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입력 2017.04.30 (23:27) 수정 2017.04.3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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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처참하게 유린당할 때,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왜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 47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후손들은 충무공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혼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입니다.

호국의 성지이자 항일의 구심점인 현충사는 과연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현충사의 현주소를 들여다 봤습니다.

현충사 정문을 지나 앞으로 곧장 걸어 올라가면, 커다란 붉은 문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능이나 묘, 사당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입니다.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예로부터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나무 같지만 '시멘트'입니다.

곳곳에 시멘트를 덧바른 흔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하고 운치 있는 한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았던 유서 깊은 집입니다.

벽이며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았습니다.

부서져 떨어져 나간 곳들도 그대로 방치돼 있습니다.

황토 대신 시멘트로 메운 이름뿐인 이순신 옛집인 겁니다.

<인터뷰> 박소영(서울시 강동구) : "보기는 안 좋네요. 이렇게 시멘트로 원래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도 미관상이라든지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을 때 더 좋은 것 같아요."

1968년 현충사에선 대대적인 성역화 공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무로 복원됐어야 할 주요 건물들이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졌습니다.

그 뒤로 반 세기.

현충사는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에 갇혀 있습니다.

<인터뷰> 김준혁(한신대 교수) : "거대한 시멘트 건물로 만들어진 전혀 이질적인, 겉모습은 우리의 옛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 전혀 우리의 모습이 아닌 그런 공간이 바로 현충사죠."

진작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던 문화재청.

이제야 단계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을 목조로 바꿔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 지금 사당 앞에 있는 홍살문 같은 경우도 시멘트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들도 고쳐나갈 계획이 있고, 그런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충사를 찾은 사람들이 사당에 예를 올립니다.

참배객들을 맞는 건 사당 안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이 영정을 그린 화가는, 근대 한국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월전 장우성 화백입니다.

하지만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

때문에 표준영정을 바꾸자는 요구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관복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점.

영정 전문가를 찾아가 면밀하게 고증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영정만 20년 가까이 연구하며 국내 최고의 영정 화가로 꼽히는 권오창 화백.

전국의 박물관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16세기 무신 권응수 장군의 초상을 찾았습니다.

두 초상의 옷차림을 비교해 봤습니다.

먼저, 머리에 쓰는 관모.

16세기 초상화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관모가 훨씬 더 높고, 관모와 이마의 경계선도 이순신 영정 쪽이 훨씬 둥급니다.

다음은 목의 깃 부분.

권응수 초상은 목의 깃이 얕아 목 가까이 바짝 붙어 있지만, 이순신 초상은 목의 깃이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번엔 소매.

권응수 초상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소매는 아래로 흘러내릴 만큼 품이 넓습니다.

다음은 '흉배'라 불리는 가슴 장식.

당시 같은 종 2품 무관이었던 권응수 초상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만 그려져 있는데, 이순신 영정은 좌우로 두 마리.

조선시대 흉배 가운데 호랑이를 좌우로 배치한 사례는 없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어디를 봐도 조선 말기에 봐도 두 마리가 이렇게 돼 있는 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문헌이라든가 유물이라도 발견됐으면 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렸구나 하겠는데 어디를 봐도 그런 거는 못 봤거든요."

실제로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영정 속 얼굴이 실제와 다르다는 이의가 받아들여져 2006년 다른 그림으로 교체됐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복식이 맞아야 시대상을 알고 당대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그게 미흡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해서 그리고 고증을 확인하고 하는 절차가 필요한 게 바로 표준영정 제작이거든요. (바꿔야 되는 거죠?) 네, 바꿔야 됩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면 사당 건물 양쪽에 솥 모양의 장식물이 보입니다.

'정'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은 정통 왕조,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장식물입니다.

때문에 궁궐 가운데서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두 곳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궐 유물이 왜 사당 앞에 있는 걸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최초 설치 시기라든가 그게 왜 설치됐는지 경위라든가 이런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저희들이 확인을 못 했는데요. 현충사 연혁지 자료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1967년 4월경에 현재 위치에 설치돼 있는 걸로 나타나고 있어요."

현충사에선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 때 이곳에 향을 피웁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정은 국권,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현충사엔 맞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녹취> 궁궐 의례 전문가(음성변조) : "향로는 한 개를 놔야 되지 않습니까. 향로로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예법이 발달했던 조선시대 때 그런 사례가 없잖아요."

현충사는 한때 곳곳에 얼룩진 일제 잔재로도 신음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현충사 연못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교토의 니노마루 연못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현충사 연못은 마침내 올해 반듯한 우리 연못으로 복원됐습니다.

하지만 일제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현충사 사당 왼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일본을 대표하는 '금송'입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이 나무는 조선총독부 관저를 건립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총독 관저 건립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청와대에 계속 살아 있었던 그 나무를 현충사를 지으면서 이곳에 이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연못은 바꾸라고 한 문화재위원회가 유독 금송만은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모두 제자리에 두라고 결정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심어 시대성과 역사성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금송 이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건 지난 1991년.

당시 현충사를 찾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재청이 금송을 사당 밖으로 옮긴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은 금송을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으로 분류까지 해놓고 왜 옮기지 않았을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그 당시는 문화재 관리국 시절인데 예산확보가 안 됐어요. 그때 외래수종 다 정비하는 데 한 20여억 원, 21억 정도 되는데요. 그때 예산 확보가 안 되다보니까 정비가 안 됐고."

이후 위치만이라도 옮기자는 요구가 계속됐지만 문화재 당국은 여전히 묵묵부답.

현충사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7백 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항일 유적지 칠백의총.

이곳에도 사당 바로 옆에 버젓이 금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항일 유적지 곁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 박상진(나무 고고학자/경북대 명예교수) : "위치만 조금 옮기면 기념식수라는 의미도 살릴 수 있고 또 현충사가 갖고 있는 뜻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올해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 호국의 성지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를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 명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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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 입력 2017-04-30 23:39:25
    • 수정2017-04-30 23:54:47
    취재파일K
왜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처참하게 유린당할 때,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왜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 47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후손들은 충무공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혼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입니다.

호국의 성지이자 항일의 구심점인 현충사는 과연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현충사의 현주소를 들여다 봤습니다.

현충사 정문을 지나 앞으로 곧장 걸어 올라가면, 커다란 붉은 문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능이나 묘, 사당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입니다.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예로부터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나무 같지만 '시멘트'입니다.

곳곳에 시멘트를 덧바른 흔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하고 운치 있는 한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았던 유서 깊은 집입니다.

벽이며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았습니다.

부서져 떨어져 나간 곳들도 그대로 방치돼 있습니다.

황토 대신 시멘트로 메운 이름뿐인 이순신 옛집인 겁니다.

<인터뷰> 박소영(서울시 강동구) : "보기는 안 좋네요. 이렇게 시멘트로 원래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도 미관상이라든지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을 때 더 좋은 것 같아요."

1968년 현충사에선 대대적인 성역화 공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무로 복원됐어야 할 주요 건물들이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졌습니다.

그 뒤로 반 세기.

현충사는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에 갇혀 있습니다.

<인터뷰> 김준혁(한신대 교수) : "거대한 시멘트 건물로 만들어진 전혀 이질적인, 겉모습은 우리의 옛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 전혀 우리의 모습이 아닌 그런 공간이 바로 현충사죠."

진작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던 문화재청.

이제야 단계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을 목조로 바꿔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 지금 사당 앞에 있는 홍살문 같은 경우도 시멘트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들도 고쳐나갈 계획이 있고, 그런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충사를 찾은 사람들이 사당에 예를 올립니다.

참배객들을 맞는 건 사당 안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이 영정을 그린 화가는, 근대 한국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월전 장우성 화백입니다.

하지만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

때문에 표준영정을 바꾸자는 요구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관복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점.

영정 전문가를 찾아가 면밀하게 고증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영정만 20년 가까이 연구하며 국내 최고의 영정 화가로 꼽히는 권오창 화백.

전국의 박물관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16세기 무신 권응수 장군의 초상을 찾았습니다.

두 초상의 옷차림을 비교해 봤습니다.

먼저, 머리에 쓰는 관모.

16세기 초상화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관모가 훨씬 더 높고, 관모와 이마의 경계선도 이순신 영정 쪽이 훨씬 둥급니다.

다음은 목의 깃 부분.

권응수 초상은 목의 깃이 얕아 목 가까이 바짝 붙어 있지만, 이순신 초상은 목의 깃이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번엔 소매.

권응수 초상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소매는 아래로 흘러내릴 만큼 품이 넓습니다.

다음은 '흉배'라 불리는 가슴 장식.

당시 같은 종 2품 무관이었던 권응수 초상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만 그려져 있는데, 이순신 영정은 좌우로 두 마리.

조선시대 흉배 가운데 호랑이를 좌우로 배치한 사례는 없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어디를 봐도 조선 말기에 봐도 두 마리가 이렇게 돼 있는 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문헌이라든가 유물이라도 발견됐으면 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렸구나 하겠는데 어디를 봐도 그런 거는 못 봤거든요."

실제로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영정 속 얼굴이 실제와 다르다는 이의가 받아들여져 2006년 다른 그림으로 교체됐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복식이 맞아야 시대상을 알고 당대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그게 미흡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해서 그리고 고증을 확인하고 하는 절차가 필요한 게 바로 표준영정 제작이거든요. (바꿔야 되는 거죠?) 네, 바꿔야 됩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면 사당 건물 양쪽에 솥 모양의 장식물이 보입니다.

'정'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은 정통 왕조,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장식물입니다.

때문에 궁궐 가운데서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두 곳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궐 유물이 왜 사당 앞에 있는 걸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최초 설치 시기라든가 그게 왜 설치됐는지 경위라든가 이런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저희들이 확인을 못 했는데요. 현충사 연혁지 자료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1967년 4월경에 현재 위치에 설치돼 있는 걸로 나타나고 있어요."

현충사에선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 때 이곳에 향을 피웁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정은 국권,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현충사엔 맞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녹취> 궁궐 의례 전문가(음성변조) : "향로는 한 개를 놔야 되지 않습니까. 향로로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예법이 발달했던 조선시대 때 그런 사례가 없잖아요."

현충사는 한때 곳곳에 얼룩진 일제 잔재로도 신음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현충사 연못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교토의 니노마루 연못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현충사 연못은 마침내 올해 반듯한 우리 연못으로 복원됐습니다.

하지만 일제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현충사 사당 왼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일본을 대표하는 '금송'입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이 나무는 조선총독부 관저를 건립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총독 관저 건립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청와대에 계속 살아 있었던 그 나무를 현충사를 지으면서 이곳에 이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연못은 바꾸라고 한 문화재위원회가 유독 금송만은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모두 제자리에 두라고 결정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심어 시대성과 역사성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금송 이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건 지난 1991년.

당시 현충사를 찾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재청이 금송을 사당 밖으로 옮긴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은 금송을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으로 분류까지 해놓고 왜 옮기지 않았을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그 당시는 문화재 관리국 시절인데 예산확보가 안 됐어요. 그때 외래수종 다 정비하는 데 한 20여억 원, 21억 정도 되는데요. 그때 예산 확보가 안 되다보니까 정비가 안 됐고."

이후 위치만이라도 옮기자는 요구가 계속됐지만 문화재 당국은 여전히 묵묵부답.

현충사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7백 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항일 유적지 칠백의총.

이곳에도 사당 바로 옆에 버젓이 금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항일 유적지 곁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 박상진(나무 고고학자/경북대 명예교수) : "위치만 조금 옮기면 기념식수라는 의미도 살릴 수 있고 또 현충사가 갖고 있는 뜻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올해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 호국의 성지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를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 명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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