지낸, 정치 베테랑 가문의 딸이다. 정말 정계 진출의 꿈을, 정말로 엄마의 꿈을 대신 이룰 야망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본인이 정계 진출의 시기를 선택할 것이다.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대가 비등해,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내년 중간 선거에서의 설욕을 벼르는 것은 물론, 일부에서 트럼프 대통령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당장 내년 중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민주당이 현재도 고민하는 문제다.

조기 등판인가, 아니면 좀 더 명분을 축적한 뒤로 미룰 것인가.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 여부와 시기에 대해서 벌써 클린턴 가문이 깊게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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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힐러리 딸, 엄마 이어 정계 진출?
    • 입력 2017-03-17 08:54:26
    • 수정2017-03-17 11:41:06
    특파원 리포트
빌 클린턴의 딸이자, 이제는 힐러리 클린턴의 딸로 더 유명해지고 있는 첼시 클린턴. 대통령의 딸이자 대선 패배자의 딸이기도 한 첼시가 책을 출판한다. 책 출판 날짜가 5월 30일로 아직 두 달도 더 남았는데, 미국 언론들이 앞다투어 책 출간 소식을 다루고 있다. 아마존에서 벌써 구매 사전 예약을 받고 있을 정도다.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제목은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다. 영어 persist란 단어가 번역이 좀 까다로운데, 뭘 고집스럽게 또는 집요하게 계속하는 걸 뜻한다. 한국에서 ‘고집스럽다’, ‘집요하다’는 말이 가진 부정적 감정은 담겨있지 않다. 그보다는 ‘끈기가 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의미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는 영어적 감성이 집요한 걸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지,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집요하다’나 ‘고집스럽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세계를 바꾼 13명의 미국 여성들’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32쪽짜리 그림책이다.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했으니, 어렵고 난해한 내용일 리 없는, 간단한 책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출판 자체가 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책 표지
첼시 클린턴의 ‘매우 정치적인’ 아동용 책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는 이 책 제목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지난 2월 당시 트럼프 정부의 법무장관 후보 제프 세션스 의원에 대한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반대 연설을 하던 중 지난 1986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망인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가 쓴 서한을 읽는다.

서한은 세션스 장관이 지난 1986년 연방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 킹 여사가 그를 반대하며 쓴 것으로 “세션스가 고령의 흑인 유권자들을 겁에 질리게 하려고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다. 그의 임명은 미 사법체계에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워런 상원의원이 의회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읽어내려가자, 공화당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가 동료 의원에 대한 비판 발언 금지 조항을 어겼다며 크게 반발했고, 워런 의원은 결국 상원의원들의 표결을 통해, 세션스 의원 인준과 관련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받게 됐다. 맥코넬 의원이 이같은 이례적인 조치에 대해, “워런에게 경고도 했고 설명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sisted)"라고 말했던 것이다.

워런 의원은 정말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회의장을 나와 옆방에서, 회의장에서 끝내지 못한 킹 여사 서한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이를 페이스북를 통해 생중계했다.

그런가 하면 버니 샌더스(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했던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 등 2명의 남성 민주당 의원들이 발언 금지 조치에 항의하며 세션스 의원 인준 표결에 앞서 회의장에서, 워런 의원이 읽지 못한 서한 내용을 마저 읽었다. 이들은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페이스북 생중계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런 상황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 특히 여성들이 워런 의원에게 지지를 보냈고,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라는 해시태그가 SNS에 앞다투어 올라왔다.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워런 의원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불의에 저항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말로 떠오른 것이다. 바로 그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됐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이처럼 여성을 지칭하는 ‘나쁜’ 말을 저항성의 상징적 유행어로 바꾼 역사라면, 워런 의원이 한 게 또 있다. 바로 지난 대선 때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감정적 발언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지지 구호로 변모시킨 ‘못된 여성(nasty woman)'이란 말이다.

지난해 10월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사회보장정책에 답변하던 도중 당시 트럼프 후보가 끼어들면서 내뱉은 한 마디, “이런 못된 여성 같으니(such a nasty woman)"는 논란을 낳았다. 부적절한 타이밍은 물론 여성에 대한 감정적 비하 발언으로 많은 여성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워런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갔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 "바로 그 못된 여자들(nasty women)은 강하고 똑똑하다, 그 못된(nasty) 여자들이 못된(nasty) 발로 투표장에서 가서 못된(nasty) 한 표를 던져 트럼프를 몰아낼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를 계기로 SNS에서 많은 여성, 스타들까지 나서 ‘나는 못된 여성이다.(I am a nasty woman)’란 해시태그를 달며 힐러리 클린턴을 지원하고 나섰다. ‘내가 바로 그 못된 여성이다’, ‘못된 여성이 그런 의미라면 기꺼이 못된 여성이 되겠다’는 말이 여성들 사이에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못된 여성(nasty woman)은, 정당한 행동을 하고도 남자들로부터 부당한 비판을 받는 여성들을 상징하는 단어이자, 클린턴 후보의 선거 구호가 된 것이다.

바로 그 워런 의원, 한때는 진보적 성향이 명확하지 않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대체할 후보로 부상했었지만, 결국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꿈’을 지지하며 클린턴의 열렬한 지원자가 되었던 워런 의원이 의회에서 핍박당하면서 유행어가 된 한 마디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를 첼시 클린턴이 책 제목으로 따온 건 그래서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여성의 저항성은 물론 현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저항, 또 어쩌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꿈을 안고,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을 받던 남성 후보에 맞섰던’ 자신의 어머니, 힐러리 클린턴까지 묘하게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13명의 여성 위인 외 1명의 카메오는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고집스러웠다(She Persisted)’. 이 책에 나오는 13명의 여성 위인은 다음과 같다.

미국 흑인 여성운동가의 원조인 헤리엇 터브만(흑인), 장애 극복의 상징 헬렌 켈러, 미국 원주민 출신의 세계적 발레리나 마리아 탈치프(미 대륙 원주민), 흑백 분리 교육 정책에 저항했던 루비 브릿지스(흑인), 상하원 의원을 모두 지낸 첫 여성 정치인으로 공화당임에도 매카시즘 반대 양심선언을 했던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히스패닉계 최초의 연방대법관 소냐 소토파이어, 의류노동자 파업을 선도했던 노동운동가 클라라 름리치, 도전적 저널리스트 넬리 블라이,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샐리 라이드와 여성운동가 클로뎃 콜빈(흑인), 육상선수 그리피스 조이너(흑인), 유명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흑인) 등이 등장한다.

흑인 5명, 히스패닉계 1명, 원주민 1명 등 유색인종이 7명으로, 백인보다 더 많다. 책에 나오는 위인들의 구성만 봐도 첼시 클린턴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여성과 장애인, 유색인종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를 향해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13명 외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명의 카메오가 더 나온다고 했다. 한 명의 카메오는 누굴까? 미국 언론들은 그 카메오가 힐러리 클린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힐러리와 첼시 클린턴 모녀
첼시, 엄마가 못 이룬 꿈 도전?

첼시 클린턴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조용히 하란 말을 들어온 사람들,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앉아있으란 말을 들어온 사람들, 가치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작은 사람들로 취급돼온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말이다.

첼시 클린턴은 이처럼 여성과 소수자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특히 여성 문제에서라면 정파성을 가리지 않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 백악관 선임고문인 캘러앤 콘웨이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소파에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 앉아있는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콘웨이가 대통령 집무실을 경시했단 비판을 쏟아냈고, ‘1990년대 집무실에서 있었던 자세와 비슷하다’(이 발언은 빌 클린턴 때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연상시킨 것으로 인식)는 등 원색적인 비난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첼시는 트위터에 ‘그같은 발언은 비열하다며 콘웨이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콘웨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슬림 입국 금지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무슬림과의 연대 시위에 2살 난 딸 샬롯과 함께 참석한 뒤 ‘샬롯의 첫 시위 참여’라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미국 정가에서는 엄마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한 지난해부터 이미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 가능성이 흘러나왔다. 스탠퍼드, 컬럼비아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NBC 기자를 지내기도 했고, 현재는 건강, 교육, 국제 구호, 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에 한 해 3천억여 원을 지원하는 클린턴 재단에서 뒤로 물러난 부모를 대신해 부회장으로 전면에 나서있다.

정치 가문 자제들의 정계 진출에 대해 기득권을 활용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적 환경에서 자라 정치적으로 더 잘 훈련돼 있을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는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에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뻔한 여성을 부모로 두고 있는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지경이다.

케네디 가문, 부시 가문, 쿠오모 가문 등 대를 이어 정계에 진출하는 유명 가문이 흔하다. 게다가 힐러리 클린턴이 투표수에서는 이기고도 미국의 주별 선거인단 확보 제도로 대선에서 석패한 아쉬움으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해져 있다.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첼시 클린턴이 그 부분을 매개로 정계 진출에 더 강력한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당장 내년 중간선거에서 부모인 클린턴 부부가 사는 뉴욕주의 17선거구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이 지역구의 니타 로웨이는 79살의 고령이어서 은퇴 가능성이 있다. 또 2020년에는 커스틴 질리브랜드 의원의 뒤를 이어 뉴욕주 상원의원에 곧바로 출마할 거란 예상까지 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측근들은, 클린턴이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곧바로 첼시가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부모의 배경이 있어도 첼시 클린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모멘텀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에다 대선후보를 지낸, 정치 베테랑 가문의 딸이다. 정말 정계 진출의 꿈을, 정말로 엄마의 꿈을 대신 이룰 야망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본인이 정계 진출의 시기를 선택할 것이다.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대가 비등해,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내년 중간 선거에서의 설욕을 벼르는 것은 물론, 일부에서 트럼프 대통령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당장 내년 중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민주당이 현재도 고민하는 문제다.

조기 등판인가, 아니면 좀 더 명분을 축적한 뒤로 미룰 것인가. 첼시 클린턴의 정계 진출 여부와 시기에 대해서 벌써 클린턴 가문이 깊게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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