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 쇠락한 골목길에서 만나는 ‘한 평의 예술’

입력 2017.03.22 (13:04) 수정 2017.03.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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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서울 생활 20년이 다 돼가지만 제대로 가본 적 없는 곳입니다. 떠오르는 건 냉면과 인쇄소 정도. 시내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명동에서 멈추거나 남산으로 넘어갔습니다.

선비들의 마을이라 이름까지 '붓 필(筆)'자를 따왔으나 권세를 누리지는 못한 곳. 큰 길 뒤 다세대 주택들이 어지럽게 둘러앉은 곳. 골목 모퉁이마다 주인 모를 쓰레기가 쌓여있는 곳. 필동은 '쇠락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적어도 2014년, 낙후된 골목길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변화시키는 '필동타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진 말입니다.


'스트리트뮤지엄 85m'라는 작은 이정표에 의지해 한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70m, 50m, 30m...순대국집을 지나 부대찌개집과 감자탕집에 이를 때까지도 '뮤지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건가?' 조금 불안해 질 때쯤 15m 높이 거대한 푸른 탑에서 웃고 있는 새하얀 북금곰을 마주쳤습니다.


한성필 작가의 '아이스버그'.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풍기는 철조골재 주차타워를 스크린으로 덮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위협받고 있는 북금곰과 펭귄, 고래들이 잠시나마 이곳에서 쉬어갑니다. 한성필 작가는 "흉물스러운 이미지가 있었던 곳인데, 공공미술을 통해서, 예술로써 이 지역을 부활시키고 싶다" 고 설명합니다.


예술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스버그를 지나자 8개의 아기자기한 스트리트뮤지엄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른바 "한평 미술관", 가로세로 3.3 제곱미터 작은 공간에 들어선 미술관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거나 누군가 무단주차를 하던 자투리 땅을 이용했습니다.


둥지, 사변삼각, 컨테이너, 우물, 모퉁이, 이음...제각각 모습에 따라 독특한 이름이 붙은 스트리트뮤지엄에서는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벽면과 천정이 제각각 다른 각도로 설계된 곳, 벽이 아닌 바닥을 내려다 보는 곳, 터널처럼 흘러가는 곳 등등 공간에 따른 감상 방법도 각양각색입니다. 성인 남성이 대여섯 걸음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공간 속에 전세계 작가들의 가치있는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스트리트뮤지엄 건물 자체도 볼거리입니다.

작품 관리를 맡고 있는 나유미 매니저(필동문화예술공간 예술통)는 "(거리 예술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맞게 너무 무거운 주제의 작품을 배치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3개월 단위로 전시를 바꾼다"고 설명했습니다. 데이트 나온 청춘남녀도, 소풍 나온 가족들도, 산책나온 동네 어르신들도,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는 얘기죠.


스트리트뮤지엄 사이사이 골목에 서있는 '마이크로뮤지엄'도 참신한 볼거리입니다. 골목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 골목의 여백에 들어선 1m 높이 마이크로뮤지엄에서는 다양한 미디어아트를 즐길 수 있습니다. 허리를 숙여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색달랐습니다. 골목길에서 보물을 줍는 기분이랄까요.



필동 골목길과 남산골 한옥마을에 걸쳐 있는 스트리트뮤지엄과 마이크로뮤지엄을 모두 돌아보는데에는 대략 한시간에서 한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골목통 초입에 있는 안내센터에서 지도를 챙긴 뒤, 지도 위에 각 스트리트뮤지엄의 출석도장 8개를 찍어 오면 골목통안 가게에서 커피나 맥주 한잔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관람도 커피도 맥주도 모두 무료입니다. 부디 8곳을 모두 들러 충분히 즐겨달라는 뜻입니다.


필연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 뭐 남아요?" 사비를 들여 필동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박동훈 대표. 경남 산청에서 상경한 뒤 필동에서 폐지 줍기, 자장면 배달, 인쇄공을 거쳐 이제는 번듯한 광고회사 대표로 자리잡은 그는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요?

샛노란 겨자색 바지를 입은 박대표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답했습니다. "충무로에서 점점 문화예술이 빠져나간걸 느꼈어요. 일순간에 빠진 게 아니라 긴 시간동안 빠져나갔는데, 문화예술을 다시 한번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공간에 대한 보답이라는 거죠.


그러다 문득 걱정이 생겼습니다. 차차 이곳이 더욱 더 '뜨면' 곧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시작으로, 개성없는 상가가 형성되고 부담스러워진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박대표 역시 이런 상황을 경계했습니다.

"무슨무슨 길이나 이런 공간을 가보면 먹는 것과 쇼핑 위주가 돼있잖아요. 사실 그 공간들은 저는 (문화공간이 아니라) 상업지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정말 문화지역이라고 하면 (지역주민들과도)서로 소통하고 대화하고 머무를 수 있고 이야기할 수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 추억하러도 다시와야 되는데, 쇼핑을 추억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것처럼 저는 추억을 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필동 문화예술공간 예술통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재미로(남산 만화예술거리), 서애로(서애 유성룡 집터 등)와의 상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공간을 확장해서 거대한 상권을 이루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서로 오고가는 '공간의 연계'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근처 재미로에는 미디어작품이, 서애로에는 마이크로뮤지엄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관람 시간 제한도, 표를 끊을 필요도 없는 거리의 미술관에서 문턱없는 예술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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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동, 쇠락한 골목길에서 만나는 ‘한 평의 예술’
    • 입력 2017-03-22 13:04:49
    • 수정2017-03-22 18:01:57
    취재K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서울 생활 20년이 다 돼가지만 제대로 가본 적 없는 곳입니다. 떠오르는 건 냉면과 인쇄소 정도. 시내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명동에서 멈추거나 남산으로 넘어갔습니다.

선비들의 마을이라 이름까지 '붓 필(筆)'자를 따왔으나 권세를 누리지는 못한 곳. 큰 길 뒤 다세대 주택들이 어지럽게 둘러앉은 곳. 골목 모퉁이마다 주인 모를 쓰레기가 쌓여있는 곳. 필동은 '쇠락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적어도 2014년, 낙후된 골목길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변화시키는 '필동타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진 말입니다.


'스트리트뮤지엄 85m'라는 작은 이정표에 의지해 한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70m, 50m, 30m...순대국집을 지나 부대찌개집과 감자탕집에 이를 때까지도 '뮤지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건가?' 조금 불안해 질 때쯤 15m 높이 거대한 푸른 탑에서 웃고 있는 새하얀 북금곰을 마주쳤습니다.


한성필 작가의 '아이스버그'.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풍기는 철조골재 주차타워를 스크린으로 덮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위협받고 있는 북금곰과 펭귄, 고래들이 잠시나마 이곳에서 쉬어갑니다. 한성필 작가는 "흉물스러운 이미지가 있었던 곳인데, 공공미술을 통해서, 예술로써 이 지역을 부활시키고 싶다" 고 설명합니다.


예술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스버그를 지나자 8개의 아기자기한 스트리트뮤지엄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른바 "한평 미술관", 가로세로 3.3 제곱미터 작은 공간에 들어선 미술관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거나 누군가 무단주차를 하던 자투리 땅을 이용했습니다.


둥지, 사변삼각, 컨테이너, 우물, 모퉁이, 이음...제각각 모습에 따라 독특한 이름이 붙은 스트리트뮤지엄에서는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벽면과 천정이 제각각 다른 각도로 설계된 곳, 벽이 아닌 바닥을 내려다 보는 곳, 터널처럼 흘러가는 곳 등등 공간에 따른 감상 방법도 각양각색입니다. 성인 남성이 대여섯 걸음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공간 속에 전세계 작가들의 가치있는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스트리트뮤지엄 건물 자체도 볼거리입니다.

작품 관리를 맡고 있는 나유미 매니저(필동문화예술공간 예술통)는 "(거리 예술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맞게 너무 무거운 주제의 작품을 배치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3개월 단위로 전시를 바꾼다"고 설명했습니다. 데이트 나온 청춘남녀도, 소풍 나온 가족들도, 산책나온 동네 어르신들도,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는 얘기죠.


스트리트뮤지엄 사이사이 골목에 서있는 '마이크로뮤지엄'도 참신한 볼거리입니다. 골목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 골목의 여백에 들어선 1m 높이 마이크로뮤지엄에서는 다양한 미디어아트를 즐길 수 있습니다. 허리를 숙여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색달랐습니다. 골목길에서 보물을 줍는 기분이랄까요.



필동 골목길과 남산골 한옥마을에 걸쳐 있는 스트리트뮤지엄과 마이크로뮤지엄을 모두 돌아보는데에는 대략 한시간에서 한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골목통 초입에 있는 안내센터에서 지도를 챙긴 뒤, 지도 위에 각 스트리트뮤지엄의 출석도장 8개를 찍어 오면 골목통안 가게에서 커피나 맥주 한잔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관람도 커피도 맥주도 모두 무료입니다. 부디 8곳을 모두 들러 충분히 즐겨달라는 뜻입니다.


필연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 뭐 남아요?" 사비를 들여 필동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박동훈 대표. 경남 산청에서 상경한 뒤 필동에서 폐지 줍기, 자장면 배달, 인쇄공을 거쳐 이제는 번듯한 광고회사 대표로 자리잡은 그는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요?

샛노란 겨자색 바지를 입은 박대표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답했습니다. "충무로에서 점점 문화예술이 빠져나간걸 느꼈어요. 일순간에 빠진 게 아니라 긴 시간동안 빠져나갔는데, 문화예술을 다시 한번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공간에 대한 보답이라는 거죠.


그러다 문득 걱정이 생겼습니다. 차차 이곳이 더욱 더 '뜨면' 곧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시작으로, 개성없는 상가가 형성되고 부담스러워진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박대표 역시 이런 상황을 경계했습니다.

"무슨무슨 길이나 이런 공간을 가보면 먹는 것과 쇼핑 위주가 돼있잖아요. 사실 그 공간들은 저는 (문화공간이 아니라) 상업지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정말 문화지역이라고 하면 (지역주민들과도)서로 소통하고 대화하고 머무를 수 있고 이야기할 수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 추억하러도 다시와야 되는데, 쇼핑을 추억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것처럼 저는 추억을 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필동 문화예술공간 예술통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재미로(남산 만화예술거리), 서애로(서애 유성룡 집터 등)와의 상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공간을 확장해서 거대한 상권을 이루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서로 오고가는 '공간의 연계'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근처 재미로에는 미디어작품이, 서애로에는 마이크로뮤지엄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관람 시간 제한도, 표를 끊을 필요도 없는 거리의 미술관에서 문턱없는 예술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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