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은행들이 내 밑에 있는데”…12억여 원 가로채

입력 2017.05.0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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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월 중순, 서울 여의도의 중소 시행사 대표 서 모(55) 씨는 지인으로부터 한 남성을 소개받았다. 건물 매입에 대해 상담을 받고 싶다며 서 씨를 만난 이 남성은 가 모(60) 씨, 180cm가 넘는 키에 훤칠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첫 만남 뒤 나흘 만에 서 씨는 가 씨에게 12억 5천만 원 상당의 무기명 기프트카드(일종의 선불카드)를 건넸다. 3개월여가 지난 지금 가 씨는 경찰에 구속됐고 서 씨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국제금융업 총재' 사칭해 시행사 대표에 접근

피해자 서 씨가 경찰에서 한 진술을 종합하면 이렇다.

가 씨는 자신을 '국제금융업 총재'라고 소개했다. "내 밑에 세계 유수의 은행들이 있다"는 말을 하며, 이에 대한 증거라며 서 씨에게 채권지급 결정문까지 보여줬다. 발행자는 서울중앙지법으로, 국내 유명 은행 3곳이 가 씨에게 1,000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결정문에 담겨있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검은돈'이라며 말을 아꼈다.

가 씨는 지금 이 돈이 모두 채권 등으로 묶여 있어 현금화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곤 자신이 당장 건물을 매입해야 하는데 보증금 30억 원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채권이 풀리는 대로 웃돈을 얹어 50억 원을 주겠다는 말로 서 씨를 유혹했다.

구두 계약을 꺼려하는 서 씨에게 가 씨는 채권양도 통지서를 만들어 건넸다. "(가 씨 수중의) 1해 105경여 원 정 / 골드 5,000MT(1톤) 등의 지시채권(※) 등 50억 원을 양도한다"고 적힌 통지서를 받아든 서 씨는 가 씨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 서 씨는 은행에서 50만 원 한도의 무기명 기프트카드 2,500장을 발급받아 가 씨 등 7명에게 건넸다.

※지시채권: 어음, 수표 등 특정인 또는 그가 지시한 자에게 변제해야 하는 증권적 채권. 즉, 금전의 지급이나 물건의 인도를 뜻한다.

국제금융업의 실체… 결국 '사기'

가 씨 '국제금융업'의 실체는 이들이 기프트카드를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서 씨가 발급받은 기프트카드를 뭉칫돈으로 인출하는 과정에서,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은행이 가 씨의 계좌 등을 조회해 사기가 의심된다고 통보한 것이다.

가 씨에겐 1해가 넘는 지시채권은커녕 빌린 12억여 원을 갚을 재산도 없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발행한 채권지급 결정문도 사기를 치기 위해 허위 민사 소송을 벌여 받아둔 자료였다.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제3자의 채권자를 두고, 채무자로 가 씨 본인을 설정한다. 채권·채무 관계에 대한 민사 소송을 진행하면서 가 씨는 재판부 측에 은행에 받을 돈이 있다고 시인한다. 법원은 가 씨가 말한 은행을 제3채무자로 지정해서 은행이 채무자에게 돈을 지급하라고 가압류 결정을 한다.

법원의 가압류 결정을 통보받은 은행에서는 당연히 가 씨에게 지급할 돈이 없으므로 항소를 한다. 그럼 가 씨 측은 첫 소송을 취하하고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가 씨에게는 법원의 가압류 결정문, 즉 은행 측의 채권지급 결정문이 남는다. 이는 서 씨 등 피해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사용됐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혐의로 가 씨를 체포했다. 그리고 가 씨에게 서 씨를 소개해준 지인 박 모(59) 씨 등 4명을 잇따라 검거해 모두 5명의 일당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잠적한 김 모(62) 씨 등 2명도 추적 중이다.

하지만 7명이 나눠 가진 12억 5천만 원의 기프트카드는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가 씨 일당이 정당한 금전 거래였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돈의 행방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해 원이 넘는 돈을 자랑하며 국제금융업 총재를 사칭했던 60대 남성은 결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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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세계 은행들이 내 밑에 있는데”…12억여 원 가로채
    • 입력 2017-05-01 10:23:42
    사회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월 중순, 서울 여의도의 중소 시행사 대표 서 모(55) 씨는 지인으로부터 한 남성을 소개받았다. 건물 매입에 대해 상담을 받고 싶다며 서 씨를 만난 이 남성은 가 모(60) 씨, 180cm가 넘는 키에 훤칠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첫 만남 뒤 나흘 만에 서 씨는 가 씨에게 12억 5천만 원 상당의 무기명 기프트카드(일종의 선불카드)를 건넸다. 3개월여가 지난 지금 가 씨는 경찰에 구속됐고 서 씨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국제금융업 총재' 사칭해 시행사 대표에 접근

피해자 서 씨가 경찰에서 한 진술을 종합하면 이렇다.

가 씨는 자신을 '국제금융업 총재'라고 소개했다. "내 밑에 세계 유수의 은행들이 있다"는 말을 하며, 이에 대한 증거라며 서 씨에게 채권지급 결정문까지 보여줬다. 발행자는 서울중앙지법으로, 국내 유명 은행 3곳이 가 씨에게 1,000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결정문에 담겨있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검은돈'이라며 말을 아꼈다.

가 씨는 지금 이 돈이 모두 채권 등으로 묶여 있어 현금화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곤 자신이 당장 건물을 매입해야 하는데 보증금 30억 원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채권이 풀리는 대로 웃돈을 얹어 50억 원을 주겠다는 말로 서 씨를 유혹했다.

구두 계약을 꺼려하는 서 씨에게 가 씨는 채권양도 통지서를 만들어 건넸다. "(가 씨 수중의) 1해 105경여 원 정 / 골드 5,000MT(1톤) 등의 지시채권(※) 등 50억 원을 양도한다"고 적힌 통지서를 받아든 서 씨는 가 씨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 서 씨는 은행에서 50만 원 한도의 무기명 기프트카드 2,500장을 발급받아 가 씨 등 7명에게 건넸다.

※지시채권: 어음, 수표 등 특정인 또는 그가 지시한 자에게 변제해야 하는 증권적 채권. 즉, 금전의 지급이나 물건의 인도를 뜻한다.

국제금융업의 실체… 결국 '사기'

가 씨 '국제금융업'의 실체는 이들이 기프트카드를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서 씨가 발급받은 기프트카드를 뭉칫돈으로 인출하는 과정에서,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은행이 가 씨의 계좌 등을 조회해 사기가 의심된다고 통보한 것이다.

가 씨에겐 1해가 넘는 지시채권은커녕 빌린 12억여 원을 갚을 재산도 없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발행한 채권지급 결정문도 사기를 치기 위해 허위 민사 소송을 벌여 받아둔 자료였다.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제3자의 채권자를 두고, 채무자로 가 씨 본인을 설정한다. 채권·채무 관계에 대한 민사 소송을 진행하면서 가 씨는 재판부 측에 은행에 받을 돈이 있다고 시인한다. 법원은 가 씨가 말한 은행을 제3채무자로 지정해서 은행이 채무자에게 돈을 지급하라고 가압류 결정을 한다.

법원의 가압류 결정을 통보받은 은행에서는 당연히 가 씨에게 지급할 돈이 없으므로 항소를 한다. 그럼 가 씨 측은 첫 소송을 취하하고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가 씨에게는 법원의 가압류 결정문, 즉 은행 측의 채권지급 결정문이 남는다. 이는 서 씨 등 피해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사용됐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혐의로 가 씨를 체포했다. 그리고 가 씨에게 서 씨를 소개해준 지인 박 모(59) 씨 등 4명을 잇따라 검거해 모두 5명의 일당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잠적한 김 모(62) 씨 등 2명도 추적 중이다.

하지만 7명이 나눠 가진 12억 5천만 원의 기프트카드는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가 씨 일당이 정당한 금전 거래였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돈의 행방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해 원이 넘는 돈을 자랑하며 국제금융업 총재를 사칭했던 60대 남성은 결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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