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발명자는 이순신 장군?…거북선의 진실

입력 2017.04.21 (08:03) 수정 2017.04.2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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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거북선이 떠오른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발명한 것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처음 발명하지도 않았고, 전투 시에도 거북선에 타지도 않았다.


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0여 년 전인 조선 태종 때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귀선(龜船)이 바로 거북선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더욱 발전시켜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또 거북선은 돌격선이라 시야 확보가 불가능해 전쟁 중 지휘를 해야하는 이순신 장군이 탈 수 없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혹은 잘못 알고 있던 거북선의 진실은 무엇일까.



일제의 ‘이순신 지우기’ 혈안

일제강점기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줬다. '지금은 비록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것처럼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순신 흔적 지우기'에 혈안이 됐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후임 통제사(統制使)가 이순신 장군을 기리며 세운 객사인 진남관을 훼손해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사가 담긴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統制李公水軍大捷碑)를 반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핍박에도 이순신 대첩비는 무사히 여수로 돌아온다. 대첩비는 누가 언제 반출했을까. 반출된 대첩비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다시 여수로 돌아오게 됐을까.

이순신 장군, 한 달이면 충분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계략과 그를 시기하던 국왕, 신료들의 모함으로 파직된다.


해임된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됐다. 하지만 원균은 그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에게 대패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선 조정은 다급히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8월 3일 선조로부터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을 내려주는 문서,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 재건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내륙과 연안 일대를 돌며 부족한 병력과 군량을 확충해나갔다.

전남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역인 울돌목에서 명량해전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전남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역인 울돌목에서 명량해전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13척 배로 133척 일본 배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에게 조선과 백성을 지키는 데에는 한 달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재임명부터 명량대첩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수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까. 자세한 내용은 4월 22일(토) 밤 8시 KBS 1TV '역사기행 그곳-승부사의 길, 여수*보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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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북선 발명자는 이순신 장군?…거북선의 진실
    • 입력 2017-04-21 08:03:59
    • 수정2017-04-21 08:04:29
    방송·연예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거북선이 떠오른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발명한 것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처음 발명하지도 않았고, 전투 시에도 거북선에 타지도 않았다. 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0여 년 전인 조선 태종 때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귀선(龜船)이 바로 거북선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더욱 발전시켜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또 거북선은 돌격선이라 시야 확보가 불가능해 전쟁 중 지휘를 해야하는 이순신 장군이 탈 수 없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혹은 잘못 알고 있던 거북선의 진실은 무엇일까.
일제의 ‘이순신 지우기’ 혈안 일제강점기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줬다. '지금은 비록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것처럼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순신 흔적 지우기'에 혈안이 됐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후임 통제사(統制使)가 이순신 장군을 기리며 세운 객사인 진남관을 훼손해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사가 담긴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統制李公水軍大捷碑)를 반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핍박에도 이순신 대첩비는 무사히 여수로 돌아온다. 대첩비는 누가 언제 반출했을까. 반출된 대첩비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다시 여수로 돌아오게 됐을까. 이순신 장군, 한 달이면 충분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계략과 그를 시기하던 국왕, 신료들의 모함으로 파직된다. 해임된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됐다. 하지만 원균은 그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에게 대패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선 조정은 다급히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8월 3일 선조로부터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을 내려주는 문서,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 재건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내륙과 연안 일대를 돌며 부족한 병력과 군량을 확충해나갔다. 전남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역인 울돌목에서 명량해전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13척 배로 133척 일본 배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에게 조선과 백성을 지키는 데에는 한 달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재임명부터 명량대첩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수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까. 자세한 내용은 4월 22일(토) 밤 8시 KBS 1TV '역사기행 그곳-승부사의 길, 여수*보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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