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림의 전형 ‘칠선계곡’…‘예약탐방제’의 결실

입력 2017.06.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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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림의 전형 ‘칠선계곡’…‘예약탐방제’의 결실

원시림의 전형 ‘칠선계곡’…‘예약탐방제’의 결실

하늘을 가린 나뭇잎, 대낮인데도 어둡습니다. 계곡 초입부터 지리산 정상까지 9.7km, 나무로 덮힌 숲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햇빛을 가리려 굳이 모자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반도 최고의 원시림, 지리산 칠선계곡 탐방로입니다.

칠선폭포칠선폭포


가뭄이 한창인데도 계곡엔 맑은 물이 가득합니다.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해서 가능한 겁니다. 탐방할 때 굳이 마실 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목이 마르면 계곡 물을 떠서 마셔도 좋습니다. 계곡을 따라 33개의 소(沼)와 7개의 폭포가 이어집니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가히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부를 만합니다.


길을 따라 우리나라 활엽수 극상림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극상림은 숲이 가장 성숙한 단계로, 세월이 흘러도 나무 종류나 양이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입니다. 칠선계곡에서는 극상림의 대표적 수종인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룹니다.


사람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무 표면이 서어나무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두 팔로 안기도 어려울 정도로 우람한 서어나무가 많습니다. 여느 숲에서는 보기 힘든 경관입니다.


맑은 계곡을 보면서 걷는 탐방로맑은 계곡을 보면서 걷는 탐방로

칠선계곡은 언제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해마다 5, 6월과 9, 10월 넉 달만 열립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두 차례, 월요일과 토요일, 미리 예약한 인원 60명만 탐방 가이드가 인솔합니다. 탐방 가이드는 지역 주민들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지만, 1999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러다 2008년, 국립공원 최초로 '예약탐방제'를 시행했습니다. 사실상 18년 동안 사람의 발길을 제한한 겁니다.


조릿대로 덮인 탐방로조릿대로 덮인 탐방로

탐방로 위로 쓰러진 고사목탐방로 위로 쓰러진 고사목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뚜렷했던 등산로가 이제는 일부 구간의 경우 흔적마저 희미합니다. 어디에서 계곡을 건너야 할지 뚜렷하지도 않습니다. 탐방 가이드가 없으면 길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의 간섭이 없다보니 식물뿐만 아니라 양서류와 파충류의 종과 개체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가슴곰의 핵심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예약탐방제' 10년의 성과입니다.


딱따구리가 판 구멍딱따구리가 판 구멍

오소리 굴오소리 굴

오소리 배설물오소리 배설물

탐방로 곳곳에서 야생동물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딱따구리가 먹이를 잡기 위해 파놓은 나무 구멍은 흔합니다. 탐방로 바로 옆에 10년째 굴을 파고 사는 오소리도 있습니다. 오소리뿐만 아니라 삵과 담비,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배설물도 눈에 띕니다. 다만 반달가슴곰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곰이 사람을 피해 탐방로와 일정 정도 떨어진 곳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누룩뱀누룩뱀

삼층폭포삼층폭포

수령 800년 추정 주목수령 800년 추정 주목

칠선계곡 상부 지역에서는 전형적인 아고산대 식생이 펼쳐집니다. 아고산대는 해발 1,500~2,500m에 이르는 지대입니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후로 구상나무와 주목 군락 그리고 야생화가 독특한 경관을 보여줍니다. 수령이 800년에 이르는 주목이 탐방로 옆에 서 있습니다.

6월에 만개한 진달래. 칠선계곡 상부 해발 1,700m 부근.6월에 만개한 진달래. 칠선계곡 상부 해발 1,700m 부근.

하지만 이런 칠선계곡도 사람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샛길로 산행하고 비박하거나 임산물을 캐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탐방로 바로 옆에 있던 주목이 2년 전에 가지 하나가 톱으로 잘려나갔습니다.

잘려나간 주목 가지잘려나간 주목 가지

취재진의 탐방 중에도 칠선계곡에서 취사하던 사람이 적발됐습니다. '예약탐방제'를 지키지 않고 몰래 들어온 데다가 계곡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습니다. 취사행위는 자칫 대형 산불의 위험도 있습니다. 불법 탐방이 적발되면 처음에는 1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두 번째 적발되면 20만 원, 세 번째는 30만 원입니다.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이 탐방로를 점검할 때마다 불법행위가 자주 적발됩니다. 우리 탐방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칠선계곡은 2027년까지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그동안은 예약탐방제로 출입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2027년 이후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과거처럼 완전한 개방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많아져야 소득이 늘 거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립공원공단 측은 칠선계곡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른 국립공원에서도 '예약탐방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라산과 덕유산, 설악산 등이 검토 대상입니다. 예약탐방제는 지금 당장, '소수의 이익' 보다는 지속 가능한, '모두의 혜택'을 추구합니다. 그런 철학이 앞으로 얼마나 확산될 수 있을 것인지, 칠선계곡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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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시림의 전형 ‘칠선계곡’…‘예약탐방제’의 결실
    • 입력 2017-06-24 09:01:03
    취재K
하늘을 가린 나뭇잎, 대낮인데도 어둡습니다. 계곡 초입부터 지리산 정상까지 9.7km, 나무로 덮힌 숲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햇빛을 가리려 굳이 모자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반도 최고의 원시림, 지리산 칠선계곡 탐방로입니다.

칠선폭포

가뭄이 한창인데도 계곡엔 맑은 물이 가득합니다.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해서 가능한 겁니다. 탐방할 때 굳이 마실 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목이 마르면 계곡 물을 떠서 마셔도 좋습니다. 계곡을 따라 33개의 소(沼)와 7개의 폭포가 이어집니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가히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부를 만합니다.


길을 따라 우리나라 활엽수 극상림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극상림은 숲이 가장 성숙한 단계로, 세월이 흘러도 나무 종류나 양이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입니다. 칠선계곡에서는 극상림의 대표적 수종인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룹니다.


사람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무 표면이 서어나무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두 팔로 안기도 어려울 정도로 우람한 서어나무가 많습니다. 여느 숲에서는 보기 힘든 경관입니다.


맑은 계곡을 보면서 걷는 탐방로
칠선계곡은 언제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해마다 5, 6월과 9, 10월 넉 달만 열립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두 차례, 월요일과 토요일, 미리 예약한 인원 60명만 탐방 가이드가 인솔합니다. 탐방 가이드는 지역 주민들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지만, 1999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러다 2008년, 국립공원 최초로 '예약탐방제'를 시행했습니다. 사실상 18년 동안 사람의 발길을 제한한 겁니다.


조릿대로 덮인 탐방로
탐방로 위로 쓰러진 고사목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뚜렷했던 등산로가 이제는 일부 구간의 경우 흔적마저 희미합니다. 어디에서 계곡을 건너야 할지 뚜렷하지도 않습니다. 탐방 가이드가 없으면 길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의 간섭이 없다보니 식물뿐만 아니라 양서류와 파충류의 종과 개체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가슴곰의 핵심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예약탐방제' 10년의 성과입니다.


딱따구리가 판 구멍
오소리 굴
오소리 배설물
탐방로 곳곳에서 야생동물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딱따구리가 먹이를 잡기 위해 파놓은 나무 구멍은 흔합니다. 탐방로 바로 옆에 10년째 굴을 파고 사는 오소리도 있습니다. 오소리뿐만 아니라 삵과 담비,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배설물도 눈에 띕니다. 다만 반달가슴곰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곰이 사람을 피해 탐방로와 일정 정도 떨어진 곳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누룩뱀
삼층폭포
수령 800년 추정 주목
칠선계곡 상부 지역에서는 전형적인 아고산대 식생이 펼쳐집니다. 아고산대는 해발 1,500~2,500m에 이르는 지대입니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후로 구상나무와 주목 군락 그리고 야생화가 독특한 경관을 보여줍니다. 수령이 800년에 이르는 주목이 탐방로 옆에 서 있습니다.

6월에 만개한 진달래. 칠선계곡 상부 해발 1,700m 부근.
하지만 이런 칠선계곡도 사람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샛길로 산행하고 비박하거나 임산물을 캐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탐방로 바로 옆에 있던 주목이 2년 전에 가지 하나가 톱으로 잘려나갔습니다.

잘려나간 주목 가지
취재진의 탐방 중에도 칠선계곡에서 취사하던 사람이 적발됐습니다. '예약탐방제'를 지키지 않고 몰래 들어온 데다가 계곡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습니다. 취사행위는 자칫 대형 산불의 위험도 있습니다. 불법 탐방이 적발되면 처음에는 1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두 번째 적발되면 20만 원, 세 번째는 30만 원입니다.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이 탐방로를 점검할 때마다 불법행위가 자주 적발됩니다. 우리 탐방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칠선계곡은 2027년까지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그동안은 예약탐방제로 출입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2027년 이후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과거처럼 완전한 개방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많아져야 소득이 늘 거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립공원공단 측은 칠선계곡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른 국립공원에서도 '예약탐방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라산과 덕유산, 설악산 등이 검토 대상입니다. 예약탐방제는 지금 당장, '소수의 이익' 보다는 지속 가능한, '모두의 혜택'을 추구합니다. 그런 철학이 앞으로 얼마나 확산될 수 있을 것인지, 칠선계곡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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