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죠? 아빠는 배꽃이 무섭대요”

입력 2017.04.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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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민아의 아빠는 농부다. 올해로 8년째 배 농사를 짓고 있는 임선국(36) 씨다.

1년에 단 일주일, 드디어 배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지마다 팝콘처럼 터지는 흰 배꽃들. 그림 같은 정경인데 민아 아빠에게는 두렵기만 하다.

배꽃이 피면 과수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부모님 때부터 배 농사를 짓는 통에 어린 시절, 어린이날은 물론 친구들과 놀 시간마저 빼앗아갔던 배 밭이다. 그래서 배도, 배꽃도 싫었다. 그런데 죽어도 농사는 짓지 않겠다던 선국 씨가 배 밭으로 돌아왔다. 물론 온 가족과 함께다.


애써 지은 배가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판로를 개척해보겠다 큰소리를 쳤는데, 농사일이 만만치 않다. 농기계는 내 말만 안 듣는 것 같고, 왜 중요한 날에는 꼭 비가 오는지. 농사의 '밀당'에 선국 씨는 정신이 없는데, 여기 농사일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

“인정 받는 농부, 좋은 아빠 쉽지 않네요”

그가 농사일보다 더 어려워하는 건 선국 씨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아버지 임관채(63) 씨다. 자칭 농기계 마스터, 혼자서 밭 세 개는 거뜬한 현역 농사꾼이다. 40년간 새벽이슬 맞으며 밭을 일궈 두 아들을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큰 아들은 공무원이, 둘째 아들은 가업을 잇는 농부가 되기 원했는데, 엉뚱한 녀석이 들어왔다.


성격이 불같은 두 남자가 배 밭에서 만났으니, 가족들 예상대로 매일이 전쟁이다. 인부 출근 시간을 정하는 것으로도 분위기는 살얼음판. 관채 씨는 아들을 밭으로 보내고도 못 미더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와 감시한다. 자로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하건만, 가족들과 꽃놀이를 가겠다는 아들이 탐탁지 않다.


오늘도 5살, 7개월 두 아이를 업고 배 밭으로 향하는 선국 씨. 인정받는 농부도 되고 싶고, 좋은 아빠도 되고 싶은데, 그 길이 영 쉽지 않다.

농부의 아내로, 맏며느리로…캐나다 출신 에린의 삶

남편 때문에 덩달아 에린 진 오라일리(36) 씨도 농부의 아내로 살고 있다. 8년 전, 캐나다에서 올 때만 해도 농부의 아내나 맏며느리의 삶은 상상하지 못했다.

요즘 에린은 이곳 생활에 적응 중이다. 휴일에도 밭으로 향하는 남편에게 서운할 만도 한데, 도리어 서툰 솜씨로 김밥까지 말아주고, 홀로 아들의 6개월 사진 찍는 일도 거뜬히 해낸다.

한국 생활 8년, 영어 강사로 일할 때는 한국어를 쓸 기회가 없었고, 두 아이를 기르면서는 육아에 지쳐 한국어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여기에 걸쭉한 사투리까지 더해지니, 시댁에 가면 눈치부터 장전하고 모르는 말에는 일단 미소로 답하고 본다.


그래도 시할머니 정순금(84) 씨와 시어머니 강선임(59) 씨는 일손이라도 돕겠다는 며느리가 그저 예쁘기만 해 반찬 만드는 법부터 하나하나 일러준다.

배꽃 필 무렵

바야흐로 배꽃의 계절, 과수원 가득 하얀 배꽃이 만발했다.

배 농사는 사람 손으로 수만 송이 배꽃에 일일이 꽃가루를 묻혀야 한다. 짧은 수정 작업 기간에 비라도 내리면 안 되기에 선국 씨는 분주해진다. 후드득 쏟아지는 빗줄기로 배 밭에 빨간불이 켜졌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까지, 무려 삼대에 걸쳐 내려온 과수원. 다섯 살이던 선국 씨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배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나무가 자라고, 아이는 농부가 됐다.


무르익은 봄날, 선국 씨는 임민아(5)와 임노아(7개월), 두 아이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는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이겨내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배나무처럼, 두 아이도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극장-배꽃 필 무렵'은 5월 1일(월)~5일(금) 오전 7시 50분 KBS 1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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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하죠? 아빠는 배꽃이 무섭대요”
    • 입력 2017-04-28 15:17:24
    방송·연예
5살 민아의 아빠는 농부다. 올해로 8년째 배 농사를 짓고 있는 임선국(36) 씨다.

1년에 단 일주일, 드디어 배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지마다 팝콘처럼 터지는 흰 배꽃들. 그림 같은 정경인데 민아 아빠에게는 두렵기만 하다.

배꽃이 피면 과수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부모님 때부터 배 농사를 짓는 통에 어린 시절, 어린이날은 물론 친구들과 놀 시간마저 빼앗아갔던 배 밭이다. 그래서 배도, 배꽃도 싫었다. 그런데 죽어도 농사는 짓지 않겠다던 선국 씨가 배 밭으로 돌아왔다. 물론 온 가족과 함께다.


애써 지은 배가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판로를 개척해보겠다 큰소리를 쳤는데, 농사일이 만만치 않다. 농기계는 내 말만 안 듣는 것 같고, 왜 중요한 날에는 꼭 비가 오는지. 농사의 '밀당'에 선국 씨는 정신이 없는데, 여기 농사일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

“인정 받는 농부, 좋은 아빠 쉽지 않네요”

그가 농사일보다 더 어려워하는 건 선국 씨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아버지 임관채(63) 씨다. 자칭 농기계 마스터, 혼자서 밭 세 개는 거뜬한 현역 농사꾼이다. 40년간 새벽이슬 맞으며 밭을 일궈 두 아들을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큰 아들은 공무원이, 둘째 아들은 가업을 잇는 농부가 되기 원했는데, 엉뚱한 녀석이 들어왔다.


성격이 불같은 두 남자가 배 밭에서 만났으니, 가족들 예상대로 매일이 전쟁이다. 인부 출근 시간을 정하는 것으로도 분위기는 살얼음판. 관채 씨는 아들을 밭으로 보내고도 못 미더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와 감시한다. 자로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하건만, 가족들과 꽃놀이를 가겠다는 아들이 탐탁지 않다.


오늘도 5살, 7개월 두 아이를 업고 배 밭으로 향하는 선국 씨. 인정받는 농부도 되고 싶고, 좋은 아빠도 되고 싶은데, 그 길이 영 쉽지 않다.

농부의 아내로, 맏며느리로…캐나다 출신 에린의 삶

남편 때문에 덩달아 에린 진 오라일리(36) 씨도 농부의 아내로 살고 있다. 8년 전, 캐나다에서 올 때만 해도 농부의 아내나 맏며느리의 삶은 상상하지 못했다.

요즘 에린은 이곳 생활에 적응 중이다. 휴일에도 밭으로 향하는 남편에게 서운할 만도 한데, 도리어 서툰 솜씨로 김밥까지 말아주고, 홀로 아들의 6개월 사진 찍는 일도 거뜬히 해낸다.

한국 생활 8년, 영어 강사로 일할 때는 한국어를 쓸 기회가 없었고, 두 아이를 기르면서는 육아에 지쳐 한국어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여기에 걸쭉한 사투리까지 더해지니, 시댁에 가면 눈치부터 장전하고 모르는 말에는 일단 미소로 답하고 본다.


그래도 시할머니 정순금(84) 씨와 시어머니 강선임(59) 씨는 일손이라도 돕겠다는 며느리가 그저 예쁘기만 해 반찬 만드는 법부터 하나하나 일러준다.

배꽃 필 무렵

바야흐로 배꽃의 계절, 과수원 가득 하얀 배꽃이 만발했다.

배 농사는 사람 손으로 수만 송이 배꽃에 일일이 꽃가루를 묻혀야 한다. 짧은 수정 작업 기간에 비라도 내리면 안 되기에 선국 씨는 분주해진다. 후드득 쏟아지는 빗줄기로 배 밭에 빨간불이 켜졌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까지, 무려 삼대에 걸쳐 내려온 과수원. 다섯 살이던 선국 씨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배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나무가 자라고, 아이는 농부가 됐다.


무르익은 봄날, 선국 씨는 임민아(5)와 임노아(7개월), 두 아이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는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이겨내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배나무처럼, 두 아이도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극장-배꽃 필 무렵'은 5월 1일(월)~5일(금) 오전 7시 50분 KBS 1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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