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달콤 제주 귤에 얽힌 수탈의 역사

입력 2017.06.0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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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흔한 과일 귤. 하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귤은 임금도 애타게 찾던 귀한 과일이었다. 특히 제주 귤은 오래전부터 기록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고,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정에 진상됐다.

귤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때인 1052년으로, 이때 진상 수량을 개정했다. 귤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때인 1052년으로, 이때 진상 수량을 개정했다.

귤에 관한 다양한 일화는 조선왕조 내내 전해진다. 우리에게 폭군으로 익숙한 연산군은 수확 시기가 지난 후에 "귤을 가지 채로 잘라 보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었고, 성균관 유생들은 더 많은 귤을 먹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귤을 향한 조정의 애정이 높아질수록 제주도민들의 부담은 커졌다. 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일정한 양의 귤을 공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제주인들에게 귤은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 가혹한 수탈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최대 말 산지이자 군마의 최대 생산지

제주도의 또 다른 대표 명물인 말에도 슬픈 역사가 있다. 18세기 초,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제주를 돌아다니며 '탐라순력도'라는 기록을 남긴다.


'탐라순력도'는 제주의 여러 행사 장면을 기록한 채색 화첩으로, 여기엔 목사가 진상에 올릴 말을 점검하고 있는 '공마봉진'이라는 그림이 담겨있다. 말이 제주의 대표 진상품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주 말은 조선 조정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제주 최대 말 경영자 '김만일'이 명나라에 말을 보내지 않기 위해 감행한 특단의 조치는 무엇일까.

육지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의 섬'

제주도민들이 귤과 말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면, 반대로 제주도 때문에 눈물 흘린 이들도 있었다. 바로 유배객들이다.


제주는 조선 시대 한양에서 제일 먼 곳이라는 이유로 유배에 최적화한 장소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를 간 사람만 해도 200여 명, 이후 제주는 육지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의 섬'이 된다.

그들 가운데엔 84세 고령의 신임(조선 경종대의 문신), 4세의 석견(소현세자의 아들), 폐주 광해군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배객은 단연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 세한도를 그렸다.


육지의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가 아닌 진짜 제주 이야기를 다룬 제주도 1편 '탐라의 눈물'에서는 오랜 시간 중앙 정부에 귤, 말 등 공물을 바쳐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세한 내용은 6월 10일(토) 밤 8시 KBS 1TV '최태성, 이윤석의 역사기행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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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콤달콤 제주 귤에 얽힌 수탈의 역사
    • 입력 2017-06-09 11:16:23
    방송·연예
지금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흔한 과일 귤. 하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귤은 임금도 애타게 찾던 귀한 과일이었다. 특히 제주 귤은 오래전부터 기록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고,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정에 진상됐다.

귤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때인 1052년으로, 이때 진상 수량을 개정했다.
귤에 관한 다양한 일화는 조선왕조 내내 전해진다. 우리에게 폭군으로 익숙한 연산군은 수확 시기가 지난 후에 "귤을 가지 채로 잘라 보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었고, 성균관 유생들은 더 많은 귤을 먹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귤을 향한 조정의 애정이 높아질수록 제주도민들의 부담은 커졌다. 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일정한 양의 귤을 공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제주인들에게 귤은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 가혹한 수탈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최대 말 산지이자 군마의 최대 생산지

제주도의 또 다른 대표 명물인 말에도 슬픈 역사가 있다. 18세기 초,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제주를 돌아다니며 '탐라순력도'라는 기록을 남긴다.


'탐라순력도'는 제주의 여러 행사 장면을 기록한 채색 화첩으로, 여기엔 목사가 진상에 올릴 말을 점검하고 있는 '공마봉진'이라는 그림이 담겨있다. 말이 제주의 대표 진상품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주 말은 조선 조정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제주 최대 말 경영자 '김만일'이 명나라에 말을 보내지 않기 위해 감행한 특단의 조치는 무엇일까.

육지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의 섬'

제주도민들이 귤과 말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면, 반대로 제주도 때문에 눈물 흘린 이들도 있었다. 바로 유배객들이다.


제주는 조선 시대 한양에서 제일 먼 곳이라는 이유로 유배에 최적화한 장소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를 간 사람만 해도 200여 명, 이후 제주는 육지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의 섬'이 된다.

그들 가운데엔 84세 고령의 신임(조선 경종대의 문신), 4세의 석견(소현세자의 아들), 폐주 광해군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배객은 단연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 세한도를 그렸다.


육지의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가 아닌 진짜 제주 이야기를 다룬 제주도 1편 '탐라의 눈물'에서는 오랜 시간 중앙 정부에 귤, 말 등 공물을 바쳐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세한 내용은 6월 10일(토) 밤 8시 KBS 1TV '최태성, 이윤석의 역사기행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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