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뉴스] ‘우키시마호’ 67년 만에 유해 수색 나섰지만…

입력 2017.05.30 (07:05) 수정 2017.05.30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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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4일, 일본에 끌려갔던 강제 징용자들을 태우고 조선으로 오던 제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대한해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았다.

광복 후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고향으로 돌아오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고만 밝혔을 뿐 정확한 탑승자 명단과 사고 경위를 공개하지 않았고, 사고 후 수년 동안 선체 인양과 유해 수색을 미루는 등 부실 대응해 고의로 사고를 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유족단체는 주도적으로 2012년 5월 유해 발굴을 위한 수중 수색을 실시했다. 수색에 드는 경비도 유족이 직접 마련했다.

하지만 두꺼운 진흙으로 뒤덮인 탓에 유해와 유물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우키시마호를 둘러싼 진실은 이렇게 묻히는 듯 했지만 이후 의미있는 기록물들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인원이 애초 일본이 발표한 3700여 명이 아니라 8000여 명에 이른다는 일본 외무성 기록이 2014년 공개됐으며, 2016년에는 이 배에 폭발물이 실린 정황을 기록한 일본 방위청 문건이 공개되며 일본의 고의 폭침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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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그 뉴스] ‘우키시마호’ 67년 만에 유해 수색 나섰지만…
    • 입력 2017-05-30 07:05:07
    • 수정2017-05-30 07:21:04
    그때 그뉴스
1945년 8월 24일, 일본에 끌려갔던 강제 징용자들을 태우고 조선으로 오던 제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대한해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았다.

광복 후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고향으로 돌아오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고만 밝혔을 뿐 정확한 탑승자 명단과 사고 경위를 공개하지 않았고, 사고 후 수년 동안 선체 인양과 유해 수색을 미루는 등 부실 대응해 고의로 사고를 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유족단체는 주도적으로 2012년 5월 유해 발굴을 위한 수중 수색을 실시했다. 수색에 드는 경비도 유족이 직접 마련했다.

하지만 두꺼운 진흙으로 뒤덮인 탓에 유해와 유물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우키시마호를 둘러싼 진실은 이렇게 묻히는 듯 했지만 이후 의미있는 기록물들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인원이 애초 일본이 발표한 3700여 명이 아니라 8000여 명에 이른다는 일본 외무성 기록이 2014년 공개됐으며, 2016년에는 이 배에 폭발물이 실린 정황을 기록한 일본 방위청 문건이 공개되며 일본의 고의 폭침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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