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고 싶은 딸 위해 엄마가 만든 ‘휠체어길’

입력 2017.03.29 (17:11) 수정 2017.03.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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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지하철 고속버스터미널 역이었다.

막 유치원에 들어간 딸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탄 엄마는 휠체어 리프트에서 '수리 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런 안내문을 발견했다. "7호선 환승은 9호선 동작역→4호선 이수역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옆 계단을 이용하면 2~3분이면 충분한 거리.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이라 휠체어를 탄 아이와 함께 움직이려면 이리저리 돌고 돌아 대충 계산해도 40분은 걸릴 상황이었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역무실에 전화를 건 엄마에게 담당자는 물었다.

"어머니, 지금 계신 위치가 어딘가요?" 그걸 왜 묻느냐고 되묻는 엄마에게 담당자는 다시 말했다. "위쪽에 계시면 9호선과 3호선 쪽으로 연락하시고, 아래쪽에 계시면 7호선으로 연락을 하셔야 해서요." 노선별로 운영사업자가 다르니 지하철 이용 문의도 노선에 따라 달리하라는 설명이었다.

벌써 6년 전, '엄마' 홍윤희 씨가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지민이의 '그곳에 가고 싶다.'

'딸' 지민이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다. 소아암을 앓았고, 치료 후유증으로 걸을 수 없어 6살 때부터 휠체어를 탔다. 재활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지하철역 이름을 외며 한글을 배웠을 정도로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하지만, 계단과 도로 턱이 휠체어를 가로막아 혼자 하는 외출이 쉽지 않다.


지민이를 위해 홍윤희 씨가 선택한 건 편하고 안전한 '휠체어길'이었다.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와 리프트를 늘리면 제일 좋겠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정확한 휠체어길 안내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민이의 사연을 담아 2015년 모 포털사이트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고("지민이의 그곳에 가고 싶다"), 뜻을 모아준 423명의 도움으로 6백만 원 넘는 돈이 모였다.

지난해 7월 안내지도 제작이 시작됐고 반년이 넘는 작업 끝에 지난 2월, 서울 지하철 14개 역의 '휠체어 환승 지도'가 완성됐다. 기존 지하철 공공 앱에 담긴 정보보다 세부적이고,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해 보기 편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휠체어 이용자뿐 아니라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지하철을 타야 하는 엄마들처럼 이른바 '교통약자'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전망이다.

[관련 링크] 지하철 '휠체어 환승 지도' 보러가기

'휠체어길'이 먼저 공개된 곳은 가산디지털단지역과 건대입구역, 고속터미널역, 김포공항역, 노원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대림역, 서울역, 석계역, 신도림역, 영등포구청역, 왕십리역, 이수역, 종로3가역 등 총 14개 역의 14개 환승 루트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가 2013년 내놓은 교통약자용 '지하철 환승 도우미' 앱을 기준으로, 환승 단계가 9~12개에 이르는 복잡한 구간들이다.

조사 결과, 14개 역의 환승 소요시간은 최단 8분, 최장 22분.

가산디지털단지역의 경우 비장애인 환승 시간과 비교해 휠체어를 이용할 경우 최대 7배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 14개 구간 중 4개 역(가산디지털단지, 건대 입구, 대림, 영등포구청)은 휠체어를 타고 가면 아예 역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환승이 가능하다고 홍윤희 씨는 설명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휠체어 환승 지도가산디지털단지역 휠체어 환승 지도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불편과 고단함이 지금도 지하철 곳곳에서 계속되는 셈인데, 그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가장 짧고 안전하고 편한 휠체어 길을 알려주고 싶다는 게 홍 씨의 바람이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

혼자였다면 못했을 일…."아직 할 일 많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번 휠체어 지도 제작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숨어 있다.

홍윤희 씨의 뜻에 공감한 김남형 계원예대 교수가 참여했고,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졸업 프로젝트로 지도 제작에 함께했다. 교통약자의 사용자경험(UX)을 포함한 서비스디자인프로젝트가 일종의 산학협력으로 진행된 셈이다.

지도 제작에 참여한 계원예대 교수와 학생들지도 제작에 참여한 계원예대 교수와 학생들

유난히 더웠던 지난해 여름, 사람 많은 지하철 안팎을 직접 휠체어를 타고 돌며 불편한 점을 조사해 일일이 기록하고 지도 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던 건 자원봉사자들의 힘이었다. 홍윤희 씨와 지민이를 따라다니며 지도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1단계 지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홍 씨는 연말까지 30개 역의 환승 루트를 추가로 제작, 공개할 계획이다.

여기에 지하철역 안내 표지판을 개선하고 추가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된다. 노선별로 각기 다른 표지판 디자인을 통일하고, 휠체어 '눈높이'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안내문 등을 부착하는 작업이다. (취재를 위해 홍윤희 씨와 지민이를 만난 지하철 동대문역사공원의 경우,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등에 부착된 안내표지가 휠체어를 탄 지민이 눈높이엔 한참 높은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다른 역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홍 씨는 설명했다.)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이 이 작업을 함께하겠다며 이미 뜻을 밝혀온 상태다.

앞으로 진행될 2단계 작업에도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예정이다.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프로젝트의 취지를 알리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했고, 지난 주말 지도제작을 위한 첫 번째 오프라인 교육이 진행됐다. 다섯 살짜리 딸과 함께 온 엄마, 반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한 선생님 등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날 그곳에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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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9 17:11:24
    • 수정2017-03-30 16:34:20
    사회
시작은 지하철 고속버스터미널 역이었다.

막 유치원에 들어간 딸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탄 엄마는 휠체어 리프트에서 '수리 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이런 안내문을 발견했다. "7호선 환승은 9호선 동작역→4호선 이수역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옆 계단을 이용하면 2~3분이면 충분한 거리.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이라 휠체어를 탄 아이와 함께 움직이려면 이리저리 돌고 돌아 대충 계산해도 40분은 걸릴 상황이었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역무실에 전화를 건 엄마에게 담당자는 물었다.

"어머니, 지금 계신 위치가 어딘가요?" 그걸 왜 묻느냐고 되묻는 엄마에게 담당자는 다시 말했다. "위쪽에 계시면 9호선과 3호선 쪽으로 연락하시고, 아래쪽에 계시면 7호선으로 연락을 하셔야 해서요." 노선별로 운영사업자가 다르니 지하철 이용 문의도 노선에 따라 달리하라는 설명이었다.

벌써 6년 전, '엄마' 홍윤희 씨가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지민이의 '그곳에 가고 싶다.'

'딸' 지민이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다. 소아암을 앓았고, 치료 후유증으로 걸을 수 없어 6살 때부터 휠체어를 탔다. 재활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지하철역 이름을 외며 한글을 배웠을 정도로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하지만, 계단과 도로 턱이 휠체어를 가로막아 혼자 하는 외출이 쉽지 않다.


지민이를 위해 홍윤희 씨가 선택한 건 편하고 안전한 '휠체어길'이었다.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와 리프트를 늘리면 제일 좋겠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정확한 휠체어길 안내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민이의 사연을 담아 2015년 모 포털사이트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고("지민이의 그곳에 가고 싶다"), 뜻을 모아준 423명의 도움으로 6백만 원 넘는 돈이 모였다.

지난해 7월 안내지도 제작이 시작됐고 반년이 넘는 작업 끝에 지난 2월, 서울 지하철 14개 역의 '휠체어 환승 지도'가 완성됐다. 기존 지하철 공공 앱에 담긴 정보보다 세부적이고,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해 보기 편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휠체어 이용자뿐 아니라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지하철을 타야 하는 엄마들처럼 이른바 '교통약자'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전망이다.

[관련 링크] 지하철 '휠체어 환승 지도' 보러가기

'휠체어길'이 먼저 공개된 곳은 가산디지털단지역과 건대입구역, 고속터미널역, 김포공항역, 노원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대림역, 서울역, 석계역, 신도림역, 영등포구청역, 왕십리역, 이수역, 종로3가역 등 총 14개 역의 14개 환승 루트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가 2013년 내놓은 교통약자용 '지하철 환승 도우미' 앱을 기준으로, 환승 단계가 9~12개에 이르는 복잡한 구간들이다.

조사 결과, 14개 역의 환승 소요시간은 최단 8분, 최장 22분.

가산디지털단지역의 경우 비장애인 환승 시간과 비교해 휠체어를 이용할 경우 최대 7배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 14개 구간 중 4개 역(가산디지털단지, 건대 입구, 대림, 영등포구청)은 휠체어를 타고 가면 아예 역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환승이 가능하다고 홍윤희 씨는 설명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휠체어 환승 지도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불편과 고단함이 지금도 지하철 곳곳에서 계속되는 셈인데, 그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가장 짧고 안전하고 편한 휠체어 길을 알려주고 싶다는 게 홍 씨의 바람이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

혼자였다면 못했을 일…."아직 할 일 많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번 휠체어 지도 제작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숨어 있다.

홍윤희 씨의 뜻에 공감한 김남형 계원예대 교수가 참여했고,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졸업 프로젝트로 지도 제작에 함께했다. 교통약자의 사용자경험(UX)을 포함한 서비스디자인프로젝트가 일종의 산학협력으로 진행된 셈이다.

지도 제작에 참여한 계원예대 교수와 학생들
유난히 더웠던 지난해 여름, 사람 많은 지하철 안팎을 직접 휠체어를 타고 돌며 불편한 점을 조사해 일일이 기록하고 지도 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던 건 자원봉사자들의 힘이었다. 홍윤희 씨와 지민이를 따라다니며 지도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1단계 지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홍 씨는 연말까지 30개 역의 환승 루트를 추가로 제작, 공개할 계획이다.

여기에 지하철역 안내 표지판을 개선하고 추가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된다. 노선별로 각기 다른 표지판 디자인을 통일하고, 휠체어 '눈높이'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안내문 등을 부착하는 작업이다. (취재를 위해 홍윤희 씨와 지민이를 만난 지하철 동대문역사공원의 경우,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등에 부착된 안내표지가 휠체어를 탄 지민이 눈높이엔 한참 높은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다른 역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홍 씨는 설명했다.)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이 이 작업을 함께하겠다며 이미 뜻을 밝혀온 상태다.

앞으로 진행될 2단계 작업에도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예정이다.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프로젝트의 취지를 알리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했고, 지난 주말 지도제작을 위한 첫 번째 오프라인 교육이 진행됐다. 다섯 살짜리 딸과 함께 온 엄마, 반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한 선생님 등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날 그곳에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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