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세종대왕과 대통령의 길

입력 2017.05.1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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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기도 하다.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한 것은 겨레의 영원한 스승인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기리는 의미에서이다.

세종대왕은 특히 정치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세종대왕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무엇이, 그토록 많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를 흠모하게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즉위할 당시 나라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가뭄으로 심각한 기근을 겪고 있었으며 조정은 상왕인 태종이 권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외부로는 여진족과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다. 하지만 세종은 ‘소통 정치’와 ‘단호한 외교 정책’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세종대왕은 모든 일의 중심에 백성을 두었다.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것이다. 백성이 힘들면 나라가 흔들리기 때문에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백성과 고통을 함께 하려 했다. 즉위 초기 기근이 계속되자 궁궐 안에 초가집을 지어 놓고 2년 동안 거기에서 집무를 보고 잠자리를 했다. 그 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농사 기술을 담은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역법서 등을 펴내고 측우기와 해시계 등을 만들었다. 한글을 창제한 것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두었다. 구언(求言) 제도를 통해 자신을 비판하는 글을 받아 보았으며, 전국의 상소문을 확인하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종대왕 어진세종대왕 어진

이러한 소통 정치는 조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세종대왕의 즉위 일성은 “상의해서 함께 하겠다”였다. 즉위 당시 21살이었던 세종대왕은 나이 많은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제였다. 세종대왕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내리려 한다”라는 말로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윤대(輪對)'를 통해 하급 실무 담당자와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처음에는 임금을 어려워하던 신하들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그의 태도에 자신의 생각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는 국정 운영의 큰 힘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종3품까지 올랐다. 세종대왕은 출신이나 배경이 아닌 실력만으로 장영실을 발탁한 것이다.

세종대왕 동상세종대왕 동상

밖으로는 외적에 대해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병행했다.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진족 등의 귀순을 장려하고 무역을 허락했다. 하지만 국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힐 경우 단호하게 토벌을 명했다.

세종대왕 숭모제전세종대왕 숭모제전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0돌이 되는 날이다.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는 그를 기리는 숭모제전(崇慕祭典)이 봉행된다.

지금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의미 있고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새로운 지도자 탄생과 정부 출범 때문이다. 새 정부 앞에는 세종대왕 초기와 비슷하게 많은 난제들이 쌓여 있다. 사드와 북핵, 위안부 등 외교 현안 그리고 일자리와 세대 갈등 등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왜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한글 창제와 국방, 과학,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의 훌륭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진가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愛民)정신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국민을 제1의 가치로 여기면서 국민에게 귀를 기울이고, 국민과 함께(與民) 문제를 풀어간다면 어떤 난관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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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플러스] 세종대왕과 대통령의 길
    • 입력 2017-05-14 0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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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기도 하다.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한 것은 겨레의 영원한 스승인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기리는 의미에서이다.

세종대왕은 특히 정치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세종대왕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무엇이, 그토록 많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를 흠모하게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즉위할 당시 나라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가뭄으로 심각한 기근을 겪고 있었으며 조정은 상왕인 태종이 권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외부로는 여진족과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다. 하지만 세종은 ‘소통 정치’와 ‘단호한 외교 정책’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세종대왕은 모든 일의 중심에 백성을 두었다.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것이다. 백성이 힘들면 나라가 흔들리기 때문에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백성과 고통을 함께 하려 했다. 즉위 초기 기근이 계속되자 궁궐 안에 초가집을 지어 놓고 2년 동안 거기에서 집무를 보고 잠자리를 했다. 그 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농사 기술을 담은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역법서 등을 펴내고 측우기와 해시계 등을 만들었다. 한글을 창제한 것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두었다. 구언(求言) 제도를 통해 자신을 비판하는 글을 받아 보았으며, 전국의 상소문을 확인하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종대왕 어진
이러한 소통 정치는 조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세종대왕의 즉위 일성은 “상의해서 함께 하겠다”였다. 즉위 당시 21살이었던 세종대왕은 나이 많은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제였다. 세종대왕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내리려 한다”라는 말로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윤대(輪對)'를 통해 하급 실무 담당자와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처음에는 임금을 어려워하던 신하들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그의 태도에 자신의 생각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는 국정 운영의 큰 힘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종3품까지 올랐다. 세종대왕은 출신이나 배경이 아닌 실력만으로 장영실을 발탁한 것이다.

세종대왕 동상
밖으로는 외적에 대해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병행했다.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진족 등의 귀순을 장려하고 무역을 허락했다. 하지만 국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힐 경우 단호하게 토벌을 명했다.

세종대왕 숭모제전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0돌이 되는 날이다.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는 그를 기리는 숭모제전(崇慕祭典)이 봉행된다.

지금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의미 있고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새로운 지도자 탄생과 정부 출범 때문이다. 새 정부 앞에는 세종대왕 초기와 비슷하게 많은 난제들이 쌓여 있다. 사드와 북핵, 위안부 등 외교 현안 그리고 일자리와 세대 갈등 등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왜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한글 창제와 국방, 과학,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의 훌륭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진가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愛民)정신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국민을 제1의 가치로 여기면서 국민에게 귀를 기울이고, 국민과 함께(與民) 문제를 풀어간다면 어떤 난관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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