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330년 전 국토 최전선 화포 ‘불랑기’ 발굴

입력 2017.04.27 (10:55) 수정 2017.04.2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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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건평돈대 모습 - 바다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해안가 요충지에 설치됐다.강화도 건평돈대 모습 - 바다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해안가 요충지에 설치됐다.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탁 트인 바다 풍경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지만, 사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흔적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해안도로 바로 옆 산 절벽에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 유수 윤이제가 왕명에 따라 축조한 군사 방위시설 ‘건평돈대(乾坪墩臺)’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로 36m, 세로 26m, 둘레 120여 m의 작은 장방형 성곽. 이 건평돈대 발굴조사 과정에서 얼마 전 화포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불랑기 불랑기


이름하여 불랑기(佛狼機). 1m 길이의 모양도, 이름도 낯선 이 화포는 16세기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서양식 화포입니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유럽인들을 ‘프랑크’라고 불렀는데, 이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불랑기’가 화포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합니다.

KBS 드라마 <징비록> 에서 갈무리한 화면 - 불랑기는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전투때 사용됐다.KBS 드라마 <징비록> 에서 갈무리한 화면 - 불랑기는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전투때 사용됐다.


낯설기만한 이름이지만, 사실 불랑기는 조선의 국난때마다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1593년의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었고, 이후로도 조선 군대의 주력 무기 중 하나로 자리잡아 신미양요 등 굵직한 전투에서 쓰였습니다. 이전의 화포와는 달리 연사까지 가능한 우수한 성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불랑기가 강화 건평돈대에서 발견된 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발굴 전에 불랑기 12문이 이미 확인됐지만, 실제로 전투를 위해 배치됐던 장소에서 출토된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에는 무기를 제조하던 관청 터에서 발견되거나 혹은 소장인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무기가 그야말로 무기로 쓰였던 장소에서 발견된 겁니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김성이 학예연구사는 ‘유물의 가치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연대와 사용처, 출토지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불랑기는 이 조건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건평돈대에 남아있는 포좌. 불랑기가 발견된 지점은 이 포좌가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건평돈대에 남아있는 포좌. 불랑기가 발견된 지점은 이 포좌가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불랑기가 발견된 곳은 무너진 돈대의 성벽 돌더미 아래였습니다. 돈대에는 바깥을 향해 화포를 설치하는 ‘포좌’라는 일종의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포좌가 무너진 곳에서 불랑기가 출토됐습니다. 발굴된 건 불랑기의 몸체 부분인 모포(母砲)입니다. 화약을 넣는 부분인 자포(子砲)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37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변색된 몸체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지만, 하단부에 새겨진 명문은 비교적 뚜렷이 읽힙니다.

<康熙十九年 二月 日 統制使全等江都墩(皇)上佛狼機百十五 重百斤 監鑄軍官 折衝 申淸 前推管 崔以厚 前萬戶 姜俊 匠人 千守仁>

<1680년(숙종 6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도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60Kg)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불랑기에 제조년월과 무게, 수량은 물론이거니와 관리 감독자의 이름까지 이렇게 상세하게 적혀있는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천 6백년대 조선의 국방사와 무기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서 미군이 찍은 사진. 불랑기 모습이 보인다.신미양요 때 초지진에서 미군이 찍은 사진. 불랑기 모습이 보인다.


강화도는 조선의 국난을 함께한 지역입니다. 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때는 왕가의 피난처로도 쓰였습니다. 전란을 겪으며 조선 왕실에서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 실감하게 됐고, 숙종때는 군사 방위시설 돈대(墩臺)만 40여 곳이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도 외적의 침입도 입어, 신미양요때는 강화 초지진에서 미군과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인천광역시는 강화도의 돈대를 비롯한 관방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중입니다. 이번에 건평돈대에서 불랑기가 출토된 것에 힘입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업이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적 격전지에서 발굴된 조선의 화포. 330여년 전 사용된 빛바랜 무기일 뿐이지만, 그 가치는 시간과 함께 오히려 더 커진듯합니다.

[연관기사] [뉴스9] 330년 전 국토 최전선 화포 ‘불랑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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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330년 전 국토 최전선 화포 ‘불랑기’ 발굴
    • 입력 2017-04-27 10:55:10
    • 수정2017-04-27 11:31:17
    취재후·사건후
강화도 건평돈대 모습 - 바다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해안가 요충지에 설치됐다.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탁 트인 바다 풍경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지만, 사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흔적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해안도로 바로 옆 산 절벽에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 유수 윤이제가 왕명에 따라 축조한 군사 방위시설 ‘건평돈대(乾坪墩臺)’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로 36m, 세로 26m, 둘레 120여 m의 작은 장방형 성곽. 이 건평돈대 발굴조사 과정에서 얼마 전 화포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불랑기 이름하여 불랑기(佛狼機). 1m 길이의 모양도, 이름도 낯선 이 화포는 16세기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서양식 화포입니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유럽인들을 ‘프랑크’라고 불렀는데, 이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불랑기’가 화포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합니다. KBS 드라마 <징비록> 에서 갈무리한 화면 - 불랑기는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전투때 사용됐다. 낯설기만한 이름이지만, 사실 불랑기는 조선의 국난때마다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1593년의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었고, 이후로도 조선 군대의 주력 무기 중 하나로 자리잡아 신미양요 등 굵직한 전투에서 쓰였습니다. 이전의 화포와는 달리 연사까지 가능한 우수한 성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불랑기가 강화 건평돈대에서 발견된 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발굴 전에 불랑기 12문이 이미 확인됐지만, 실제로 전투를 위해 배치됐던 장소에서 출토된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에는 무기를 제조하던 관청 터에서 발견되거나 혹은 소장인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무기가 그야말로 무기로 쓰였던 장소에서 발견된 겁니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김성이 학예연구사는 ‘유물의 가치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연대와 사용처, 출토지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불랑기는 이 조건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건평돈대에 남아있는 포좌. 불랑기가 발견된 지점은 이 포좌가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불랑기가 발견된 곳은 무너진 돈대의 성벽 돌더미 아래였습니다. 돈대에는 바깥을 향해 화포를 설치하는 ‘포좌’라는 일종의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포좌가 무너진 곳에서 불랑기가 출토됐습니다. 발굴된 건 불랑기의 몸체 부분인 모포(母砲)입니다. 화약을 넣는 부분인 자포(子砲)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37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변색된 몸체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지만, 하단부에 새겨진 명문은 비교적 뚜렷이 읽힙니다. <康熙十九年 二月 日 統制使全等江都墩(皇)上佛狼機百十五 重百斤 監鑄軍官 折衝 申淸 前推管 崔以厚 前萬戶 姜俊 匠人 千守仁> <1680년(숙종 6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 등이 강도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60Kg)이다. 감주군관 절충장군 신청, 전추관 최이후, 전만호 강준, 장인 천수인> 불랑기에 제조년월과 무게, 수량은 물론이거니와 관리 감독자의 이름까지 이렇게 상세하게 적혀있는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천 6백년대 조선의 국방사와 무기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서 미군이 찍은 사진. 불랑기 모습이 보인다. 강화도는 조선의 국난을 함께한 지역입니다. 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때는 왕가의 피난처로도 쓰였습니다. 전란을 겪으며 조선 왕실에서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 실감하게 됐고, 숙종때는 군사 방위시설 돈대(墩臺)만 40여 곳이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도 외적의 침입도 입어, 신미양요때는 강화 초지진에서 미군과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인천광역시는 강화도의 돈대를 비롯한 관방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중입니다. 이번에 건평돈대에서 불랑기가 출토된 것에 힘입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업이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적 격전지에서 발굴된 조선의 화포. 330여년 전 사용된 빛바랜 무기일 뿐이지만, 그 가치는 시간과 함께 오히려 더 커진듯합니다. [연관기사] [뉴스9] 330년 전 국토 최전선 화포 ‘불랑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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