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플러스] 입양아, 플라세 장관…“내가 못할 이유는 없지!”

입력 2017.03.29 (06:59) 수정 2017.03.2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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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월 23일 프랑스의 한 공항 대합실. 민간 입양기구 소속의 한 요원이 푸른 색 반 소매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은 한국 어린이를 프랑스인 일가족에게 인계하고 급히 자리를 뜨려고 한다.

수원의 고아원 시절 장 뱅상 플라세수원의 고아원 시절 장 뱅상 플라세

하지만, 이 어린이는 마중나온 프랑스인 일가족을 한사코 마다하고 자신을 데려온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다.

당시 7살이던 이 한국 어린이는 이후 프랑스 가정에 입양돼 장-뱅상 플라세라는 프랑스 어린이로 거듭난다. 41년 뒤 한국인 입양아 장-뱅상 플라세는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국가개혁장관에 오른다.

장-뱅상 플라세 장관(왼쪽 두 번째), 수원시 관계자와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 헌화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7. 3. 21장-뱅상 플라세 장관(왼쪽 두 번째), 수원시 관계자와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 헌화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7. 3. 21

장-뱅상 플라세 프랑스 국가개혁장관이 지난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플라세 장관은 2011년 상원 의원이 됐을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플라세 장관은 이번 방문 때 수원시 파장동에 있는 한국전쟁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찾아 참전용사들을 추모하고, '한. 프랑스 전자정부 협력 세미나''한국 프랑코포니 축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를 관람하는 장-뱅상 플라세 장관. 2017. 3. 21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를 관람하는 장-뱅상 플라세 장관. 2017. 3. 21

한국인 입양아 출신 플라세 장관이 한국과 프랑스 정부간은 물론이고 민간사업에도 가교 역할을 하는 모습이 양국정부와 국민사이에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플라세 장관은 자신이 이 같은 역할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 뿌르꾸아 빠 무아!'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못할 이유는 없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자서전은 생모가 사망하고 수원의 한 고아원에 맡겨졌던 '권오복'이라는 7살 한국 어린이가 프랑스 공항에서 약간의 소동 끝에 자신을 입양할 프랑스 가정 일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랑스 북서부 소도시 캉에서 변호사와 교사로 일하며 3남 1녀를 키우던 플라세 부부는 권오복을 4남 1녀의 막내로 받아들이고 장-뱅상이라는 제2의 이름을 지어준다. 양부모와 가족들은 장-뱅상이 프랑스에서 인생의 두번 째 기회를 꽃피울 수 있도록 프랑스 말을 익히고, 가정과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여기에 화답하듯 장-뱅상은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질문도 많이 하는 호기심이 강한 소년으로, 축구와 승마, 스키를 즐기는 활달한 소년으로 자란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친선모임과 토론을 이끌고, 이후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로 나서게 된다.


장-뱅상 플라세는 자신의 입양에서부터 어린 시절,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정치 입문에 이르는 과정을 정리해 " 나는 내가 받는 교육과 내가 지켜온 인간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 라는 체험적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함으로써 한국인 입양아라는 태생적 멍에를 벗으려는 필사의 노력이었음을 뒤에 밝힌다.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상원에 진출한 장-뱅상 플라세 당선자가 26일 파리 7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인터뷰하고 있다. 2011.9.26한국계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상원에 진출한 장-뱅상 플라세 당선자가 26일 파리 7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인터뷰하고 있다. 2011.9.26

대학을 졸업한 장-뱅상은 스스로의 선택과 힘으로 정치판에 들어서서는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쳐 녹색당에 입당한다. 이후 장-뱅상은 정치의 황금률이 '투지와 대결 그리고 협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소양과 능력을 쏟아 녹색당을 주도한다. 2011년에는 파리 근교 에손 도의 상원의원에 당선돼 녹색당 초대 원내 대표가 되고, 마침내 2016년 2월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연합 내각의 국가개혁장관에 발탁 된다.


장-뱅상은 어렸을 때 자신이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해, 자신을 '내보낸 나라' 한국의 기억은 지우려고 애썼으나, 자신을 받아 준 프랑스는 '영원한 조국' 으로 고맙게 여기며 자란다. 그는 마흔을 넘긴 시점에서 딸 마틸드의 출생을 계기로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마련해준 딸의 돌잔치에 참석하면서 한국과 화해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한국계 입양인으로 지난달 선거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 된 장-뱅상 플라세 의원이 31일 외교통상부를 방문, 김성환 장관과 환담하고 있다.2011.10.31한국계 입양인으로 지난달 선거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 된 장-뱅상 플라세 의원이 31일 외교통상부를 방문, 김성환 장관과 환담하고 있다.2011.10.31

상원 의원이 된 2011년에는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떠난 지 3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 때 플라세 장관은 자신이 7살까지 살았던 수원의 고아원을 찾아 자신을 맡긴 뒤 사망했다는 생모의 아픔을 헤아려보고, 자신의 유아기 때 흔적을 더듬어보며 한국과의 진정한 화해를 시도했다고 실토한다.

장-뱅상 플라세 장관이 최근 한국을 방문해 보여준 공적.사적 행보에는 한국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이 아니라 성공한 입양아로서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여 있다.

파리 시내에 있는 프랑스 국가개혁부 건물 정문 모습. 한국계 입양인 장 뱅상 플라세(47)는 지난달 국가개혁장관에 임명됐다. 2016.3.11파리 시내에 있는 프랑스 국가개혁부 건물 정문 모습. 한국계 입양인 장 뱅상 플라세(47)는 지난달 국가개혁장관에 임명됐다. 2016.3.11

그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한국과는 다른 예절과 인성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출되는 한국적 기질에 대한 긍정과 관용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플라세 장관은 자신의 활달하고 영리한 개인적 기질과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고 가까워지려는 특유의 친화력, 그리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따르려는 예의바른 처신은 서양식 개인주의와는 분명 다른 것으로 한국적 DNA라고 단언한다.

해외 입양을 기다리는 어린이들해외 입양을 기다리는 어린이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사회.경제적 사정이 어려웠을 때 우리의 자녀를 우리가 보듬기가 힘들다며 손쉬운 방법으로 택했던 해외입양!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요즈음에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이뤄지고있다.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16만 6천여 명의 우리 아이들이 해외의 낯설은 가정으로 갔다. 이 숫자는 국내외 전체 입양의 68%에 이르는 것으로 국내입양을 두 배 이상 넘는다.


이들 가운데는 장-뱅상 플라세처럼 입양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적극적인 교육으로 현지에 적응하고,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난해 10월 국내 한 일간지에는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 갔지만 지금껏 미국 국적을 얻지 못한 한국계 입양인 조이 알레시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 있다.

무국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조이 알레시씨무국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조이 알레시씨

『 그는 태어난 지 하루이틀만인 1966년 7월 20일 파주 문산의 고아원 '영생원'에 맡겨졌고, 이듬해 3월 생후 7개월 때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에 입양됐다....그가 자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5살 때 멕시코에 가기 위해 미국 여권을 신청했을 때였다.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여권 발급이 안된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 믿고 살아온 그 자신의 정체성이 철저히 부정된 것이다....알레시는 우여곡절 끝에 '고아 호적'을 확인해 자신의 한국 국적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어렵게 한국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여권과 입양서류를 함께 제시하고 상황 설명을 한 뒤 취업이 됐지만 그의 미국생활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주기적으로 장기체류비자를 갱신해야 했고, 대통령 선거 등 각종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됐다. 』

알레시처럼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 입양인 가운데 10% 정도가 무국적일 것으로 관계기관은 보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정부가 입양을 하나의 외화벌이 사업으로 간주해 입양절차를 졸속으로 처리했던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양부모가 입양아를 해당 국가에 가서 직접 데려오면 자동적으로 미국 국적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런 절차 없이 서류상으로 입양했을 경우 양부모가 미국에서 다시 재입양 절차를 거치거나, 아이가 15살이 될 때 미국으로 '귀화'해야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넘겨 받은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고 생각해 양부모가 후속 절차를 밟지 않으면 입양아는 국제미아가 되는 것이다.

워싱턴 시민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7. 3. 6워싱턴 시민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7. 3. 6

올초 출범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실행될 경우 미국에 사는 미귀화 한국계 입양인들이 무국적자로 몰려 추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도 입양 가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된데다 경제여건도 좋아진 만큼 정책적으로 해외입양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입양된 어린이에 대해서는 해당국 영사관을 통해 사후 관리를 강화하고 법적인 도움도 줘야 한다.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에서 노르웨이 입양동포 및 가족들이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2016.3.25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에서 노르웨이 입양동포 및 가족들이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2016.3.25

그래서 더 많은 입양아들이 장-뱅상 플라세 같은 성공한 입양아가 되어 자신을 내보낸 한국 부모와 나아가 한국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미래도 함께 꿈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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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월 23일 프랑스의 한 공항 대합실. 민간 입양기구 소속의 한 요원이 푸른 색 반 소매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은 한국 어린이를 프랑스인 일가족에게 인계하고 급히 자리를 뜨려고 한다.

수원의 고아원 시절 장 뱅상 플라세
하지만, 이 어린이는 마중나온 프랑스인 일가족을 한사코 마다하고 자신을 데려온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다.

당시 7살이던 이 한국 어린이는 이후 프랑스 가정에 입양돼 장-뱅상 플라세라는 프랑스 어린이로 거듭난다. 41년 뒤 한국인 입양아 장-뱅상 플라세는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국가개혁장관에 오른다.

장-뱅상 플라세 장관(왼쪽 두 번째), 수원시 관계자와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 헌화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7. 3. 21
장-뱅상 플라세 프랑스 국가개혁장관이 지난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플라세 장관은 2011년 상원 의원이 됐을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플라세 장관은 이번 방문 때 수원시 파장동에 있는 한국전쟁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찾아 참전용사들을 추모하고, '한. 프랑스 전자정부 협력 세미나''한국 프랑코포니 축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를 관람하는 장-뱅상 플라세 장관. 2017. 3. 21
한국인 입양아 출신 플라세 장관이 한국과 프랑스 정부간은 물론이고 민간사업에도 가교 역할을 하는 모습이 양국정부와 국민사이에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플라세 장관은 자신이 이 같은 역할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 뿌르꾸아 빠 무아!'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못할 이유는 없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자서전은 생모가 사망하고 수원의 한 고아원에 맡겨졌던 '권오복'이라는 7살 한국 어린이가 프랑스 공항에서 약간의 소동 끝에 자신을 입양할 프랑스 가정 일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랑스 북서부 소도시 캉에서 변호사와 교사로 일하며 3남 1녀를 키우던 플라세 부부는 권오복을 4남 1녀의 막내로 받아들이고 장-뱅상이라는 제2의 이름을 지어준다. 양부모와 가족들은 장-뱅상이 프랑스에서 인생의 두번 째 기회를 꽃피울 수 있도록 프랑스 말을 익히고, 가정과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여기에 화답하듯 장-뱅상은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질문도 많이 하는 호기심이 강한 소년으로, 축구와 승마, 스키를 즐기는 활달한 소년으로 자란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친선모임과 토론을 이끌고, 이후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로 나서게 된다.


장-뱅상 플라세는 자신의 입양에서부터 어린 시절,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정치 입문에 이르는 과정을 정리해 " 나는 내가 받는 교육과 내가 지켜온 인간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 라는 체험적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함으로써 한국인 입양아라는 태생적 멍에를 벗으려는 필사의 노력이었음을 뒤에 밝힌다.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상원에 진출한 장-뱅상 플라세 당선자가 26일 파리 7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인터뷰하고 있다. 2011.9.26
대학을 졸업한 장-뱅상은 스스로의 선택과 힘으로 정치판에 들어서서는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쳐 녹색당에 입당한다. 이후 장-뱅상은 정치의 황금률이 '투지와 대결 그리고 협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소양과 능력을 쏟아 녹색당을 주도한다. 2011년에는 파리 근교 에손 도의 상원의원에 당선돼 녹색당 초대 원내 대표가 되고, 마침내 2016년 2월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연합 내각의 국가개혁장관에 발탁 된다.


장-뱅상은 어렸을 때 자신이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해, 자신을 '내보낸 나라' 한국의 기억은 지우려고 애썼으나, 자신을 받아 준 프랑스는 '영원한 조국' 으로 고맙게 여기며 자란다. 그는 마흔을 넘긴 시점에서 딸 마틸드의 출생을 계기로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마련해준 딸의 돌잔치에 참석하면서 한국과 화해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한국계 입양인으로 지난달 선거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 된 장-뱅상 플라세 의원이 31일 외교통상부를 방문, 김성환 장관과 환담하고 있다.2011.10.31
상원 의원이 된 2011년에는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떠난 지 3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 때 플라세 장관은 자신이 7살까지 살았던 수원의 고아원을 찾아 자신을 맡긴 뒤 사망했다는 생모의 아픔을 헤아려보고, 자신의 유아기 때 흔적을 더듬어보며 한국과의 진정한 화해를 시도했다고 실토한다.

장-뱅상 플라세 장관이 최근 한국을 방문해 보여준 공적.사적 행보에는 한국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이 아니라 성공한 입양아로서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여 있다.

파리 시내에 있는 프랑스 국가개혁부 건물 정문 모습. 한국계 입양인 장 뱅상 플라세(47)는 지난달 국가개혁장관에 임명됐다. 2016.3.11
그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한국과는 다른 예절과 인성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출되는 한국적 기질에 대한 긍정과 관용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플라세 장관은 자신의 활달하고 영리한 개인적 기질과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고 가까워지려는 특유의 친화력, 그리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따르려는 예의바른 처신은 서양식 개인주의와는 분명 다른 것으로 한국적 DNA라고 단언한다.

해외 입양을 기다리는 어린이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사회.경제적 사정이 어려웠을 때 우리의 자녀를 우리가 보듬기가 힘들다며 손쉬운 방법으로 택했던 해외입양!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요즈음에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이뤄지고있다.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16만 6천여 명의 우리 아이들이 해외의 낯설은 가정으로 갔다. 이 숫자는 국내외 전체 입양의 68%에 이르는 것으로 국내입양을 두 배 이상 넘는다.


이들 가운데는 장-뱅상 플라세처럼 입양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적극적인 교육으로 현지에 적응하고,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난해 10월 국내 한 일간지에는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 갔지만 지금껏 미국 국적을 얻지 못한 한국계 입양인 조이 알레시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 있다.

무국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조이 알레시씨
『 그는 태어난 지 하루이틀만인 1966년 7월 20일 파주 문산의 고아원 '영생원'에 맡겨졌고, 이듬해 3월 생후 7개월 때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에 입양됐다....그가 자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5살 때 멕시코에 가기 위해 미국 여권을 신청했을 때였다.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여권 발급이 안된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 믿고 살아온 그 자신의 정체성이 철저히 부정된 것이다....알레시는 우여곡절 끝에 '고아 호적'을 확인해 자신의 한국 국적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어렵게 한국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여권과 입양서류를 함께 제시하고 상황 설명을 한 뒤 취업이 됐지만 그의 미국생활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주기적으로 장기체류비자를 갱신해야 했고, 대통령 선거 등 각종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됐다. 』

알레시처럼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 입양인 가운데 10% 정도가 무국적일 것으로 관계기관은 보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정부가 입양을 하나의 외화벌이 사업으로 간주해 입양절차를 졸속으로 처리했던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양부모가 입양아를 해당 국가에 가서 직접 데려오면 자동적으로 미국 국적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런 절차 없이 서류상으로 입양했을 경우 양부모가 미국에서 다시 재입양 절차를 거치거나, 아이가 15살이 될 때 미국으로 '귀화'해야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넘겨 받은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고 생각해 양부모가 후속 절차를 밟지 않으면 입양아는 국제미아가 되는 것이다.

워싱턴 시민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7. 3. 6
올초 출범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실행될 경우 미국에 사는 미귀화 한국계 입양인들이 무국적자로 몰려 추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도 입양 가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된데다 경제여건도 좋아진 만큼 정책적으로 해외입양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입양된 어린이에 대해서는 해당국 영사관을 통해 사후 관리를 강화하고 법적인 도움도 줘야 한다.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에서 노르웨이 입양동포 및 가족들이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2016.3.25
그래서 더 많은 입양아들이 장-뱅상 플라세 같은 성공한 입양아가 되어 자신을 내보낸 한국 부모와 나아가 한국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미래도 함께 꿈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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