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권력자,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

입력 2017.07.0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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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8월 어느 깊은 밤, 조선 한양에서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목이 베인 채 발견된 피해자는 재상이자 세자 이방석의 스승인 정도전,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다. 고통스럽고 잔인한 수법을 택한 범인은 바로 왕자 이방원.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반란 예비 음모죄의 누명을 씌웠다.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기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묘, 사직의 도움을 힘입어 죄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왕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태조실록, 태조 7년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 다음으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서 아쉬울 게 없었을 그가 정말 역모를 꾸몄을까. 정도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을 풀기 위해 사료를 토대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직접 그날의 현장을 재현했다. 석연치 않은 단서들, 과연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정도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정도전 살해 사건 발생 17일 전,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휘하(麾下)에게 벌을 내릴 것을 태조 이성계에게 상언한 것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왕실의 지친이고, 유만수와 정신의 등은 원종 공신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외방 여러 진의 절제사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 태조실록, 7년

상황은 이렇다. 조선 초, 정도전은 명(明)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전시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 훈련을 시행한다. 그러나 왕실과 종친들에게 진법 훈련은 사실상 사병 해체였다. 사병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방원은 진법 훈련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왕자 신분의 이방원 대신 휘하가 50대 태형을 받게 된다. 이는 사실상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내린 벌이나 다름없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동지에서 원수로, 엇갈린 운명

1392년 8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44명의 개국공신을 발표한다.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누구보다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이 컸지만,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또한, 같은 날 왕세자가 결정되나 이 역시 이방원은 아니었다. 세자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11살 막내 이방석이었다.

개국공신 지명과 세자책봉의 실무책임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그를 죽인 이방원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한때 대업의 뜻을 함께 품고 조선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동지 정도전과 이방원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7월 2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편에서 정도전이 살해된 그 날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본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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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최고 권력자,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
    • 입력 2017-07-02 08:02:01
    방송·연예
1398년 8월 어느 깊은 밤, 조선 한양에서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목이 베인 채 발견된 피해자는 재상이자 세자 이방석의 스승인 정도전,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다. 고통스럽고 잔인한 수법을 택한 범인은 바로 왕자 이방원.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반란 예비 음모죄의 누명을 씌웠다.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기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묘, 사직의 도움을 힘입어 죄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왕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태조실록, 태조 7년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 다음으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서 아쉬울 게 없었을 그가 정말 역모를 꾸몄을까. 정도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을 풀기 위해 사료를 토대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직접 그날의 현장을 재현했다. 석연치 않은 단서들, 과연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정도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정도전 살해 사건 발생 17일 전,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휘하(麾下)에게 벌을 내릴 것을 태조 이성계에게 상언한 것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왕실의 지친이고, 유만수와 정신의 등은 원종 공신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외방 여러 진의 절제사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 태조실록, 7년

상황은 이렇다. 조선 초, 정도전은 명(明)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전시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 훈련을 시행한다. 그러나 왕실과 종친들에게 진법 훈련은 사실상 사병 해체였다. 사병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방원은 진법 훈련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왕자 신분의 이방원 대신 휘하가 50대 태형을 받게 된다. 이는 사실상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내린 벌이나 다름없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동지에서 원수로, 엇갈린 운명

1392년 8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44명의 개국공신을 발표한다.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누구보다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이 컸지만,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또한, 같은 날 왕세자가 결정되나 이 역시 이방원은 아니었다. 세자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11살 막내 이방석이었다.

개국공신 지명과 세자책봉의 실무책임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그를 죽인 이방원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한때 대업의 뜻을 함께 품고 조선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동지 정도전과 이방원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7월 2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편에서 정도전이 살해된 그 날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본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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