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유품에 남은 전쟁의 상흔…67년 만의 귀향

입력 2017.04.12 (16:15) 수정 2017.04.1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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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죄책감이 들어. 아버지만 생각하면 울컥하고…”

정정자 할머니(72)에게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의 기억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여섯 살이었던 할머니는 집을 찾은 낯선 남성들에게 아버지가 지붕위에 숨어있다는 걸 무심코 알려주고 맙니다.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어린 아이의 작은 실수.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마다 딸을 위해 꽃을 꺾어오곤 했던, 그만큼 딸을 사랑하기에 더 징집을 피하고 싶었을 아버지 고(故) 정준원 일병은 어린 딸과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전장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정정자 할머니가 이듬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 정 일병과 재회한 건 66년이 흐른 지난 2016년. ‘여자처럼 예쁘장한 얼굴’이었던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을 짐작조차 해 볼 수 없는 차디찬 유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강춘자 할머니(68)는 아예 아버지에 대한 추억조차 없습니다. 아버지 품에 몇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강 할머니가 아버지 고 강태조 일병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불러줬던 이별가 뿐.

‘당신과 만날 때는 백년언약,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니...’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던 걸까요? 아버지 강 일병은 아내에게 이별가 한 자락을 읊조리며 불러줬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이 담긴 그 노랫말을 평생 잊지 못하고 종이에 적어 딸인 강 할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가겠소. 삼팔선을 돌파하고 백두산 봉우리에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뼛골이나 돌아오리다’

강 일병은 노랫말 그대로 뼛골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50여 년이 훌쩍 지난 2006년에야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전장을 향해 떠나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는 뜨거운 결기를 품었다 해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뼛속까지 시린 전장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전란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목숨들을 떠올리니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 하나하나를 가벼이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발굴해 온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특별전, <67년 만의 귀향>.

전시된 물건들 모두 60여 년의 사연을 품고 있었습니다.


강원 홍천 전투에서 전사한 고 장복동 일병의 이름이 쓰여진 낡은 수통. 장 일병은 이 유품이 결정적 단서가 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 일병은 그 때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전사자들의 유해 곁에서 나온 주인 모를 수많은 군용 물품들에서도 전쟁의 참상이 엿보입니다. 녹이 슬고 구멍까지 뚫린 철모. 무심하게 흘러간 세월에 원래 모습은 잃어버렸을지언정, 아픈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스러져간 이름 모를 젊은 생명의 무게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이었던 지난 2000년부터 전사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돼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지금까지 9천 500여 명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전사자는 고작 121 명뿐입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유가족의 DNA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해 아직까지 필요한 DNA의 23% 정도밖에 확보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차디찬 땅 속에 묻혀있는 국군 전사자도 12만 4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해가 발굴된 뒤에도 가족에게 인계되지 못한 전사자들까지 더하면 13만 명이 훌쩍 넘는 호국영령이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심한 세월이 어느덧 7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전쟁의 기억도 낡은 흑백사진처럼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6살 나이로 아버지와 이별했던 정정자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유골이라도 찾아서, 같은 한국 땅에 계셔서 편안하고 좋다"고 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서로를 가슴에 묻었을 전사자와 그 유가족들. 그들은 언제쯤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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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유품에 남은 전쟁의 상흔…67년 만의 귀향
    • 입력 2017-04-12 16:15:59
    • 수정2017-04-12 16:16:33
    취재후·사건후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죄책감이 들어. 아버지만 생각하면 울컥하고…” 정정자 할머니(72)에게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의 기억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여섯 살이었던 할머니는 집을 찾은 낯선 남성들에게 아버지가 지붕위에 숨어있다는 걸 무심코 알려주고 맙니다.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어린 아이의 작은 실수.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마다 딸을 위해 꽃을 꺾어오곤 했던, 그만큼 딸을 사랑하기에 더 징집을 피하고 싶었을 아버지 고(故) 정준원 일병은 어린 딸과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전장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정정자 할머니가 이듬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 정 일병과 재회한 건 66년이 흐른 지난 2016년. ‘여자처럼 예쁘장한 얼굴’이었던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을 짐작조차 해 볼 수 없는 차디찬 유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강춘자 할머니(68)는 아예 아버지에 대한 추억조차 없습니다. 아버지 품에 몇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강 할머니가 아버지 고 강태조 일병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불러줬던 이별가 뿐. ‘당신과 만날 때는 백년언약,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니...’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던 걸까요? 아버지 강 일병은 아내에게 이별가 한 자락을 읊조리며 불러줬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이 담긴 그 노랫말을 평생 잊지 못하고 종이에 적어 딸인 강 할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가겠소. 삼팔선을 돌파하고 백두산 봉우리에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뼛골이나 돌아오리다’ 강 일병은 노랫말 그대로 뼛골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50여 년이 훌쩍 지난 2006년에야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전장을 향해 떠나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는 뜨거운 결기를 품었다 해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뼛속까지 시린 전장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전란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목숨들을 떠올리니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 하나하나를 가벼이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발굴해 온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특별전, <67년 만의 귀향>. 전시된 물건들 모두 60여 년의 사연을 품고 있었습니다. 강원 홍천 전투에서 전사한 고 장복동 일병의 이름이 쓰여진 낡은 수통. 장 일병은 이 유품이 결정적 단서가 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 일병은 그 때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전사자들의 유해 곁에서 나온 주인 모를 수많은 군용 물품들에서도 전쟁의 참상이 엿보입니다. 녹이 슬고 구멍까지 뚫린 철모. 무심하게 흘러간 세월에 원래 모습은 잃어버렸을지언정, 아픈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스러져간 이름 모를 젊은 생명의 무게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이었던 지난 2000년부터 전사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돼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지금까지 9천 500여 명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전사자는 고작 121 명뿐입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유가족의 DNA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해 아직까지 필요한 DNA의 23% 정도밖에 확보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차디찬 땅 속에 묻혀있는 국군 전사자도 12만 4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해가 발굴된 뒤에도 가족에게 인계되지 못한 전사자들까지 더하면 13만 명이 훌쩍 넘는 호국영령이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심한 세월이 어느덧 7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전쟁의 기억도 낡은 흑백사진처럼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6살 나이로 아버지와 이별했던 정정자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유골이라도 찾아서, 같은 한국 땅에 계셔서 편안하고 좋다"고 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서로를 가슴에 묻었을 전사자와 그 유가족들. 그들은 언제쯤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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