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은 의인’

입력 2017.06.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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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은 의인’

박종철 고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은 의인’

1987년 1월 15 일 아침,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현 성균관대 교수)는 대검찰청 10층의 이홍규 공안 4과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차를 한잔 얻어 마시며 검찰 동향을 듣기 위해서였다.

"경찰들 큰일 났어"

이 과장이 소파에 앉으며 던진 이 한마디는 6 년 차 법조 담당 기자의 심상치 않은 예감으로 연결됐고, 박종철 고문 치사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을 세상에 알린 작은 계기가 됐다.

87년 1월 14일 오전 6시 40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의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박 군을 연행한 차는 오전 8시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경찰이 박 군을 연행한 목적은 수배 중이던 운동권 학생 박종운의 소재를 찾기 위해서 였다. 박종철이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지 않자 경찰은 물 고문을 시작했다. 치안본부 소속 경찰관들은 박종철의 손을 뒤로 묶인 채 그의 목을 무자비하게 물 속에 쳐 넣으며 고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사망했다.

박종철의 사망을 알린 중앙일보의 첫 보도.박종철의 사망을 알린 중앙일보의 첫 보도.

박 군의 죽음을 알린 중앙일보의 2단 기사가 나간 이후 각 언론들이 일제히 취재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강민창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박 군의 죽음이 자연사라는 주장을 폈다.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를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며 쓰러졌다"는 발표였다.

언론사들에 '보도지침'이 전달됐다. 신문은 사회면 3단 이하, 방송은 영상 없는 단신으로 처리하라는 지침이었다.

이 지침에 따라 1월 16일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조간은 3단 크기로 보도했다. MBC는 간추린 뉴스를 진행하던 신경민 기자(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가 40초 분량으로 해당 소식을 전했다. KBS는 아예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쇼크사라는 정부 발표는 거짓이고 실은 무자비한 물 고문 때문에 무고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의사 오연상의 증언 덕이었다.

중앙대 용산병원 수련의였던 그는 경찰의 긴급한 요청을 받고 치안본부 대공2부 5층 9호 조사실로 갔던 인물이다.

박종철의 물 고문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의사 오연상씨. [자료=동아일보 캡처]박종철의 물 고문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의사 오연상씨. [자료=동아일보 캡처]

오연상은 당시 언론에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박 군에 대한 소생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경찰관으로부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 군의 복부가 팽만해 있었고 폐에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축축했구요"

그의 인터뷰는 박종철에 대한 물고문이 가해졌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이렇게 세상에 묻힐 번 했던 박종철 죽음의 진실이 드러난 과정을 소개한 취재 기자의 책이 나왔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불루엘리펀트)이다.


저자인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은 1987년 사건 당시 입사 5년차로 동아일보 법조팀장이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같은 석간 신문으로서 치열한 기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1보를 중앙일보에게 놓쳤지만 이후 집요한 추적을 통해 박종철 군 사망 원인이 물고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사망 이후 벌어졌던 당국의 은폐 시도를 파헤쳤다.

황 고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보도 지침에 맞선 언론의 노력도 있었지만 용기 있는 'Deep Throat(딥스로트·내부고발자)'들의 역할도 컸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이 사건 진상 규명에 기여한 딥 스로트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하고 보충 취재를 했다. 황적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정구영 서울지검장,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30명에 가까운 관련자들을 만났고, 이들의 실명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명 만은 아직도 예외다.

박종철군 사망 사건은 3개월 뒤 또 한번의 반전을 맞았다. 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구속된 2명 외에 3명의 경찰이 고문에 더 가담했다는 내용이었다.

치안본부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박 하루 만에 사실임이 드러났고, 검찰은 경찰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경찰의 범인 축소가 드러난 것도 언론의 보도가 결정적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관련 경찰들이 연행되고 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관련 경찰들이 연행되고 있다.

동아일보에 이 제보를 한 사람은 치안본부 배모 총경이었다. 그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딥 스로트 가운데 배 모 총경의 풀 네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책이 나온 뒤에라도 그가 실명을 밝히고 경찰 조직을 살리기 위해 용기를 냈던 일을 회고해주기 바란다. 그는 역사의 의인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탈바꿈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탈바꿈했다.

21세 한 대학생의 죽음이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연결되기 까지는 무엇보다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학생들의 희생이 컸다. 김수환,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민주화 설계사들을 중심으로 각계 각층이 힘을 합쳤고, 민주화의 열기를 지면에 결집시켰던 언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6월 항쟁에서 언론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평가했다.

박종철 사건 관련 보도를 연구해온 심재철 교수(고려대 미디어학부)는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30년전 특종을 통해 박종철 사건의 실체를 공론장(公論場)에서 완전히 드러냈다"며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 불러도 손색 없는 보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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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철 고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은 의인’
    • 입력 2017-06-10 09:01:55
    취재K
1987년 1월 15 일 아침,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현 성균관대 교수)는 대검찰청 10층의 이홍규 공안 4과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차를 한잔 얻어 마시며 검찰 동향을 듣기 위해서였다.

"경찰들 큰일 났어"

이 과장이 소파에 앉으며 던진 이 한마디는 6 년 차 법조 담당 기자의 심상치 않은 예감으로 연결됐고, 박종철 고문 치사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을 세상에 알린 작은 계기가 됐다.

87년 1월 14일 오전 6시 40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의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박 군을 연행한 차는 오전 8시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경찰이 박 군을 연행한 목적은 수배 중이던 운동권 학생 박종운의 소재를 찾기 위해서 였다. 박종철이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지 않자 경찰은 물 고문을 시작했다. 치안본부 소속 경찰관들은 박종철의 손을 뒤로 묶인 채 그의 목을 무자비하게 물 속에 쳐 넣으며 고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사망했다.

박종철의 사망을 알린 중앙일보의 첫 보도.
박 군의 죽음을 알린 중앙일보의 2단 기사가 나간 이후 각 언론들이 일제히 취재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강민창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박 군의 죽음이 자연사라는 주장을 폈다.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를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며 쓰러졌다"는 발표였다.

언론사들에 '보도지침'이 전달됐다. 신문은 사회면 3단 이하, 방송은 영상 없는 단신으로 처리하라는 지침이었다.

이 지침에 따라 1월 16일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조간은 3단 크기로 보도했다. MBC는 간추린 뉴스를 진행하던 신경민 기자(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가 40초 분량으로 해당 소식을 전했다. KBS는 아예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쇼크사라는 정부 발표는 거짓이고 실은 무자비한 물 고문 때문에 무고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의사 오연상의 증언 덕이었다.

중앙대 용산병원 수련의였던 그는 경찰의 긴급한 요청을 받고 치안본부 대공2부 5층 9호 조사실로 갔던 인물이다.

박종철의 물 고문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의사 오연상씨. [자료=동아일보 캡처]
오연상은 당시 언론에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박 군에 대한 소생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경찰관으로부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 군의 복부가 팽만해 있었고 폐에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축축했구요"

그의 인터뷰는 박종철에 대한 물고문이 가해졌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이렇게 세상에 묻힐 번 했던 박종철 죽음의 진실이 드러난 과정을 소개한 취재 기자의 책이 나왔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불루엘리펀트)이다.


저자인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은 1987년 사건 당시 입사 5년차로 동아일보 법조팀장이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같은 석간 신문으로서 치열한 기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1보를 중앙일보에게 놓쳤지만 이후 집요한 추적을 통해 박종철 군 사망 원인이 물고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사망 이후 벌어졌던 당국의 은폐 시도를 파헤쳤다.

황 고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보도 지침에 맞선 언론의 노력도 있었지만 용기 있는 'Deep Throat(딥스로트·내부고발자)'들의 역할도 컸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이 사건 진상 규명에 기여한 딥 스로트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하고 보충 취재를 했다. 황적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정구영 서울지검장,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30명에 가까운 관련자들을 만났고, 이들의 실명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명 만은 아직도 예외다.

박종철군 사망 사건은 3개월 뒤 또 한번의 반전을 맞았다. 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구속된 2명 외에 3명의 경찰이 고문에 더 가담했다는 내용이었다.

치안본부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박 하루 만에 사실임이 드러났고, 검찰은 경찰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경찰의 범인 축소가 드러난 것도 언론의 보도가 결정적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관련 경찰들이 연행되고 있다.
동아일보에 이 제보를 한 사람은 치안본부 배모 총경이었다. 그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딥 스로트 가운데 배 모 총경의 풀 네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책이 나온 뒤에라도 그가 실명을 밝히고 경찰 조직을 살리기 위해 용기를 냈던 일을 회고해주기 바란다. 그는 역사의 의인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탈바꿈했다.
21세 한 대학생의 죽음이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연결되기 까지는 무엇보다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학생들의 희생이 컸다. 김수환,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민주화 설계사들을 중심으로 각계 각층이 힘을 합쳤고, 민주화의 열기를 지면에 결집시켰던 언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6월 항쟁에서 언론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평가했다.

박종철 사건 관련 보도를 연구해온 심재철 교수(고려대 미디어학부)는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30년전 특종을 통해 박종철 사건의 실체를 공론장(公論場)에서 완전히 드러냈다"며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 불러도 손색 없는 보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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