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은 슈퍼맨?

입력 2017.04.02 (22:57) 수정 2017.04.0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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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다가와 경비원의 몸을 밀치는 입주민, 출입구에서 비켜달라는 말이 불쾌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녹취> "늙은이가 귀도 먹었다는 둥 눈도 먹었다는 둥..."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주민을 제지하자, 곧바로 담뱃불을 얼굴에 갖다 댑니다.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경비원,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해도, 재계약 걱정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녹취> "어떻게든 근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수모를 참고 견디는 거죠..."

죄지은 듯 고개 숙여 밥을 먹고, 경비부터 청소, 택배 운반에 주차 대행까지.

'슈퍼맨'이 돼야 견딜 수 있는 24시간 5분 대기조의 삶, 아파트 경비원의 현주소입니다.

'아파트 공화국'.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빗댄 표현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보다 더 자주 만나고 여러 도움을 받게 되는 사람, 바로 경비원인데요.

하지만 갑질과 폭행, 갑작스런 해고 등 경비원과 관련된 논란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들려 옵니다.

많이 바꼈다곤 하지만 열악한 근무 여건 속에 경비원들은 지금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시간.

<녹취> "갈게요. (수고하셨어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박상열씨의 긴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늘도 다시 시작된 전쟁같은 출근 시간.

주차 공간이 부족해 빠듯하게 이중 주차를 해야 하는 이 아파트 경비원들에겐 가장 진땀 나는 시간입니다.

쉴새 없이 주차장을 오가며 주차한 차를 빼고 다른 자리에 주차하기를 수차례, 바쁘게 몸을 움직여 보지만 인사 대신 오히려 심한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저희는 순찰 돌고 주위 청소하고 이런 것이 주 업무지 주차 업무는 별개인데 주민들은 주차 업무를 주 업무로 생각하고 조금만 늦어도 막 야단을 치고 저도 나이가 환갑입니다. 환갑인데 그 애들 나무라듯이 막 꾸짖고..."

주민 차량은 대부분 고가의 수입차, 한 번도 운전해본 적 없는 차량과 매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백미러를 저희가 펼 줄도 몰라요. 백미러가 다 달라서 일반 국산차하고 달라서, (주차)하다 보면 큰 사고가 나는 거예요."

결국 박씨의 20년 무사고 기록은 최근 깨졌습니다.

주차를 하다 범퍼를 긁혔는데, 수리비로 400만 원을 물어줬습니다.

박씨 급여의 두 배가 넘는 돈입니다.

이 아파트에선 박 씨 처럼 주차를 하다 사고가 나 수리비를 물어준 경비원이 십여 명에 이릅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봐준다고 봐준게 뭐냐 하면 월 10만원씩 갚아라 20개월동안 그래서 사고가 작년 12월에 났는데 그 친구는 다달이 월급 받으면 10만원 씩 그 집에 갚고 있어요."

주차 전쟁이 끝나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됩니다.

경비와 순찰, 청소에 택배 업무까지.

기본적인 다른 일도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전쟁 같은 저녁 퇴근시간, 입주민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보니, 주차 마감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입니다.

법정 휴게 시간인 밤 12시 이후에도 대부분 근무를 해야 합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이건 휴게 시간이 월급(최저임금)을 맞추기 위한 휴게시간이지 일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12시가 넘어서도 근무를 안하고 초소를 떠나서 휴게실에서 쉬는게 아니고 초소에서..."

마지막 차를 주차하면, 주민이 맡겨 놓은 자동차 열쇠로 서랍이 가득 찹니다.

새벽이 돼서야 겨우 초소 한편에 마련된 간이 침대에서 다리를 펼 수 있지만 밤사이 차를 이동해야 하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 겉옷도 벗지 못한 채 근무 대기 상태를 이어갑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어떤 분은 새벽에 세시, 네시에도 차를 빼 달라고 요구가 들어왔을 때... 군대로 말하면 5분 대기조같이 신발 벗는 것 까진 허용이 되지, 양말, 제복을 벗고 수면을 취하면 안되는 거예요."

사실상 경비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주차 업무 때문에, 법으로 보장된 휴게 시간에도 근무를 이어갑니다.

길고 고단했던 하루는 이렇게 끝나 갑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그나마 이것도 안정적으로 마지막 직장 생활, 경비 생활이라도 하고 싶은데 해마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다보니 연말만 되면 계약 안 되지 않을까 항상 불안해하고 있고..."

경비원은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보루이기도 합니다.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서울의 한 아파트.

<녹취>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말 오전 아파트 지하 전기실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재빠른 대처로 주민 60여 명은 안전하게 대피한 상황, 유일한 희생자는 경비원 양명승 씨 한 명이었습니다.

<녹취> "5층에서 불 났단 소리 듣고 나왔대요. 나오니까 경비아저씨가 급하게 뛰면서 쫓아 올라오더래요 5층으로. 그러더니 좀 있다가 9층에서 쓰러졌다 그러더래요."

평소 심장 질환을 앓아 오던 양 씨는, 비상구 계단을 오르며 주민을 대피시키다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며 아파트 9층 복도에 쓰러졌고,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상천(화재 아파트 주민) : "정말 주민들하고 가깝게 지내셨던 분인데 참 열심히 일해주시고 그런 분이 이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서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주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못했던 양 씨, 대다수의 아파트 경비원들은 양 씨처럼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헌신하지만 신분은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지난해 여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 생활을 시작한 김 모씨, 영문도 모른 채 반년 간 임금의 10%를 용역 업체에 상납해 왔습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며 손에 쥔 돈은 백 이십만원 남짓, 경비 용역 업체에서 입찰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그 손해를 경비원 월급에서 충당한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김 모씨(아파트 경비원) : "최저 시급으로 계산하니까 너무 많이 차이 나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경비하는 선배한테 물어보니 그건 최저 임금 받아가지고 용역 업체에서 0.1%를 가져가고..."

그게 다 관습적으로 최저가 입찰을 하니까 업체들이 관습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봐요.

부당한 업무 지시에 지켜지지 않는 휴게 시간과 최저 임금.

그리고 당연한듯 반복되는 폭언과 갑질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는 이유.

60살 이상 고령이 대부분인 경비들이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녹취> : "항상 그만두고 싶은데 지금 나가면 다른 데 취업하기도 힘들고, 이 나이에 뭐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만 두지도 못하고..."

그나마 어렵게 지켜오던 경비 일자리마저 최근엔 무인 경비 시스템에 뺏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경비원 박 모씨도 지난해 여름, 4년 넘게 일하던 아파트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했습니다.

출입구마다 버튼식 자동문을 설치하면서 경비원이 필요 없다며 해고를 통보한 것입니다.

<인터뷰> 박모씨(해고 경비원) : "관리실에서 경비실 문을 전부 다 열쇠를 다 새로 채워버렸어요. 우리 짐도 가져가지 못하고 옷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두고 다 쫒겨나듯이, 최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인간 대우를 못 받고 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져가지고 환멸을 느낍니다."

5천 5백 세대가 사는 이 대단지 아파트도 무인 경비 시스템 도입을 추진중입니다.

단지가 큰 만큼 해고 대상 경비원만 280여 명, 언제쯤 쫓겨날지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인터뷰> 구자복(해고 예정 아파트 경비원) : "걱정이 되죠. 당연히. 그래서 직장 구하는 것도 이제 나이들이 있으니까 구하기가 수월치가 않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데 일자리를 구해야 되는데 그것도 또 마음대로 될 것 같지는 않고요."

일부 주민들도 수백 명의 경비원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성미숙(아파트 주민) : "사람 있는 거하고 없는거. 만약에 고장이 난다던지 애도 있는 집은 그것도 불편하고 이 동은 어르신들이 많이 살아요. 그래서 난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생각해요. 경비비용 한 4만원 주는거 그거 경비원들이 그 이상으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계약서상 경비 용역 업체에 간접 고용 돼 있는 구씨는, 업체에서 해고를 당하면 입주민의 의사와 상관 없이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간접 고용의 불안함에 일자리마저 줄어드는 현실, 경비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인터뷰> 김선기(민주노총 대협국장) :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거의 다 경비를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다 번호키 누르는 개념이잖아요. 순찰 그정도 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막 공급보다 수요가 더 많은 거예요. 그럼 그 자리마저도 잘릴까봐 해고될까봐 보전하는.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부당하고 억울해도) 하는 거예요."

<녹취> "이런 식으로 딱딱 붙여서...(무조건 붙여야 돼요?) 아 소복하게 하라고..."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봄 맞이 화단 재정비에 분주합니다.

대부분의 아파트에선 경비원이 하는 일이지만, 이 곳에선 2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주민과 함께 합니다.

경비원 위탁 계약서를 통상적인 '갑'과 '을' 대신 '동'과 '행'으로 용어를 바꾼 뒤, 나타난 변화입니다.

경비원을 배려하면서 주민 생활도 더 좋아지게 됐습니다.

<인터뷰> 최숙자(아파트 주민) : "혹시 저희가 재활용 분류를 제대로 잘 못하잖아요. 그러면 화내시는 법도 없고 당신이 다 나서서 해주시고 그러셔요. 그런거 보면 아 서로가 그러니까 나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서로서로 잘 해야지 잘 되는 것 같아요."

입주민의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할 수 없도록 독소 조항들도 바꿨습니다.

<인터뷰> 박영길('동행' 아파트 경비원) : "사실은 뭐 몸으로 힘든 거보다 그 정신적으로 힘들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고 그럴텐데 그런 면이 전혀 없으니까 그냥 근무에만 전념하게 되니까 그런 면이 참 (좋습니다.)"

종속적인 '갑-을' 관계 대신 배려를 통해 오히려 상생의 길을 찾은 사람들, 경비원 처우 개선은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됐습니다.

고용 불안을 부추기는 간접 고용의 고리도 끊어냈습니다.

<인터뷰> 김유선(한국노동사회 연구소) : "지금까지 무조건 남들 하니까 용역 이렇게 내보내고 했는데 과연 이게 해당 기업이나 아파트에 바람직한 것인지 재평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마지못해 일을 하는 것과 그래도 이 직장이 나름대로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직장이다. 할 때와는 경비원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생각합니다."

전국의 아파트 경비원은 모두 25만여 명 가량.

대부분 2중 3중의 갑질을 견디고 있지만 최저 임금제와 갑질금지법 등 각종 제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오늘도 아파트를 누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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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비원은 슈퍼맨?
    • 입력 2017-04-02 23:01:50
    • 수정2017-04-02 23:15:24
    취재파일K
무섭게 다가와 경비원의 몸을 밀치는 입주민, 출입구에서 비켜달라는 말이 불쾌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녹취> "늙은이가 귀도 먹었다는 둥 눈도 먹었다는 둥..."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주민을 제지하자, 곧바로 담뱃불을 얼굴에 갖다 댑니다.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경비원,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해도, 재계약 걱정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녹취> "어떻게든 근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수모를 참고 견디는 거죠..."

죄지은 듯 고개 숙여 밥을 먹고, 경비부터 청소, 택배 운반에 주차 대행까지.

'슈퍼맨'이 돼야 견딜 수 있는 24시간 5분 대기조의 삶, 아파트 경비원의 현주소입니다.

'아파트 공화국'.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빗댄 표현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보다 더 자주 만나고 여러 도움을 받게 되는 사람, 바로 경비원인데요.

하지만 갑질과 폭행, 갑작스런 해고 등 경비원과 관련된 논란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들려 옵니다.

많이 바꼈다곤 하지만 열악한 근무 여건 속에 경비원들은 지금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시간.

<녹취> "갈게요. (수고하셨어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박상열씨의 긴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늘도 다시 시작된 전쟁같은 출근 시간.

주차 공간이 부족해 빠듯하게 이중 주차를 해야 하는 이 아파트 경비원들에겐 가장 진땀 나는 시간입니다.

쉴새 없이 주차장을 오가며 주차한 차를 빼고 다른 자리에 주차하기를 수차례, 바쁘게 몸을 움직여 보지만 인사 대신 오히려 심한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저희는 순찰 돌고 주위 청소하고 이런 것이 주 업무지 주차 업무는 별개인데 주민들은 주차 업무를 주 업무로 생각하고 조금만 늦어도 막 야단을 치고 저도 나이가 환갑입니다. 환갑인데 그 애들 나무라듯이 막 꾸짖고..."

주민 차량은 대부분 고가의 수입차, 한 번도 운전해본 적 없는 차량과 매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백미러를 저희가 펼 줄도 몰라요. 백미러가 다 달라서 일반 국산차하고 달라서, (주차)하다 보면 큰 사고가 나는 거예요."

결국 박씨의 20년 무사고 기록은 최근 깨졌습니다.

주차를 하다 범퍼를 긁혔는데, 수리비로 400만 원을 물어줬습니다.

박씨 급여의 두 배가 넘는 돈입니다.

이 아파트에선 박 씨 처럼 주차를 하다 사고가 나 수리비를 물어준 경비원이 십여 명에 이릅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봐준다고 봐준게 뭐냐 하면 월 10만원씩 갚아라 20개월동안 그래서 사고가 작년 12월에 났는데 그 친구는 다달이 월급 받으면 10만원 씩 그 집에 갚고 있어요."

주차 전쟁이 끝나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됩니다.

경비와 순찰, 청소에 택배 업무까지.

기본적인 다른 일도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전쟁 같은 저녁 퇴근시간, 입주민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보니, 주차 마감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입니다.

법정 휴게 시간인 밤 12시 이후에도 대부분 근무를 해야 합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이건 휴게 시간이 월급(최저임금)을 맞추기 위한 휴게시간이지 일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12시가 넘어서도 근무를 안하고 초소를 떠나서 휴게실에서 쉬는게 아니고 초소에서..."

마지막 차를 주차하면, 주민이 맡겨 놓은 자동차 열쇠로 서랍이 가득 찹니다.

새벽이 돼서야 겨우 초소 한편에 마련된 간이 침대에서 다리를 펼 수 있지만 밤사이 차를 이동해야 하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 겉옷도 벗지 못한 채 근무 대기 상태를 이어갑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어떤 분은 새벽에 세시, 네시에도 차를 빼 달라고 요구가 들어왔을 때... 군대로 말하면 5분 대기조같이 신발 벗는 것 까진 허용이 되지, 양말, 제복을 벗고 수면을 취하면 안되는 거예요."

사실상 경비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주차 업무 때문에, 법으로 보장된 휴게 시간에도 근무를 이어갑니다.

길고 고단했던 하루는 이렇게 끝나 갑니다.

<인터뷰> 박상열(아파트 경비원) :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그나마 이것도 안정적으로 마지막 직장 생활, 경비 생활이라도 하고 싶은데 해마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다보니 연말만 되면 계약 안 되지 않을까 항상 불안해하고 있고..."

경비원은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보루이기도 합니다.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서울의 한 아파트.

<녹취>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말 오전 아파트 지하 전기실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재빠른 대처로 주민 60여 명은 안전하게 대피한 상황, 유일한 희생자는 경비원 양명승 씨 한 명이었습니다.

<녹취> "5층에서 불 났단 소리 듣고 나왔대요. 나오니까 경비아저씨가 급하게 뛰면서 쫓아 올라오더래요 5층으로. 그러더니 좀 있다가 9층에서 쓰러졌다 그러더래요."

평소 심장 질환을 앓아 오던 양 씨는, 비상구 계단을 오르며 주민을 대피시키다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며 아파트 9층 복도에 쓰러졌고,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상천(화재 아파트 주민) : "정말 주민들하고 가깝게 지내셨던 분인데 참 열심히 일해주시고 그런 분이 이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서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주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못했던 양 씨, 대다수의 아파트 경비원들은 양 씨처럼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헌신하지만 신분은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지난해 여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 생활을 시작한 김 모씨, 영문도 모른 채 반년 간 임금의 10%를 용역 업체에 상납해 왔습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며 손에 쥔 돈은 백 이십만원 남짓, 경비 용역 업체에서 입찰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그 손해를 경비원 월급에서 충당한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김 모씨(아파트 경비원) : "최저 시급으로 계산하니까 너무 많이 차이 나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경비하는 선배한테 물어보니 그건 최저 임금 받아가지고 용역 업체에서 0.1%를 가져가고..."

그게 다 관습적으로 최저가 입찰을 하니까 업체들이 관습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봐요.

부당한 업무 지시에 지켜지지 않는 휴게 시간과 최저 임금.

그리고 당연한듯 반복되는 폭언과 갑질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는 이유.

60살 이상 고령이 대부분인 경비들이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녹취> : "항상 그만두고 싶은데 지금 나가면 다른 데 취업하기도 힘들고, 이 나이에 뭐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만 두지도 못하고..."

그나마 어렵게 지켜오던 경비 일자리마저 최근엔 무인 경비 시스템에 뺏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경비원 박 모씨도 지난해 여름, 4년 넘게 일하던 아파트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했습니다.

출입구마다 버튼식 자동문을 설치하면서 경비원이 필요 없다며 해고를 통보한 것입니다.

<인터뷰> 박모씨(해고 경비원) : "관리실에서 경비실 문을 전부 다 열쇠를 다 새로 채워버렸어요. 우리 짐도 가져가지 못하고 옷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두고 다 쫒겨나듯이, 최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인간 대우를 못 받고 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져가지고 환멸을 느낍니다."

5천 5백 세대가 사는 이 대단지 아파트도 무인 경비 시스템 도입을 추진중입니다.

단지가 큰 만큼 해고 대상 경비원만 280여 명, 언제쯤 쫓겨날지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인터뷰> 구자복(해고 예정 아파트 경비원) : "걱정이 되죠. 당연히. 그래서 직장 구하는 것도 이제 나이들이 있으니까 구하기가 수월치가 않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데 일자리를 구해야 되는데 그것도 또 마음대로 될 것 같지는 않고요."

일부 주민들도 수백 명의 경비원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성미숙(아파트 주민) : "사람 있는 거하고 없는거. 만약에 고장이 난다던지 애도 있는 집은 그것도 불편하고 이 동은 어르신들이 많이 살아요. 그래서 난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생각해요. 경비비용 한 4만원 주는거 그거 경비원들이 그 이상으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계약서상 경비 용역 업체에 간접 고용 돼 있는 구씨는, 업체에서 해고를 당하면 입주민의 의사와 상관 없이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간접 고용의 불안함에 일자리마저 줄어드는 현실, 경비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인터뷰> 김선기(민주노총 대협국장) :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거의 다 경비를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다 번호키 누르는 개념이잖아요. 순찰 그정도 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막 공급보다 수요가 더 많은 거예요. 그럼 그 자리마저도 잘릴까봐 해고될까봐 보전하는.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부당하고 억울해도) 하는 거예요."

<녹취> "이런 식으로 딱딱 붙여서...(무조건 붙여야 돼요?) 아 소복하게 하라고..."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봄 맞이 화단 재정비에 분주합니다.

대부분의 아파트에선 경비원이 하는 일이지만, 이 곳에선 2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주민과 함께 합니다.

경비원 위탁 계약서를 통상적인 '갑'과 '을' 대신 '동'과 '행'으로 용어를 바꾼 뒤, 나타난 변화입니다.

경비원을 배려하면서 주민 생활도 더 좋아지게 됐습니다.

<인터뷰> 최숙자(아파트 주민) : "혹시 저희가 재활용 분류를 제대로 잘 못하잖아요. 그러면 화내시는 법도 없고 당신이 다 나서서 해주시고 그러셔요. 그런거 보면 아 서로가 그러니까 나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서로서로 잘 해야지 잘 되는 것 같아요."

입주민의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할 수 없도록 독소 조항들도 바꿨습니다.

<인터뷰> 박영길('동행' 아파트 경비원) : "사실은 뭐 몸으로 힘든 거보다 그 정신적으로 힘들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고 그럴텐데 그런 면이 전혀 없으니까 그냥 근무에만 전념하게 되니까 그런 면이 참 (좋습니다.)"

종속적인 '갑-을' 관계 대신 배려를 통해 오히려 상생의 길을 찾은 사람들, 경비원 처우 개선은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됐습니다.

고용 불안을 부추기는 간접 고용의 고리도 끊어냈습니다.

<인터뷰> 김유선(한국노동사회 연구소) : "지금까지 무조건 남들 하니까 용역 이렇게 내보내고 했는데 과연 이게 해당 기업이나 아파트에 바람직한 것인지 재평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마지못해 일을 하는 것과 그래도 이 직장이 나름대로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직장이다. 할 때와는 경비원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생각합니다."

전국의 아파트 경비원은 모두 25만여 명 가량.

대부분 2중 3중의 갑질을 견디고 있지만 최저 임금제와 갑질금지법 등 각종 제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오늘도 아파트를 누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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