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39) 자전거 - 우주를 굴리는 눈부신 두 바퀴

입력 2017.06.09 (15:05) 수정 2017.06.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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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우주를 굴리는 눈부신 두 바퀴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한 유하 시인의 연작시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가운데 한 편입니다. 자전거를 타본 분은 다 느끼셨을 테지만 아무 거칠 것 없이 쪽 곧은 도로를 두 바퀴로 질주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밟을수록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위로 시원한 바람은 얼굴을 때리며 뒤로 물러가고 길가의 나무와 꽃들도 휙휙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소실점 끝 아득하게만 보였던 다리와 건물들이 이내 커다랗게 다가오면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힘찬 몸뚱이가 그렇게 대견할 수 없습니다.

유하 시인도 마침내 자전거 두 개의 은빛 바퀴가 우주를 굴린다고 감격합니다. 지구를 굴리는 것도 아니고 우주를 굴린다니.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거꾸로 우주를 굴리는 이 마술, 자전거이기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자전거가 우주를 굴리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바퀴의 중심이 텅 비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그릇이 그릇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속이 텅 비어있을 때라고 가르쳤지요. 시인은 자신의 머리도 온갖 세상의 번다한 지식과 속도를 다 비우고 자전거 바퀴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끔히 비운 머리를 굴리고 굴려 마침내 눈부신 보름달 같은 시를 잉태하고 싶어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안양천변으로 나가 한강 고수부지를 자전거로 달리는 저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일이나 달아나지 않는 근심거리도 자전거 두 바퀴에 몸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면 거짓말같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요즘 공원이나 강변 혹은 교외 유원지 등을 나가보면 멋진 유니폼을 단체로 입고 도로를 질주하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을 자주 마주칩니다. 메타세쿼이아 줄기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다리로 힘차게 페달을 돌리면서 순식간에 제 곁을 스쳐 가는 유선형의 헬멧들을 보노라면 그 뒤를 저도 따라붙고 싶어집니다. 특히 맑은 날에는 현란하게 돌아가는 두 바퀴에 그렇지 않아도 쨍쨍한 햇살이 부딪치고 쪼개져 황홀한 광채를 뿜어냅니다.

중력을 거부하고 제힘으로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대견하지만, 자전거와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은 장관입니다. 페달과 다리, 바퀴와 장딴지, 넓적다리와 엉덩이, 허리와 머리칼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신체를 마치 해부하듯이 정교하게 묘사한 시도 있습니다.


기발하지 않습니까? 자전거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의 에너지이고, 숨을 뿜어내는 콧구멍은 2기통 엔진이고, 그 엔진이 뿜어내는 숨이 맑은 바람으로 흩어진다니. 두루뭉수리 한 묘사보다 이렇게 디테일한 묘사가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갓 건져 올린 물고기 같은 시를 만들어냅니다.

시인의 관찰대로 열심히 다리를 오므렸다 펴면서 페달을 돌리다 보면, 마치 다리와 엉덩이 몸통과 머리가 하나로 이어진 다리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전거와 사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한 몸뚱이 같다는 착각도 들고요.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올림픽 경기 같은 데서 사이클 선수들이 전력 질주할 때면 정말 선수와 자전거가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런가 하면 두 바퀴가 언제나 함께 움직이려 하는 자전거의 속성에서 이런 심오한 삶의 속성을 캐내는 시인도 있습니다.


단 한 문장의 짧은 시지만 곱씹을수록 진한 생각이 우러나옵니다. 앞바퀴는 뒷바퀴를 떼내려고 죽어라 앞으로 질주합니다. 그러나 질주하면 할수록 뒷바퀴도 죽어라고 쫓아옵니다.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끈.

아마도 시인은 이 뒷바퀴를 떼낼 수 없고 함께 가야만 하는 앞바퀴의 운명에서 가장의 책임을 연상한 것은 아닐까요? 남편이나 아내, 자식 혹은 부모와 형제, 아무리 거부하려 발버둥 쳐도 함께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이인삼각의 존재들. 혹은 가족 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숙명적으로 짊어진 장애나 습성 등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교통수단에서 레저의 총아로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자전거 붐을 맞게 됩니다. 이전까지 자전거는 주로 버스나 승용차를 대신하는 단거리 교통 수단이거나 점포에서 물건을 실어나르는 실용적 운송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늘어나고 건강을 생각하는 스포츠와 레저 활동이 각광을 받으면서 자전거는 총아로 등장했습니다. 과도한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지구 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공해 교통수단이 다시 관심을 끈 것도 한 이유입니다.

자전거는 그야말로 건강을 위한 스포츠 중에서 인기가 높은 스포츠입니다. 우선 자전거는 하체의 근육을 주로 사용하는 유산소 운동의 대표적인 스포츠로 근력, 지구력 여기에다 심폐기능 등을 강화시키면서도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입니다. 달리는 재미까지 더해서 비교적 오래 타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홀로 즐겨도 좋고 무리를 지어 달려로 좋고, 아침 점심 저녁 언제라도 좋습니다. 겨울철 눈이 쌓여 미끄럽거나 여름철 폭우만 내리지 않는다면 사계절 운동이 가능합니다.

1791년 프랑스의 귀족 시브락이 나무로 만든 목마형 자전거를 고안한 이후 1839년 스코틀랜드의 대장장이 맥밀런은 페달을 발명해 발로 땅을 차지 않고도 달리는 자전거로 발전시켰습니다. 1885년 존 캠프 스탈리는 페달은 물론 체인과 기어를 부착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자전거 '로버'(Rover)를 생산해 자전거 대중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18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전거는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엔진을 부착한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짧은 전성기를 끝으로 쇠락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1970년대 다시 산악자전거 등 레저붐을 타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여기에는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는 더 이상 무한하지도 싸지도 않으며 지구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자각이 커지면서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로 사람들은 다시 눈을 돌렸습니다. 영국의 작가 웰스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른을 보면서 인류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자전거가 들어온 때는 1895년으로 갑신정변이 좌절되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 박사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굴러다니는 자전거는 몇 대나 될까요? 지난 2010년 약 620만대였던 자전거는 2012년에는 800만대, 2015년에는 1,022만대로 늘었고 2016년에는 1,200만대 정도로 추정됩니다. 자전거에 원동기를 단 전기자전거도 15만 대 정도가 보급됐습니다.

자전거 보급률도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 2012년 16.6%에서 2014년에는 29.8%, 2015년에는 35.3%, 그리고 2016년에는 34.8%까지 늘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선진국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네덜란드는 96.3%, 독일은 87.3%, 일본도 67.8%나 됩니다.

자전거 붐에 힘입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퉈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그 효용을 둘러싸고 논쟁이 분분한 4대강 사업에는 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는 사업도 들어있을 정도로 자전거의 활성화는 국가적 관심사였습니다. 4대강을 잇는 자전거도로만도 총연장은 1,757km나 됩니다. 서울에는 776km, 경기도는 무려 4,286km의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졌고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퉈 자전거 도로를 늘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고도 크게 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전거는 엄연히 도로교통법상 '차'라 간주돼 차도를 달려야 합니다. 자연 자동차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고 인도로 다니다 사람을 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에서 일어난 자전거 사고는 2012년 3,547건, 2013년 4,249건, 2014년 5,975건, 2015년에는 무려 6,975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해 평균 천 건 정도씩 늘고 있는 셈입니다.


자전거 사고로 인해 숨지는 사람도 한 해 평균 300명 정도나 됩니다. 특히 사망 원인의 80%가 머리 부상이라고 하니 헬멧을 꼭 착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13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는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성인들은 규제가 없어 착용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전거의 부활을 예측하지 못한 국내 생산업체들이 일찌감치 생산을 포기해 지금 우리나라 자전거의 80% 이상이 수입제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자전거들이 OEM(주문자 부착상품) 방식으로 중국과 동남아에서 생산돼 들어오고 있고, 특히 백만 원을 넘어가는 고급 자전거는 타이완과 미국 등 수입제품이 휩쓸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자전거 보급률을 감안할 때, 이제부터라도 국내 자전거 제조업체의 분발이 필요합니다. 특히 소득이 높아지고 자전거가 레저수단으로서의 자리를 단단히 매김 할수록 가볍고 튼튼한 고가의 자전거 수요가 많아지는 만큼 자전거 제조는 부가가치 높은 산업이기도 합니다.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고 지구도 생각하는 친환경 교통수단

자전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특히 평등사회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사회주의 계열의 철학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자전거는 값이 싸기 때문에 소득이 높지 않는 육체노동자나 농민도 탈 수 있는 데다 유지비도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한 시인은 자동차를 사거나 유지하는 데는 큰돈이 들고 또 면허증이라는 까다로운 장벽이 있지만, 자전거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데 착안해 두 탈 것의 관계에 대해 유쾌한 전복을 시도합니다.


유쾌하지 않습니까? 자전거가 퇴보한 것이 자동차라니! 죽어라고 일해서 비싼 자동차 사느라 통장을 탈탈 털고, 기름값 내랴 자동차세 내랴 보험료 내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 새듯 돈이 빠져나갑니다. 최종천 시인은 이런 복잡한 자동차 대신에 단순 명쾌한 자전거를 보면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명제로까지 사유를 확대해갑니다. 자전거는 진리처럼 열려 있고 진리는 자전거처럼 단순하다는 멋진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동차처럼 복잡한 삶보다는 자전거 같은 단순한 삶이 행복에 좀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산더미 같은 일에 치이고 가정에 얽매이고 빈약한 지갑에 발목을 잡히는 서민들은 언제나 유한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탈출을 꿈꿉니다. 그럴 때 자신의 두 발로 힘차게 페달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둥근 두 바퀴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꿈의 상징이고 자전거는 그 꿈을 실현해 주는 두 다리의 연장입니다. 젊은 나이에 전 세계를 자전거로 일주한 문종성 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의 역할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자전거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하나의 값진 수단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안정된 곳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서로 다른 인생의 우선순위가 있듯 나의 롤모델은 모범형 샐러리맨이 아니기에 초보 뱃사공의 핸디캡에도 밧줄을 풀고 뱃고동 소리를 힘차게 내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은 자전거를 통해 너무 빠른 도시의 속도에서 잃어버린 그리움을 복원하고 싶어 합니다.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 움푹 팬 바퀴 자국에서 여전히 가슴 한구석 남아 있는 사랑과 이별, 슬픔과 그리움의 희미한 이미지들을 발견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아예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자전거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글을 빨리 마무리하고 자전거를 끌고 안양천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생수 한 병 허리춤에 차고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녹음이 점령한 한강변을 씽씽 달려야겠습니다.

우주를 굴리는 두 바퀴에 두 다리와 엉덩이를 얹고 선유도 공원을 넘어 양화대교를 지나 달려야겠습니다. 혹시 또 압니까? 자전거를 세우고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금은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은 옛 애인을 만나게 될지…

[연관 기사]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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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39) 자전거 - 우주를 굴리는 눈부신 두 바퀴
    • 입력 2017-06-09 15:05:16
    • 수정2017-06-09 15:06:05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자전거, 우주를 굴리는 눈부신 두 바퀴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한 유하 시인의 연작시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가운데 한 편입니다. 자전거를 타본 분은 다 느끼셨을 테지만 아무 거칠 것 없이 쪽 곧은 도로를 두 바퀴로 질주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밟을수록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위로 시원한 바람은 얼굴을 때리며 뒤로 물러가고 길가의 나무와 꽃들도 휙휙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소실점 끝 아득하게만 보였던 다리와 건물들이 이내 커다랗게 다가오면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힘찬 몸뚱이가 그렇게 대견할 수 없습니다.

유하 시인도 마침내 자전거 두 개의 은빛 바퀴가 우주를 굴린다고 감격합니다. 지구를 굴리는 것도 아니고 우주를 굴린다니.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거꾸로 우주를 굴리는 이 마술, 자전거이기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자전거가 우주를 굴리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바퀴의 중심이 텅 비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그릇이 그릇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속이 텅 비어있을 때라고 가르쳤지요. 시인은 자신의 머리도 온갖 세상의 번다한 지식과 속도를 다 비우고 자전거 바퀴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끔히 비운 머리를 굴리고 굴려 마침내 눈부신 보름달 같은 시를 잉태하고 싶어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안양천변으로 나가 한강 고수부지를 자전거로 달리는 저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일이나 달아나지 않는 근심거리도 자전거 두 바퀴에 몸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면 거짓말같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요즘 공원이나 강변 혹은 교외 유원지 등을 나가보면 멋진 유니폼을 단체로 입고 도로를 질주하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을 자주 마주칩니다. 메타세쿼이아 줄기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다리로 힘차게 페달을 돌리면서 순식간에 제 곁을 스쳐 가는 유선형의 헬멧들을 보노라면 그 뒤를 저도 따라붙고 싶어집니다. 특히 맑은 날에는 현란하게 돌아가는 두 바퀴에 그렇지 않아도 쨍쨍한 햇살이 부딪치고 쪼개져 황홀한 광채를 뿜어냅니다.

중력을 거부하고 제힘으로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대견하지만, 자전거와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은 장관입니다. 페달과 다리, 바퀴와 장딴지, 넓적다리와 엉덩이, 허리와 머리칼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신체를 마치 해부하듯이 정교하게 묘사한 시도 있습니다.


기발하지 않습니까? 자전거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의 에너지이고, 숨을 뿜어내는 콧구멍은 2기통 엔진이고, 그 엔진이 뿜어내는 숨이 맑은 바람으로 흩어진다니. 두루뭉수리 한 묘사보다 이렇게 디테일한 묘사가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갓 건져 올린 물고기 같은 시를 만들어냅니다.

시인의 관찰대로 열심히 다리를 오므렸다 펴면서 페달을 돌리다 보면, 마치 다리와 엉덩이 몸통과 머리가 하나로 이어진 다리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전거와 사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한 몸뚱이 같다는 착각도 들고요.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올림픽 경기 같은 데서 사이클 선수들이 전력 질주할 때면 정말 선수와 자전거가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런가 하면 두 바퀴가 언제나 함께 움직이려 하는 자전거의 속성에서 이런 심오한 삶의 속성을 캐내는 시인도 있습니다.


단 한 문장의 짧은 시지만 곱씹을수록 진한 생각이 우러나옵니다. 앞바퀴는 뒷바퀴를 떼내려고 죽어라 앞으로 질주합니다. 그러나 질주하면 할수록 뒷바퀴도 죽어라고 쫓아옵니다.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끈.

아마도 시인은 이 뒷바퀴를 떼낼 수 없고 함께 가야만 하는 앞바퀴의 운명에서 가장의 책임을 연상한 것은 아닐까요? 남편이나 아내, 자식 혹은 부모와 형제, 아무리 거부하려 발버둥 쳐도 함께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이인삼각의 존재들. 혹은 가족 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숙명적으로 짊어진 장애나 습성 등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교통수단에서 레저의 총아로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자전거 붐을 맞게 됩니다. 이전까지 자전거는 주로 버스나 승용차를 대신하는 단거리 교통 수단이거나 점포에서 물건을 실어나르는 실용적 운송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늘어나고 건강을 생각하는 스포츠와 레저 활동이 각광을 받으면서 자전거는 총아로 등장했습니다. 과도한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지구 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공해 교통수단이 다시 관심을 끈 것도 한 이유입니다.

자전거는 그야말로 건강을 위한 스포츠 중에서 인기가 높은 스포츠입니다. 우선 자전거는 하체의 근육을 주로 사용하는 유산소 운동의 대표적인 스포츠로 근력, 지구력 여기에다 심폐기능 등을 강화시키면서도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입니다. 달리는 재미까지 더해서 비교적 오래 타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홀로 즐겨도 좋고 무리를 지어 달려로 좋고, 아침 점심 저녁 언제라도 좋습니다. 겨울철 눈이 쌓여 미끄럽거나 여름철 폭우만 내리지 않는다면 사계절 운동이 가능합니다.

1791년 프랑스의 귀족 시브락이 나무로 만든 목마형 자전거를 고안한 이후 1839년 스코틀랜드의 대장장이 맥밀런은 페달을 발명해 발로 땅을 차지 않고도 달리는 자전거로 발전시켰습니다. 1885년 존 캠프 스탈리는 페달은 물론 체인과 기어를 부착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자전거 '로버'(Rover)를 생산해 자전거 대중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18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전거는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엔진을 부착한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짧은 전성기를 끝으로 쇠락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1970년대 다시 산악자전거 등 레저붐을 타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여기에는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는 더 이상 무한하지도 싸지도 않으며 지구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자각이 커지면서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로 사람들은 다시 눈을 돌렸습니다. 영국의 작가 웰스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른을 보면서 인류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자전거가 들어온 때는 1895년으로 갑신정변이 좌절되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 박사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굴러다니는 자전거는 몇 대나 될까요? 지난 2010년 약 620만대였던 자전거는 2012년에는 800만대, 2015년에는 1,022만대로 늘었고 2016년에는 1,200만대 정도로 추정됩니다. 자전거에 원동기를 단 전기자전거도 15만 대 정도가 보급됐습니다.

자전거 보급률도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 2012년 16.6%에서 2014년에는 29.8%, 2015년에는 35.3%, 그리고 2016년에는 34.8%까지 늘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선진국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네덜란드는 96.3%, 독일은 87.3%, 일본도 67.8%나 됩니다.

자전거 붐에 힘입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퉈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그 효용을 둘러싸고 논쟁이 분분한 4대강 사업에는 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는 사업도 들어있을 정도로 자전거의 활성화는 국가적 관심사였습니다. 4대강을 잇는 자전거도로만도 총연장은 1,757km나 됩니다. 서울에는 776km, 경기도는 무려 4,286km의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졌고 지방자치단체들도 앞다퉈 자전거 도로를 늘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고도 크게 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전거는 엄연히 도로교통법상 '차'라 간주돼 차도를 달려야 합니다. 자연 자동차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고 인도로 다니다 사람을 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에서 일어난 자전거 사고는 2012년 3,547건, 2013년 4,249건, 2014년 5,975건, 2015년에는 무려 6,975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해 평균 천 건 정도씩 늘고 있는 셈입니다.


자전거 사고로 인해 숨지는 사람도 한 해 평균 300명 정도나 됩니다. 특히 사망 원인의 80%가 머리 부상이라고 하니 헬멧을 꼭 착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13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는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성인들은 규제가 없어 착용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전거의 부활을 예측하지 못한 국내 생산업체들이 일찌감치 생산을 포기해 지금 우리나라 자전거의 80% 이상이 수입제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자전거들이 OEM(주문자 부착상품) 방식으로 중국과 동남아에서 생산돼 들어오고 있고, 특히 백만 원을 넘어가는 고급 자전거는 타이완과 미국 등 수입제품이 휩쓸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자전거 보급률을 감안할 때, 이제부터라도 국내 자전거 제조업체의 분발이 필요합니다. 특히 소득이 높아지고 자전거가 레저수단으로서의 자리를 단단히 매김 할수록 가볍고 튼튼한 고가의 자전거 수요가 많아지는 만큼 자전거 제조는 부가가치 높은 산업이기도 합니다.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고 지구도 생각하는 친환경 교통수단

자전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특히 평등사회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사회주의 계열의 철학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자전거는 값이 싸기 때문에 소득이 높지 않는 육체노동자나 농민도 탈 수 있는 데다 유지비도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한 시인은 자동차를 사거나 유지하는 데는 큰돈이 들고 또 면허증이라는 까다로운 장벽이 있지만, 자전거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데 착안해 두 탈 것의 관계에 대해 유쾌한 전복을 시도합니다.


유쾌하지 않습니까? 자전거가 퇴보한 것이 자동차라니! 죽어라고 일해서 비싼 자동차 사느라 통장을 탈탈 털고, 기름값 내랴 자동차세 내랴 보험료 내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 새듯 돈이 빠져나갑니다. 최종천 시인은 이런 복잡한 자동차 대신에 단순 명쾌한 자전거를 보면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명제로까지 사유를 확대해갑니다. 자전거는 진리처럼 열려 있고 진리는 자전거처럼 단순하다는 멋진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동차처럼 복잡한 삶보다는 자전거 같은 단순한 삶이 행복에 좀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산더미 같은 일에 치이고 가정에 얽매이고 빈약한 지갑에 발목을 잡히는 서민들은 언제나 유한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탈출을 꿈꿉니다. 그럴 때 자신의 두 발로 힘차게 페달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둥근 두 바퀴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꿈의 상징이고 자전거는 그 꿈을 실현해 주는 두 다리의 연장입니다. 젊은 나이에 전 세계를 자전거로 일주한 문종성 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의 역할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자전거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하나의 값진 수단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안정된 곳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서로 다른 인생의 우선순위가 있듯 나의 롤모델은 모범형 샐러리맨이 아니기에 초보 뱃사공의 핸디캡에도 밧줄을 풀고 뱃고동 소리를 힘차게 내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은 자전거를 통해 너무 빠른 도시의 속도에서 잃어버린 그리움을 복원하고 싶어 합니다.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 움푹 팬 바퀴 자국에서 여전히 가슴 한구석 남아 있는 사랑과 이별, 슬픔과 그리움의 희미한 이미지들을 발견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아예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자전거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글을 빨리 마무리하고 자전거를 끌고 안양천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생수 한 병 허리춤에 차고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녹음이 점령한 한강변을 씽씽 달려야겠습니다.

우주를 굴리는 두 바퀴에 두 다리와 엉덩이를 얹고 선유도 공원을 넘어 양화대교를 지나 달려야겠습니다. 혹시 또 압니까? 자전거를 세우고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금은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은 옛 애인을 만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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