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만남] 김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화파를 긍정했다”

입력 2017.06.21 (15:44) 수정 2017.06.21 (16:0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636년 음력 12월, 청의 10여 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혹한과 눈보라를 몰고 서울로 침공해 왔다. 9년 전 정묘호란에 이은 두 번째 청의 침공, 병자호란이다. 방비도 없이 척화를 주장하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파천하려고 했으나, 청의 선봉대가 강화 방면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인조 임금과 조정 신료, 그리고 원래 남한 산성에 살았던 백성들이 죽음에 볼모로 잡힌 채 고립무원의 성에서 견뎌낸 47일 간의 모습을 낱낱이 들춰 보이는 소설이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는 성을 버리고 나갈 것을 주장하고, 김상헌이 앞장선 척화파는 성을 지키자고 역설한다. '살아서 임금과 백성들에게 도생(圖生)의 길을 열어주자'는 전자의 실리론에, 후자는 '죽어서 뜻을 세우자'는 명분론으로 맞섰다. 치열한 말싸움 끝에 인조는 주화파를 따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칸에게 항복하고 서울 도성으로 향한다. 임금과 조정신료가 떠난 산성에는 다시 봄이 오고, 백성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남한산성』은 2007년 초판이 인쇄된 이래 지금까지 99쇄 59만여 부가 출간됐다. 지난 6월 7일에는 소설의 내용을 형상화한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와 후기 성격의 '못다 한 말'을 곁들인 특별판 3천 부가 100쇄로 출간됐다.

『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

100쇄 특별판에 추간된 '못다 한 말' 에서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화와 척화로 나눠 피를 튀기며 싸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 겨울을 보냈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자신의 언어로는 그 침묵의 의미에 접근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이런 의미에서 『남한산성』은 '미완성의 습작'이라고 평한다.



아울러 『칼의 노래』에서도 백의 종군하는 이순신의 침묵의 내면에 대해서 표현할 수 없었고 『흑산』에서는 정약용의 배신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쓸 수 없었다며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언어가 허약함을 실토한다.

또 척화파로 청에 끌려간 오달제, 윤집, 홍익한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기세로 척화의 명분을 내세웠다는 이야기와 척화와 주화의 양 거두 김상헌과 최명길이 청나라의 심양 감옥에서 서로 화해했다는 이야기도 들려 준다. 같은 천민 출신으로 조선에 충성한 서날쇠와 청의 앞잡이로 조선을 짓눌렀던 정명수의 행적을 대비하고, 전쟁이 끝난 뒤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의 비극적 삶도 조명한다.

『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

이 외에도 작가가 『남한산성』 을 탈고한 지 몇 년 후 초겨울에 전라도 해남 우수영에서 열린 명량대첩 축제를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 오는 ktx열차에서 함께 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한산성』에 관해 나눈 대화도 실려 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훈 작가에게 작가는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이냐고 묻고 김 대통령 스스로는 최명길을 긍정한다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 " 그분은 김상헌의 우뚝한 뜻을 치하하면서도 현실의 땅위를 걸어간 최명길을 긍정하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아울러 "타협할 수 없는 이념의 지향성과 당면한 현실의 절벽 사이에 몸을 갈면서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 내며 길을 열어간 그분의 생애를 생각했다"고 대화의 소감도 피력해 놓았다.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100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는 현실의 길을 걸어간 김 전 대통령이 현실의 길을 택학 최명길을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며 조선시대의 언어와 관념의 문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통탄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실례로 북한과 관련한 정치권의 주적 논쟁을 들었다.



김 작가는 '엄연한 정치 . 군사적 실체인 북한을 놓고 주적이냐 국가냐 이렇게 묻는 것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정의냐 불의냐 도덕적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청나라를 대했던 것과 같은 아주 몽롱하고 무지한 관념에 빠지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김 작가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그 전에 명에 했던 것처럼 군사. 외교적 주권을 포기하면서 200여년 간 청나라에 굴욕적인 사대의 예를 바쳐왔다'며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된다'고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영광과 자존만으로 구성될 수 없으며 치욕스러운 역사도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대라는 것은 약자가 강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써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비록 무모한 시도로 실패는 했지만 병자호란으로 우리가 청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갚기 위해 효종이 펼친 북벌정책은 흐트러진 나라를 다시 챙기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라며 김 작가는 긍정적으로 봤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이 '북벌'에서 벗어나 청나라를 배우려는 '북학 운동'으로 돌아선 것은 조선 지식인들의 '자기 전환'으로 '조선 사회의 역동성과 조선의 주권의식'을 보여준 쾌거로 평가했다.



" 자기를 전환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죠. 시진핑의 (사드와 관련한) 그런 패권주의적인 발언 ... 그 발언은 그 사람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린 또 우리 자신을 자꾸만 전환해나가면서 그런 세계주의 패권주의에 대처하는 그런 삶의 길이 있는 것이죠." 김훈 작가는 '자기전환'을 무척 강조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기쇄신' '자기혁신'과 일맥상통하는 말로 여겨진다. 그리고 북학파가 조선을 개조하는 데 실패하고, 조선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정치권력의 '자기전환'이 미미했기 때문이라며 실존적 탐구보다 관념적 논쟁에 몰두하는 정치권의 현실 인식을 일갈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저자와 만남] 김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화파를 긍정했다”
    • 입력 2017-06-21 15:44:59
    • 수정2017-06-21 16:04:55
    취재K
1636년 음력 12월, 청의 10여 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혹한과 눈보라를 몰고 서울로 침공해 왔다. 9년 전 정묘호란에 이은 두 번째 청의 침공, 병자호란이다. 방비도 없이 척화를 주장하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파천하려고 했으나, 청의 선봉대가 강화 방면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인조 임금과 조정 신료, 그리고 원래 남한 산성에 살았던 백성들이 죽음에 볼모로 잡힌 채 고립무원의 성에서 견뎌낸 47일 간의 모습을 낱낱이 들춰 보이는 소설이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는 성을 버리고 나갈 것을 주장하고, 김상헌이 앞장선 척화파는 성을 지키자고 역설한다. '살아서 임금과 백성들에게 도생(圖生)의 길을 열어주자'는 전자의 실리론에, 후자는 '죽어서 뜻을 세우자'는 명분론으로 맞섰다. 치열한 말싸움 끝에 인조는 주화파를 따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칸에게 항복하고 서울 도성으로 향한다. 임금과 조정신료가 떠난 산성에는 다시 봄이 오고, 백성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남한산성』은 2007년 초판이 인쇄된 이래 지금까지 99쇄 59만여 부가 출간됐다. 지난 6월 7일에는 소설의 내용을 형상화한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와 후기 성격의 '못다 한 말'을 곁들인 특별판 3천 부가 100쇄로 출간됐다.

『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
100쇄 특별판에 추간된 '못다 한 말' 에서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화와 척화로 나눠 피를 튀기며 싸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 겨울을 보냈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자신의 언어로는 그 침묵의 의미에 접근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이런 의미에서 『남한산성』은 '미완성의 습작'이라고 평한다.



아울러 『칼의 노래』에서도 백의 종군하는 이순신의 침묵의 내면에 대해서 표현할 수 없었고 『흑산』에서는 정약용의 배신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쓸 수 없었다며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언어가 허약함을 실토한다.

또 척화파로 청에 끌려간 오달제, 윤집, 홍익한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기세로 척화의 명분을 내세웠다는 이야기와 척화와 주화의 양 거두 김상헌과 최명길이 청나라의 심양 감옥에서 서로 화해했다는 이야기도 들려 준다. 같은 천민 출신으로 조선에 충성한 서날쇠와 청의 앞잡이로 조선을 짓눌렀던 정명수의 행적을 대비하고, 전쟁이 끝난 뒤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의 비극적 삶도 조명한다.

『남한산성』100쇄 특별판에 실린 문봉선 화백의 수묵화
이 외에도 작가가 『남한산성』 을 탈고한 지 몇 년 후 초겨울에 전라도 해남 우수영에서 열린 명량대첩 축제를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 오는 ktx열차에서 함께 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한산성』에 관해 나눈 대화도 실려 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훈 작가에게 작가는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이냐고 묻고 김 대통령 스스로는 최명길을 긍정한다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 " 그분은 김상헌의 우뚝한 뜻을 치하하면서도 현실의 땅위를 걸어간 최명길을 긍정하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아울러 "타협할 수 없는 이념의 지향성과 당면한 현실의 절벽 사이에 몸을 갈면서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 내며 길을 열어간 그분의 생애를 생각했다"고 대화의 소감도 피력해 놓았다.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100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는 현실의 길을 걸어간 김 전 대통령이 현실의 길을 택학 최명길을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며 조선시대의 언어와 관념의 문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통탄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실례로 북한과 관련한 정치권의 주적 논쟁을 들었다.



김 작가는 '엄연한 정치 . 군사적 실체인 북한을 놓고 주적이냐 국가냐 이렇게 묻는 것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정의냐 불의냐 도덕적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청나라를 대했던 것과 같은 아주 몽롱하고 무지한 관념에 빠지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김 작가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그 전에 명에 했던 것처럼 군사. 외교적 주권을 포기하면서 200여년 간 청나라에 굴욕적인 사대의 예를 바쳐왔다'며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된다'고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영광과 자존만으로 구성될 수 없으며 치욕스러운 역사도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대라는 것은 약자가 강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써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비록 무모한 시도로 실패는 했지만 병자호란으로 우리가 청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갚기 위해 효종이 펼친 북벌정책은 흐트러진 나라를 다시 챙기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라며 김 작가는 긍정적으로 봤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이 '북벌'에서 벗어나 청나라를 배우려는 '북학 운동'으로 돌아선 것은 조선 지식인들의 '자기 전환'으로 '조선 사회의 역동성과 조선의 주권의식'을 보여준 쾌거로 평가했다.



" 자기를 전환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죠. 시진핑의 (사드와 관련한) 그런 패권주의적인 발언 ... 그 발언은 그 사람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린 또 우리 자신을 자꾸만 전환해나가면서 그런 세계주의 패권주의에 대처하는 그런 삶의 길이 있는 것이죠." 김훈 작가는 '자기전환'을 무척 강조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기쇄신' '자기혁신'과 일맥상통하는 말로 여겨진다. 그리고 북학파가 조선을 개조하는 데 실패하고, 조선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정치권력의 '자기전환'이 미미했기 때문이라며 실존적 탐구보다 관념적 논쟁에 몰두하는 정치권의 현실 인식을 일갈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