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인도로 간 인민군 포로…지금은 무엇을 할까?

입력 2017.07.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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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제가 데리고 온 인민군 포로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올해 104살인 D.M 센 예비역 준장. 6·25 전쟁에 참전했던 인도인 예비역 장성은 먼저 인민군 포로들 이야기를 꺼냈다. 중립국송환위원회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6·25전쟁 직후 인도로 오게 된 6명의 인민군 포로들을 '내가 데려온 포로'라고 불렀다.체력이 약해서 온종일을 침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센 예비역 준장, 그의 입에서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소재가 됐던 중립국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반공 포로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부분 황무지…서울엔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어

1914년 태어난 센 예비역 준장은 30대 후반에 법무관 자격으로 전쟁 말기인 한국에 파견됐다. 당시에는 이미 휴전협상이 진행된 상황이었고, 그의 임무는 중립국 포로송환 업무였다. 센 예비역 준장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웨덴에서 온 위원회 대표들과 이견을 조율하는 의장 역할도 맡았다고 자신의 약력에서 설명했다.

"당시 서울에는 폭격으로 인해 제대로 모양을 갖춘 집이 한 채도 없었고, 판문점 인근에는 화장실도 없어서 풀숲에서 볼일을 봐야 할 정도였습니다."


센 예비역 준장은 당시 전쟁의 참상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 온 특파원이라고 소개했더니 그는 명확하게 영어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폭격의 상처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던 서울 시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지워진 도시 같았다"고 회상했다. 또 판문점을 중심으로 38선이 동서로 가로지른 상황에 관해서도 설명했는데, 민족 분단의 시작점이었던 셈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인도는 6·25 전쟁 당시 중립국을 표방했다. 따라서 전투부대를 파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에 한국을 지원할 것을 권고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덴마크, 노르웨이 등과 함께 의료지원단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300여 명의 공정 야전병원 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물론 센 준장은 이와 별도로 전쟁포로 송환을 위해 파견한 포로감시임무부대 차원에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과 인도의 깊은 인연의 시작을 이때로부터 보는 시각도 있다. 1953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구성된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의장국을 인도가 맡았기 때문이다.

1953년부터 1년 가까이 인도 포로감시부대는 수천 명의 인력이 파병돼 정전 후 포로 감시 임무와 한국과 유엔의 전후 처리 업무를 처리는 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미스터(Mr.) 현', 그는 아직도 인도에 살아 있다

센 준장은 인도로 온 인민군 포로가 매우 잘 살아 있었고, 사업도 꽤 번창했다고 근황을 기억하고 있다. 주인도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양계업과 가발사업으로 돈을 번 반공 포로는 2명 정도로 압축된다.

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사고로 이미 숨진 A 씨와 현재도 생존해 있는 85살의 현동화 전 주인도한인회장.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상황에 모두 환멸을 느끼고 중간에 생을 마감했지만, 인도로 온 반공 포로들은 한인회장을 역임하는 등 인도 각계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교민들은 기억한다.

주인도 한국대사관주인도 한국대사관

최호권 주인도한국대사관 총영사는 델리에 거주하고 있는 현동화 전 한인회장을 만나고 왔다. 고령이라 거동이 불편한 줄만 알았는데, 건강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설명을 했다.

최 총영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현 전 회장은 딸이 사는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올해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몸 한쪽에 마비가 왔는지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진 상태"라고 전했다.

현 전 한인회장은 1932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민군 중위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강원도에서 부상한 뒤 요양 중에 국군에 귀순했다고 밝혔다.

이후 부터 그의 삶은 남북한의 분단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반공 포로로 서대문과 인천 형무소를 거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현 전 한인회장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 남과 북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제3국행을 택한 것이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1954년 2월 동료 반공포로 80여 명과 함께 수송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난 그는 인도에 도착했다. 우선 몸을 추스르며 반공 포로를 받아주기로 한 멕시코행을 시도했지만, 받아주겠다는 답이 오지 않아 결국엔 인도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 전 회장은 다른 반공 포로들과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고 종잣돈을 마련해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댔다. 가발을 수출하는 무역업으로 큰돈을 번 것이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참전용사인 센 준장이 기억하는 현 회장과 C 씨의 일대기일 것이다. 센 준장은 이들의 인도 정착을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당시 전쟁포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센 준장 인터뷰중에서)

센 예비역 준장의 딸과 사위(전 주한국인도대사), 손녀센 예비역 준장의 딸과 사위(전 주한국인도대사), 손녀

센 준장의 사위는 주한국인도대사를 지낸 레이 씨이며, 손녀사위도 인도 외무부에서 동아시아 담당을 하고 있다. 그리고 증손녀가 서울 순천향대 병원에서 태어나는 등 3, 4대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민군과 북한 주민도 치료해야 했다."

인도군은 대규모 의료지원 부대 참전으로도 6·25전쟁사에 기록돼 있다. 인도의 의무지원부대는 1954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600여 명이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입원환자 2만 명과 외래 환자 10만 명 이상을 돌본 것으로 기록돼 있다. 60공정 야전병원은 대구 주둔 부대와 의정부 등 전선 지원부대로 나눠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뉴델리의 퇴역장성 주거지에서 만난 배너지 예비역 중장은 바로 이 부대 소속이었다.1926년생이니 이미 아흔 살이 넘었다. 6.25 전쟁 말기인 1953년부터 54년까지 한국에서 의료지원부대원으로 근무했고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전방에서 포탄이 빗발칠 때 야전병원에서 한 민간인 환자가 너무 떨고 있길래 제가 몸으로 막아주면서 '여기 같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던 때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는 모든 당시 일정을 대부분 기록해두고 있었다. 폭격과 전선의 이동, 매우 급한 상황이 대부분일 텐데 날짜까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이런 기록은 가끔 당시를 회상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인민군 포로와 북한 민간인도 치료했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치열한 전선에서도 다친 사람은 누구나 치료해야 한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켰던 셈이다.

기억에서 사라진 참전용사들

주인도 한국대사관은 인도가 6·25전쟁 당시 파견한 부대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부대를 직접 방문을 하기도 하는데, 의료지원을 위해 파견한 60공정 야전병원 부대에서는 당시 사진 등 귀중한 사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이런 사료를 모아 인도 수도 뉴델리주재한국대사관에서 인도 참전부대 기념사진전을 개최했다.


현재 주인도 한국대사관이 파악하고 있는 인도 참전용사와 미망인과 자녀는 24가족 정도, 이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참전용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지난달에는 대사관저에서 참전용사와 가족 초청행사를 개최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센 준장과 배너지 중장은 참석하지 못했다. 고령으로 접어들어서 외부활동이 힘든 참전용사들이 대부분이다.


주인도 한국대사관은 기록에 남지 않은 참전용사 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의 의료지원부대 이외에도 수천 명의 포로 관리 부대가 1953년 8월부터 임무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더 많은 참전용사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인도 참전용사를 위한 사회공헌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한 대기업은 지난해부터 생활 여건이 열악하고 낡은 주거환경에서 거주하는 인도 참전용사와 후손의 주택을 개보수해주고 있다.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야전 의료부대를 6·25전쟁에 파병한 인도. 당시 중립국이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도우려고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이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인도 의료부대는 낙하산 부대여서 전투가 한창인 전장 한복판에 투하됐다고 한다.목숨이 경각에 달린 부상한 병사들이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전장에서 실시한 2천 여 차례가 넘는 수술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이 때문에 의료지원 5개 나라 가운데 인도 부대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참전용사의 후손까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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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07 16:34:51
    특파원 리포트
"인도로 제가 데리고 온 인민군 포로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올해 104살인 D.M 센 예비역 준장. 6·25 전쟁에 참전했던 인도인 예비역 장성은 먼저 인민군 포로들 이야기를 꺼냈다. 중립국송환위원회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6·25전쟁 직후 인도로 오게 된 6명의 인민군 포로들을 '내가 데려온 포로'라고 불렀다.체력이 약해서 온종일을 침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센 예비역 준장, 그의 입에서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소재가 됐던 중립국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반공 포로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부분 황무지…서울엔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어

1914년 태어난 센 예비역 준장은 30대 후반에 법무관 자격으로 전쟁 말기인 한국에 파견됐다. 당시에는 이미 휴전협상이 진행된 상황이었고, 그의 임무는 중립국 포로송환 업무였다. 센 예비역 준장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웨덴에서 온 위원회 대표들과 이견을 조율하는 의장 역할도 맡았다고 자신의 약력에서 설명했다.

"당시 서울에는 폭격으로 인해 제대로 모양을 갖춘 집이 한 채도 없었고, 판문점 인근에는 화장실도 없어서 풀숲에서 볼일을 봐야 할 정도였습니다."


센 예비역 준장은 당시 전쟁의 참상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 온 특파원이라고 소개했더니 그는 명확하게 영어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폭격의 상처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던 서울 시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지워진 도시 같았다"고 회상했다. 또 판문점을 중심으로 38선이 동서로 가로지른 상황에 관해서도 설명했는데, 민족 분단의 시작점이었던 셈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인도는 6·25 전쟁 당시 중립국을 표방했다. 따라서 전투부대를 파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에 한국을 지원할 것을 권고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덴마크, 노르웨이 등과 함께 의료지원단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300여 명의 공정 야전병원 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물론 센 준장은 이와 별도로 전쟁포로 송환을 위해 파견한 포로감시임무부대 차원에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과 인도의 깊은 인연의 시작을 이때로부터 보는 시각도 있다. 1953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구성된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의장국을 인도가 맡았기 때문이다.

1953년부터 1년 가까이 인도 포로감시부대는 수천 명의 인력이 파병돼 정전 후 포로 감시 임무와 한국과 유엔의 전후 처리 업무를 처리는 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미스터(Mr.) 현', 그는 아직도 인도에 살아 있다

센 준장은 인도로 온 인민군 포로가 매우 잘 살아 있었고, 사업도 꽤 번창했다고 근황을 기억하고 있다. 주인도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양계업과 가발사업으로 돈을 번 반공 포로는 2명 정도로 압축된다.

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사고로 이미 숨진 A 씨와 현재도 생존해 있는 85살의 현동화 전 주인도한인회장.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상황에 모두 환멸을 느끼고 중간에 생을 마감했지만, 인도로 온 반공 포로들은 한인회장을 역임하는 등 인도 각계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교민들은 기억한다.

주인도 한국대사관
최호권 주인도한국대사관 총영사는 델리에 거주하고 있는 현동화 전 한인회장을 만나고 왔다. 고령이라 거동이 불편한 줄만 알았는데, 건강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설명을 했다.

최 총영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현 전 회장은 딸이 사는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올해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몸 한쪽에 마비가 왔는지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진 상태"라고 전했다.

현 전 한인회장은 1932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민군 중위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강원도에서 부상한 뒤 요양 중에 국군에 귀순했다고 밝혔다.

이후 부터 그의 삶은 남북한의 분단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반공 포로로 서대문과 인천 형무소를 거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현 전 한인회장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 남과 북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제3국행을 택한 것이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1954년 2월 동료 반공포로 80여 명과 함께 수송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난 그는 인도에 도착했다. 우선 몸을 추스르며 반공 포로를 받아주기로 한 멕시코행을 시도했지만, 받아주겠다는 답이 오지 않아 결국엔 인도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 전 회장은 다른 반공 포로들과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고 종잣돈을 마련해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댔다. 가발을 수출하는 무역업으로 큰돈을 번 것이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참전용사인 센 준장이 기억하는 현 회장과 C 씨의 일대기일 것이다. 센 준장은 이들의 인도 정착을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당시 전쟁포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센 준장 인터뷰중에서)

센 예비역 준장의 딸과 사위(전 주한국인도대사), 손녀
센 준장의 사위는 주한국인도대사를 지낸 레이 씨이며, 손녀사위도 인도 외무부에서 동아시아 담당을 하고 있다. 그리고 증손녀가 서울 순천향대 병원에서 태어나는 등 3, 4대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민군과 북한 주민도 치료해야 했다."

인도군은 대규모 의료지원 부대 참전으로도 6·25전쟁사에 기록돼 있다. 인도의 의무지원부대는 1954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600여 명이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입원환자 2만 명과 외래 환자 10만 명 이상을 돌본 것으로 기록돼 있다. 60공정 야전병원은 대구 주둔 부대와 의정부 등 전선 지원부대로 나눠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뉴델리의 퇴역장성 주거지에서 만난 배너지 예비역 중장은 바로 이 부대 소속이었다.1926년생이니 이미 아흔 살이 넘었다. 6.25 전쟁 말기인 1953년부터 54년까지 한국에서 의료지원부대원으로 근무했고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전방에서 포탄이 빗발칠 때 야전병원에서 한 민간인 환자가 너무 떨고 있길래 제가 몸으로 막아주면서 '여기 같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던 때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는 모든 당시 일정을 대부분 기록해두고 있었다. 폭격과 전선의 이동, 매우 급한 상황이 대부분일 텐데 날짜까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이런 기록은 가끔 당시를 회상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인민군 포로와 북한 민간인도 치료했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치열한 전선에서도 다친 사람은 누구나 치료해야 한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켰던 셈이다.

기억에서 사라진 참전용사들

주인도 한국대사관은 인도가 6·25전쟁 당시 파견한 부대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부대를 직접 방문을 하기도 하는데, 의료지원을 위해 파견한 60공정 야전병원 부대에서는 당시 사진 등 귀중한 사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이런 사료를 모아 인도 수도 뉴델리주재한국대사관에서 인도 참전부대 기념사진전을 개최했다.


현재 주인도 한국대사관이 파악하고 있는 인도 참전용사와 미망인과 자녀는 24가족 정도, 이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참전용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지난달에는 대사관저에서 참전용사와 가족 초청행사를 개최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센 준장과 배너지 중장은 참석하지 못했다. 고령으로 접어들어서 외부활동이 힘든 참전용사들이 대부분이다.


주인도 한국대사관은 기록에 남지 않은 참전용사 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의 의료지원부대 이외에도 수천 명의 포로 관리 부대가 1953년 8월부터 임무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더 많은 참전용사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인도 참전용사를 위한 사회공헌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한 대기업은 지난해부터 생활 여건이 열악하고 낡은 주거환경에서 거주하는 인도 참전용사와 후손의 주택을 개보수해주고 있다.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야전 의료부대를 6·25전쟁에 파병한 인도. 당시 중립국이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도우려고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이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인도 의료부대는 낙하산 부대여서 전투가 한창인 전장 한복판에 투하됐다고 한다.목숨이 경각에 달린 부상한 병사들이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전장에서 실시한 2천 여 차례가 넘는 수술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이 때문에 의료지원 5개 나라 가운데 인도 부대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참전용사의 후손까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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