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위안부 합의 최종적 결론 아니다”…문서 숨긴 日

입력 2017.04.1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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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한 일본 해군 헌병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현지 주민에 대한 폭행 등 10여 건의 죄목으로 기소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진행된 B, C급 전범 재판에 넘겨져, 징역 1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재판과 끝난 15년 뒤인 1962년 이 전범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일본 법무성 소속의 조사자, 이름은 토모다였다. 그의 일은 재판을 받은 전범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해 당시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는 일이었다. 도쿄 재판에서 전범들을 상대로 기소와 공소유지를 담당했던 일본 법무성이 진행하는 작업이었다.

"위안부 200명을 데리고 갔다"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

이미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한 헌병 조장은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들킬까)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건 위안부 사건이었다.", "현지인 70명을 (위안부로) 발리에 데리고 들어온 건이 있다...그 외에도 전쟁 중 약 4년간 200명의 부녀자를 위안부로 오쿠야마 부대의 명에 따라 발리에 데리고 들어갔다"


일본 해군 소속. 위안부 동원에 앞장 선 것으로 알려진 헌병대의 조장이 남긴 증언이었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나는 종전 후 군수부, 시설부와 강하게 담판을 짓고 약 70만 엔을 본 건의 공작비로 받아 각 촌장들을 통해 주민들 공작에 사용했다. 그것이 완전히 효과가 있었다고 보여, 가장 걱정했던 위안부 건은 한 건도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부대의 명령 계통에 의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고, 이를 죄로 인식해 은폐하기 위해 군 자금을 사용해 입막음을 했다는 증언이었다.

일본 정부, 위안부 기록을 '기밀'로 분류하다.

당시 일본 법무성은 전범들을 조사한 기록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후폭풍이 두려웠을까. 일본군이 벌인 전쟁의 추악함이 담긴 이 문서집은 '기밀'로 분류돼 일반 공개가 금지됐다.

그리고 반세기를 넘겨 이 문서집의 존재는 어이없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도쿄의 유명한 중고, 고서적 거리인 '진보쵸'에 이 문서집이 모습을 드런 낸 것. '진보쵸'에서는 관에서 발간한 각종 백서와 잡지, 관보까지 유통되는데 전범들의 조사한 법무성 문건집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진보쵸'까지 흘러들면서 그 존재가 공개됐다.

그리고 이 전범 조사집은 일본이 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진다.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자료는 있으나, 공식 문서로 인정않는 일본 정부

위 일본 헌병의 위안부 관련 증언은 200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간토대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에 의해 발굴됐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관련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자료.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문서의 존재가 알려지고 학계와 시민단체 등을 통해 '위안부 강제 동원' 입증 자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 숱하게 제기됐음에도 이를 공식 문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최초로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할 당시 진상 조사를 위해 위안부 관련 자료는 정부 내 내각 관방실에서 인정한 자료만 공식 문서로 삼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정부가 인정한 공문서가 아니면 자료가 존재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구조다.

이런 체계 때문에 해군 헌병의 위안부 증언 자료는 10년 전 발굴됐지만, 일본 정부가 공식 문서로 인정하지 않아 그냥 재야의, 학계의 자료로서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지난 2월에서야 일본 정부는 이를 공식 문서로 뒤늦게 인정하고는 법무성에서 내각 관방으로 관련 자료가 제출된다. 같은 정부 내 기관이 조사하고 국립공무서관에 보관된 문서였지만, 50년이 흐른 뒤에야 마지못해 일본 정부가 자료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왜 그럴까. 교도통신은 이번 자료에 대해 내각관방이 "군인이 매춘을 강요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개별 자료의 평가는 하지 않고 있다. 전체로 보면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결론이 아닙니다"

이 문서를 발굴한 하야시 교수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의 관련성에 주목하며 이같이 말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것은 2015년 12월입니다. 당시에는 이 자료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위안부 강제 동원을 입증할 자료가 당시 협상 과정에 반영되지 않은 겁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가 담긴,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을 발굴한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가 담긴,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을 발굴한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

여성의 평화와 전쟁 자료관 홈페이지(http://wam-peace.org)에는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위안부 관련 자료 400여 건이 올라와 있다. 해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자료는 521건. 공식 인정된 자료만큼이나,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다. 재판기록, 군 보고서 등 모두 공적 자료들이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 관련 공문서'로 인증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무엇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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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위안부 합의 최종적 결론 아니다”…문서 숨긴 日
    • 입력 2017-04-18 18:07:36
    특파원 리포트
태평양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한 일본 해군 헌병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현지 주민에 대한 폭행 등 10여 건의 죄목으로 기소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진행된 B, C급 전범 재판에 넘겨져, 징역 1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재판과 끝난 15년 뒤인 1962년 이 전범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일본 법무성 소속의 조사자, 이름은 토모다였다. 그의 일은 재판을 받은 전범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해 당시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는 일이었다. 도쿄 재판에서 전범들을 상대로 기소와 공소유지를 담당했던 일본 법무성이 진행하는 작업이었다.

"위안부 200명을 데리고 갔다"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
이미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한 헌병 조장은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들킬까)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건 위안부 사건이었다.", "현지인 70명을 (위안부로) 발리에 데리고 들어온 건이 있다...그 외에도 전쟁 중 약 4년간 200명의 부녀자를 위안부로 오쿠야마 부대의 명에 따라 발리에 데리고 들어갔다"


일본 해군 소속. 위안부 동원에 앞장 선 것으로 알려진 헌병대의 조장이 남긴 증언이었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나는 종전 후 군수부, 시설부와 강하게 담판을 짓고 약 70만 엔을 본 건의 공작비로 받아 각 촌장들을 통해 주민들 공작에 사용했다. 그것이 완전히 효과가 있었다고 보여, 가장 걱정했던 위안부 건은 한 건도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부대의 명령 계통에 의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고, 이를 죄로 인식해 은폐하기 위해 군 자금을 사용해 입막음을 했다는 증언이었다.

일본 정부, 위안부 기록을 '기밀'로 분류하다.

당시 일본 법무성은 전범들을 조사한 기록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후폭풍이 두려웠을까. 일본군이 벌인 전쟁의 추악함이 담긴 이 문서집은 '기밀'로 분류돼 일반 공개가 금지됐다.

그리고 반세기를 넘겨 이 문서집의 존재는 어이없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도쿄의 유명한 중고, 고서적 거리인 '진보쵸'에 이 문서집이 모습을 드런 낸 것. '진보쵸'에서는 관에서 발간한 각종 백서와 잡지, 관보까지 유통되는데 전범들의 조사한 법무성 문건집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진보쵸'까지 흘러들면서 그 존재가 공개됐다.

그리고 이 전범 조사집은 일본이 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진다.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자료는 있으나, 공식 문서로 인정않는 일본 정부

위 일본 헌병의 위안부 관련 증언은 200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간토대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에 의해 발굴됐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관련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자료.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문서의 존재가 알려지고 학계와 시민단체 등을 통해 '위안부 강제 동원' 입증 자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 숱하게 제기됐음에도 이를 공식 문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최초로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할 당시 진상 조사를 위해 위안부 관련 자료는 정부 내 내각 관방실에서 인정한 자료만 공식 문서로 삼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정부가 인정한 공문서가 아니면 자료가 존재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구조다.

이런 체계 때문에 해군 헌병의 위안부 증언 자료는 10년 전 발굴됐지만, 일본 정부가 공식 문서로 인정하지 않아 그냥 재야의, 학계의 자료로서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지난 2월에서야 일본 정부는 이를 공식 문서로 뒤늦게 인정하고는 법무성에서 내각 관방으로 관련 자료가 제출된다. 같은 정부 내 기관이 조사하고 국립공무서관에 보관된 문서였지만, 50년이 흐른 뒤에야 마지못해 일본 정부가 자료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왜 그럴까. 교도통신은 이번 자료에 대해 내각관방이 "군인이 매춘을 강요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개별 자료의 평가는 하지 않고 있다. 전체로 보면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결론이 아닙니다"

이 문서를 발굴한 하야시 교수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의 관련성에 주목하며 이같이 말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것은 2015년 12월입니다. 당시에는 이 자료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위안부 강제 동원을 입증할 자료가 당시 협상 과정에 반영되지 않은 겁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가 담긴, 일 법무성의 ‘해군헌병’ 조사 문건을 발굴한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
여성의 평화와 전쟁 자료관 홈페이지(http://wam-peace.org)에는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위안부 관련 자료 400여 건이 올라와 있다. 해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자료는 521건. 공식 인정된 자료만큼이나,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다. 재판기록, 군 보고서 등 모두 공적 자료들이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 관련 공문서'로 인증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무엇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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