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을 수어로 어떻게 표현하냐고요?

입력 2017.06.01 (16:39) 수정 2017.06.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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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 두 달 만에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고, 그로부터 석 달 뒤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됐다. 그리고 지난달 10일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흐름을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의 속보가 이어졌다. 언론에서는 관련한 말들이 차고 넘쳤다. 일반인(비청각장애인)도 한번에 듣고 정리하기 복잡한 내용이 연일 쏟아졌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하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은 국정농단 소식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받았을까. 농인들이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영향을 끼친 강효경(50)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와 문재인 대통령 취임선서식 등 굵직한 이슈를 통역한 강 씨는 2005년부터 KBS '뉴스12'에서 수어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달 22일과 30일, 여의도 KBS 신관에서 만난 강 씨는 국정농단 사태를 전달하면서 "관계성을 설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어떤 관계인지, 삼성과 최 씨는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수어로 표현하는 게 힘들었어요. '서로 아는 사이다', '이들은 친한 관계다'라고 해버리기에는 둘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잖아요. 비선실세가 무엇인지, 삼성에서 왜 승마지원을 했는지 등의 내용을 농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장면의 그림처럼 전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표현하는 수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표현하는 수어

지난해 9월 이전, '최순실'은 한국 언론에서 주목한 적 없는 단어였다. 당연히 '최순실'을 표현할 수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 문재인 대통령,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등은 성씨인 '문', '박', '이'와 '대통령'을 뜻하는 손짓으로 표현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오른 주먹에서 엄지와 검지를 펴서 니은(ㄴ)을 만든 다음, 이마 위에서 휙 긋는 것으로 표현된다. 성씨인 '노'와 이마 주름을 강조해 만든 수어다.

"최순실 하면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채 카메라를 쳐다보는 사진이 떠오르실 거예요. 그 사진이 최순실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판단했어요. 처음에는 '최 씨' 성을 나타내는 수어를 썼지만 이후 오른쪽 셋째, 넷째 손가락을 접어 머리 위로 올린 손짓이 자연스럽게 '최순실'을 나타내는 수어가 됐어요."

이는 한국 수어사전에 등록된 표준 수어는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는 표준어와 방언 등을 포함해 약 51만 개, 같은 곳에서 제공하는 한국 수어사전에 등록된 수어는 2만 5천 개가량이다. 모든 단어를 수어로 표현하는 것은 현재로써 불가능하다. '혼밥', '스마트폰' 같은 신조어나 '메르스'처럼 전문적인 용어는 그때 그때 새로운 손짓을 얻는다. 사물이나 사람의 특성을 반영해 표현한 손짓이 농인들의 공감을 얻으면, 대상을 표현하는 비공식 수어가 되는 것이다.

강 씨는 2015년 전국에 창궐한 메르스 바이러스를 영어 알파벳 'M'을 표현한 지문자와 '벌레'를 뜻하는 수어를 결합해 표현했다. 강 씨는 "누가 먼저 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이 생기면 농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져서 쓰게 된다"고 말했다.


단어에 맞는 수어를 고민하는 것만큼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KBS '뉴스12'에서 수어 통역을 담당한 지도 어느덧 13년. 강 씨는 "왜곡하지 않고,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한 고민이 해마다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매시간 저와의 전쟁이에요. 들리는 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들리는 단어를 일대일 대응으로 전달하는 것은 올바른 통역이 아니거든요. 영어를 번역할 때 영어 단어와 한국어를 단어 순으로 맞추지 않는 것과 같아요. 1분 30초짜리 리포트를 시간 제약 없이 통역한다면 2~3분 정도 걸려요. 방송 시간 내에 정확하게, 왜곡하지 않고 전하는 것은 통역사의 책임이에요. 어떻게 해야 왜곡 없이 전할 수 있을까를 점점 더 고민하게 돼요."

강 씨는 "누군가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낼 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는 것을 농인들은 매시간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청각장애인으로 등록된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지난해 2월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르면 농인의 고유한 언어인 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 최근 지상파 UHD 방송이 시작되는 등 비장애인을 위한 방송기술 서비스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청각장애인들에게 필수인 수어방송 환경은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2018년부터 수어방송의 크기와 위치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수화방송' 본방송이 시작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은 화면 오른쪽 하단의 타원형 모양을 통해 내용을 전달받고 있다. 강 씨는 "화면의 절반을 수어 통역에 할애하는 외국 사례도 있다고 하는데, 절반까지는 바라지 않고 조금씩 크기를 확대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한이나 외교 문제를 통역할 때가 특히 힘들어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북한 등 모두가 다 중요하기 때문에 생략하면 안 되거든요. 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아베 총리, 김정은 위원장의 위치를 정해놓고, 시진핑의 발언은 왼쪽을 가리킨 뒤 얘기하고, 아베 의견은 오른쪽을 찍은 뒤 얘기하는 방식으로 구분을 준 다음 통역해요. 작은 원 안에서 굉장히 분주히 움직여야 해요."


뉴스 통역의 경우 대개 1시간 안에 끝나지만, 특보나 속보는 사안에 따라 보도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지난달 10일 KBS는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당선과 취임, 문재인 정부 출범 뉴스 특보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방송했다. 10시간 동안 이어진 특보를 수어통역사 4명이 나눠서 통역했다. 강 씨는 문 대통령이 사저를 출발해 국립 현충원을 참배하고, 국회에서 취임선서하는 모습을 수어로 전달했다.

"과거에는 대통령 취임식 때만 통역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저를 출발하는 모습부터 이동 경로까지 모두 전달했어요. 농인들도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긴 시간 통역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 씨는 "통역이 늘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이 내용을 농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의도가 아닌, 법적 기준만 맞추자는 식으로 수어방송을 넣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방송통신위원회고시 제2015-4호)에 따르면 KBS, EBS 등 지상파 방송뿐 아니라 위성방송, 종편, 보도전문 채널은 각 채널당 할당된 양만큼 수어통역방송을 제작·편성해야 한다. KBS는 방통위가 인정하는 방송시간 중 자막방송 100%, 화면해설방송 10%, 수화통역방송 5%에 해당하는 장애인방송물을 제작하고 편성해야 한다.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

지난해 7월 방통위가 공개한 '2015년도 장애인방송 편성의무 평가 결과'를 보면, KBS는 수화통역방송 할당량 5%를 초과 달성(5.7%)했다. KBS는 '930뉴스', '뉴스12', '뉴스5'(이상 KBS 1TV)와 '지구촌뉴스', '뉴스타임', '글로벌24'(이상 KBS 2TV) 등 주로 뉴스 프로그램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농인들은 어느 프로그램에 수어 통역이 들어가는지 다 알고, 일부러 그 시간대 뉴스를 챙겨봐요. KBS가 수어통역을 가장 많이 넣는 방송사이긴 하지만 많은 농인들이 보는 시간대에 수어방송을 편성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한 케이블 방송사는 새벽 시간대 개그 프로그램에 수어통역을 넣기도 하는데요. 법적 기준만 충족시킬 뿐 농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성이죠."


강 씨는 6살 때 트럭에 실려있던 나무가 오른쪽 다리 위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지체 장애를 갖게 된 강 씨는 자연스럽게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졌고, 20대 초반부터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어를 시작했어요. 농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몇 년간 재밌게 배웠어요. 동사무소나 병원, 음식점에서 문제를 겪을 때 옆에서 전달해주는 식이었죠. 제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소통'이란 걸 깨달았죠."

방송 외 시간에 청각장애인들과 만나 방송 피드백을 받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강 씨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감의 말도 나누고 감정 전달도 자유롭게 하는 편이지만 방송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열린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과 유족이 포옹하는 장면을 전하던 김홍남 수어통역사가 눈물을 감추지 못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강 씨에게 "방송 중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연관기사][인터뷰] 수화방송 중 눈물 훔친 통역사, “그때…”

"감동적인 내용을 전할 때는 저 역시 눈물이 나려고 할 때가 많아요. 특히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이 나오면 그래요. 저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적은 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혼자 배를 탈출하는 내용을 전할 때 동작이 커지고, 표정이 굳는 식으로 감정이 표출되는 것 같아요."

강 씨는 이어 "여러 계기로 수어통역사가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 같아 기쁘다"며 "이러한 관심이 '나도 수어를 배우고 싶다'로 이어져 농인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K스타 정혜정 kbs.sprint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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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순실을 수어로 어떻게 표현하냐고요?
    • 입력 2017-06-01 16:39:22
    • 수정2017-06-01 16:54:14
    사회
지난해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 두 달 만에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고, 그로부터 석 달 뒤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됐다. 그리고 지난달 10일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흐름을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의 속보가 이어졌다. 언론에서는 관련한 말들이 차고 넘쳤다. 일반인(비청각장애인)도 한번에 듣고 정리하기 복잡한 내용이 연일 쏟아졌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하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은 국정농단 소식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받았을까. 농인들이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영향을 끼친 강효경(50)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와 문재인 대통령 취임선서식 등 굵직한 이슈를 통역한 강 씨는 2005년부터 KBS '뉴스12'에서 수어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달 22일과 30일, 여의도 KBS 신관에서 만난 강 씨는 국정농단 사태를 전달하면서 "관계성을 설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어떤 관계인지, 삼성과 최 씨는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수어로 표현하는 게 힘들었어요. '서로 아는 사이다', '이들은 친한 관계다'라고 해버리기에는 둘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잖아요. 비선실세가 무엇인지, 삼성에서 왜 승마지원을 했는지 등의 내용을 농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장면의 그림처럼 전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표현하는 수어
지난해 9월 이전, '최순실'은 한국 언론에서 주목한 적 없는 단어였다. 당연히 '최순실'을 표현할 수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 문재인 대통령,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등은 성씨인 '문', '박', '이'와 '대통령'을 뜻하는 손짓으로 표현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오른 주먹에서 엄지와 검지를 펴서 니은(ㄴ)을 만든 다음, 이마 위에서 휙 긋는 것으로 표현된다. 성씨인 '노'와 이마 주름을 강조해 만든 수어다.

"최순실 하면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채 카메라를 쳐다보는 사진이 떠오르실 거예요. 그 사진이 최순실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판단했어요. 처음에는 '최 씨' 성을 나타내는 수어를 썼지만 이후 오른쪽 셋째, 넷째 손가락을 접어 머리 위로 올린 손짓이 자연스럽게 '최순실'을 나타내는 수어가 됐어요."

이는 한국 수어사전에 등록된 표준 수어는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는 표준어와 방언 등을 포함해 약 51만 개, 같은 곳에서 제공하는 한국 수어사전에 등록된 수어는 2만 5천 개가량이다. 모든 단어를 수어로 표현하는 것은 현재로써 불가능하다. '혼밥', '스마트폰' 같은 신조어나 '메르스'처럼 전문적인 용어는 그때 그때 새로운 손짓을 얻는다. 사물이나 사람의 특성을 반영해 표현한 손짓이 농인들의 공감을 얻으면, 대상을 표현하는 비공식 수어가 되는 것이다.

강 씨는 2015년 전국에 창궐한 메르스 바이러스를 영어 알파벳 'M'을 표현한 지문자와 '벌레'를 뜻하는 수어를 결합해 표현했다. 강 씨는 "누가 먼저 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이 생기면 농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져서 쓰게 된다"고 말했다.


단어에 맞는 수어를 고민하는 것만큼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KBS '뉴스12'에서 수어 통역을 담당한 지도 어느덧 13년. 강 씨는 "왜곡하지 않고,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한 고민이 해마다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매시간 저와의 전쟁이에요. 들리는 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들리는 단어를 일대일 대응으로 전달하는 것은 올바른 통역이 아니거든요. 영어를 번역할 때 영어 단어와 한국어를 단어 순으로 맞추지 않는 것과 같아요. 1분 30초짜리 리포트를 시간 제약 없이 통역한다면 2~3분 정도 걸려요. 방송 시간 내에 정확하게, 왜곡하지 않고 전하는 것은 통역사의 책임이에요. 어떻게 해야 왜곡 없이 전할 수 있을까를 점점 더 고민하게 돼요."

강 씨는 "누군가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낼 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는 것을 농인들은 매시간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청각장애인으로 등록된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지난해 2월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르면 농인의 고유한 언어인 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 최근 지상파 UHD 방송이 시작되는 등 비장애인을 위한 방송기술 서비스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청각장애인들에게 필수인 수어방송 환경은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2018년부터 수어방송의 크기와 위치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수화방송' 본방송이 시작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은 화면 오른쪽 하단의 타원형 모양을 통해 내용을 전달받고 있다. 강 씨는 "화면의 절반을 수어 통역에 할애하는 외국 사례도 있다고 하는데, 절반까지는 바라지 않고 조금씩 크기를 확대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한이나 외교 문제를 통역할 때가 특히 힘들어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북한 등 모두가 다 중요하기 때문에 생략하면 안 되거든요. 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아베 총리, 김정은 위원장의 위치를 정해놓고, 시진핑의 발언은 왼쪽을 가리킨 뒤 얘기하고, 아베 의견은 오른쪽을 찍은 뒤 얘기하는 방식으로 구분을 준 다음 통역해요. 작은 원 안에서 굉장히 분주히 움직여야 해요."


뉴스 통역의 경우 대개 1시간 안에 끝나지만, 특보나 속보는 사안에 따라 보도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지난달 10일 KBS는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당선과 취임, 문재인 정부 출범 뉴스 특보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방송했다. 10시간 동안 이어진 특보를 수어통역사 4명이 나눠서 통역했다. 강 씨는 문 대통령이 사저를 출발해 국립 현충원을 참배하고, 국회에서 취임선서하는 모습을 수어로 전달했다.

"과거에는 대통령 취임식 때만 통역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사저를 출발하는 모습부터 이동 경로까지 모두 전달했어요. 농인들도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긴 시간 통역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 씨는 "통역이 늘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이 내용을 농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의도가 아닌, 법적 기준만 맞추자는 식으로 수어방송을 넣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방송통신위원회고시 제2015-4호)에 따르면 KBS, EBS 등 지상파 방송뿐 아니라 위성방송, 종편, 보도전문 채널은 각 채널당 할당된 양만큼 수어통역방송을 제작·편성해야 한다. KBS는 방통위가 인정하는 방송시간 중 자막방송 100%, 화면해설방송 10%, 수화통역방송 5%에 해당하는 장애인방송물을 제작하고 편성해야 한다.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
지난해 7월 방통위가 공개한 '2015년도 장애인방송 편성의무 평가 결과'를 보면, KBS는 수화통역방송 할당량 5%를 초과 달성(5.7%)했다. KBS는 '930뉴스', '뉴스12', '뉴스5'(이상 KBS 1TV)와 '지구촌뉴스', '뉴스타임', '글로벌24'(이상 KBS 2TV) 등 주로 뉴스 프로그램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농인들은 어느 프로그램에 수어 통역이 들어가는지 다 알고, 일부러 그 시간대 뉴스를 챙겨봐요. KBS가 수어통역을 가장 많이 넣는 방송사이긴 하지만 많은 농인들이 보는 시간대에 수어방송을 편성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한 케이블 방송사는 새벽 시간대 개그 프로그램에 수어통역을 넣기도 하는데요. 법적 기준만 충족시킬 뿐 농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성이죠."


강 씨는 6살 때 트럭에 실려있던 나무가 오른쪽 다리 위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지체 장애를 갖게 된 강 씨는 자연스럽게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졌고, 20대 초반부터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어를 시작했어요. 농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몇 년간 재밌게 배웠어요. 동사무소나 병원, 음식점에서 문제를 겪을 때 옆에서 전달해주는 식이었죠. 제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소통'이란 걸 깨달았죠."

방송 외 시간에 청각장애인들과 만나 방송 피드백을 받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강 씨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감의 말도 나누고 감정 전달도 자유롭게 하는 편이지만 방송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열린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과 유족이 포옹하는 장면을 전하던 김홍남 수어통역사가 눈물을 감추지 못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강 씨에게 "방송 중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연관기사][인터뷰] 수화방송 중 눈물 훔친 통역사, “그때…”

"감동적인 내용을 전할 때는 저 역시 눈물이 나려고 할 때가 많아요. 특히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들이 나오면 그래요. 저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적은 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혼자 배를 탈출하는 내용을 전할 때 동작이 커지고, 표정이 굳는 식으로 감정이 표출되는 것 같아요."

강 씨는 이어 "여러 계기로 수어통역사가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 같아 기쁘다"며 "이러한 관심이 '나도 수어를 배우고 싶다'로 이어져 농인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K스타 정혜정 kbs.sprint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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