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릴레이⑤] ‘21세기 히피’ 화지 “쾌락주의 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입력 2017.07.21 (14:3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힙합의 매력을 들여다보는 '래퍼릴레이'의 다섯 번째 주자는 화지(본명 : 송석하, 29)다.

화지는 첫 번째 정규앨범 한 장으로 힙합 신에서 신예 래퍼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2번의 정규앨범을 냈고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두 차례 받았다. 자신이 낸 결과물로 인정받은 래퍼라고 할 수 있다.

화지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리리시스트(lyricist, 서정시인) 래퍼로 손꼽힌다. 그의 랩은 시나 소설에 비유된다. 가사의 서사와 비유가 기발함을 넘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일관적으로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화지의 음악은 그림처럼 생생하지만 화지가 어떤 사람인지 생생하게 설명하는 건 어렵다. 그는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이고, 어두우면서도 밝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히피'의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이상향과 신념에 대한 강한 염원을 드러내며 세상의 기준과 쾌락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힙합의 흔한 주제인 여자나 성에 대해 얘기할 때도 이성과 쾌락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을 말한다. 인터뷰에서는 "돈 벌어서 쾌락주의합시다. 시간이 없어요"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은 마약, 사치, 육체적 감각 같은 것들과 뉘앙스를 달리했다.

까만색 선글라스를 낀 화지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카페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화지는 작지 않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작업을 하다 나온 그는 아직 음악에 취해있었다.

사진 : 인플래닛 제공사진 : 인플래닛 제공

▲흥이 많으신 것 같아요.

아 놀다 와서요. 8월 말에 하는 인플래닛(화지의 소속사) 레이블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다 같이 모여서 제약 없는 창작 세션 같은 걸 하다 왔어요. 다같이 0부터 '이렇게 섞으면 좋지 않을까' 얘기하면서 작업하는 방식이에요. 음악적 이해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시너지가 생기잖아요.

▲콘서트 준비 말고는 또 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안에 나올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너무 진지한 음악 말고 쉬면서 가볍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 펑크적은 요소를 녹였어요. 오넛(O'NUT)과 늘 같이 하는 영소울이랑 셋이 회사에 모여서 현장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또 게임 쪽에 관심이 많아서 반항적인 게임 매체를 준비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게임을 중독이라고 하는데 게임은 영화나 다른 일방적인 매체에서 할 수 없는, 경험하게 하는 그런 대단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본업은 음악이에요(웃음).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건 그냥 취미예요. 모든 제 창작은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말려 죽이는 창작 기운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것도 있고요. 한국이 어떤 면에서 창의적인 사람보다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원하니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발악하면서 사는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은 크게 망하든지 크게 잘 되든지 할 텐데 후자였으면 좋겠어요(웃음).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데, 혹시 부모님도 예술을 하셨나요?

예술을 하진 않았는데 외가 쪽이 정서적으로 예술혼이 있었어요. 다 그쪽으로 하고 싶었지만 억압해서요. 부모님 세대가 그랬잖아요. 다행히 저희 아버지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서포트를 해주셨어요. 근데 솔직히 제가 설득한 것도 있어요. 하고 싶은 건 어느 정도 싸워서 지켜내야 하는 것 같아요.

화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 사진 : 화지 SNS화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 사진 : 화지 SNS

화지는 5살 때 아버지 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후에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화지는 혼자 미국에 남아 대학 공부를 마쳤다.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힙합을 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 온 친구 영소울이 다니아믹듀오의 'Taxi Driver' 앨범을 들려주면서 한국 힙합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다른 한국 힙합 앨범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 앨범만 5천 번 가까이 들으면서 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래퍼 팔로알토를 보며 긍정적이고 이상향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힙합신에 뛰어들었다.

화지는 친구 영소울(솔자-티)과 2009년 팀 '라디오스타'로 데뷔했지만 영소울이 입대하자 화지 혼자 솔로로 활동했다. 화지는 2012년 EP 앨범 '화지'를 발표했고, 2014년과 2016년에 정규앨범 'Eat'과 'ZISSOU(지쏘)'를 발매했다. 그때마다 손꼽히는 '리리시스트 래퍼'로 호평받으며 2015년,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받았다.

▲첫 EP 앨범이나 정규 앨범 1집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정신병이 있었다'는 얘기도 했는데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순간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괴로운 거예요. 여기가 지옥이고 생존이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지옥이 '내가 살 거야. 넌 죽어' 이런 곳 같아요. 우리 엄마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저도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종교를 갖고 있는데 거기서 가르치는 교리와 세상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정말 지옥 같더라고요. '이게 다였어?' 처음에 그런 실망감이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감정 기복이 좀 있는 편인가요?

나이가 먹다 보니까 조금씩 조절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제는 컨트롤이 많이 돼서 괜찮아요.

▲첫 EP 앨범 타이틀곡이 '격변'인데요. 좀 여린 사람들이 오히려 센 척하는 게 있잖아요. 격변이라는 노래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외로움이 벌이라면 그 또한 나 달게 받을게, 나의 업이라며. 맘을 굳게 걸어잠근 게 //
나쁜 것 만은 아냐. 나를 좋다 하거나 싫다거나 이 모습이 나야. //
근데 때로는 나 밤에 잠을 설쳐. 이대로 괜찮을까, 내 분노가 내 힘의 원천? //
가끔은 나 인간 된 걱정들에 뒤섞여 나를 열어줄 당신을 기다려, 이런 내 격변 속에서"
(EP 앨범 '화지'의 타이틀곡 '격변' 중)

그때 심적으로 힘들었던 걸 솔직하게 풀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저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당시에 래퍼가 항상 세야 되고 그런 게 있었는데 진짜 속마음을 꺼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잘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같은 주제로 만족할 수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이러면서 공감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을 한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테라피에요. 이런 미친놈 같은 생각을 풀어낼 수 있고 이런 거에 동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치유되니까. 그런데 다시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왜요?

음악이 분풀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힙합은 원래 파티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 도구나 삶의 방식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우울하게 안 가고 싶어요. 제가 창작적 기로에서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화지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받았다. / 사진 : 인플래닛 제공화지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받았다. / 사진 : 인플래닛 제공

화지는 자타 공인 리리시스트 래퍼다. 리리시스트는 랩을 잘하면서도 가사적으로 뛰어난 래퍼에게 붙는 수식어다. 래퍼의 가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라임 구성 능력, 스토리텔링, 표현 등 전체적으로 작사 능력과 비슷하다. 화지는 한영혼용을 배제 한 깊이 있는 가사와 유려한 플로우가 특징이다.

▲가사에 그렇게 신경 쓰는 이유가 있나요?

큰 의도는 없고 그냥 제가 그런 사람이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듣고 자란 앨범들이 작가주의적인 리리시스트 앨범이어서 메시지가 주는 감동을 좋아해요. 그런데 요새는 일단 듣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데 한편으로 맞는 것 같아요. 저 자체를 타악기라고 생각할 때 악기로서 내가 좋은 악기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그 순간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려고 더 신경 쓰고 있어요. 가사는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하고 그 위에 음악적인 디테일에서 완성도를 더 높이려고 해요.

▲보통 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글 쓰는 걸 좋아하거나 어렸을 때 꿈이 시인이거나 그러던데요.

이거 아니었으면 글 쓰는 일을 했을 거예요. 근데 음악은 듣다 보면 저절로 설득력이 생기잖아요. 그냥 듣다보면 '어 좋다, 뭐지?' 하면서 진지하게 듣게 되고. 그게 신기하지 않아요? 글보다 음악이 세뇌하듯이 전달하는 포맷이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가사를 100% 본심이라고 볼 순 없지만, EP 'Glow in the Dark'의 'Intro'에서 '디스(diss) 안 한다'는 가사를 보고 의아했어요. 방송의 영향인지 몰라도 힙합에서 디스는 한 문화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예전에 했던 거라 가사가 기억이 안 나요.(웃음) 그런데 디스가 문화적 요소는 아닌 것 같아요. 싸우는 게 문화가 아니라 이 문화 안에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다른 기자가 기자분 글이 구리다고 기사로 냈어요. 그럼 다시 기사로 기사를 디스 해야죠. 미국에서는 '내가 랩으로 너의 커리어를 끝내야겠다'는 각오로 디스를 해요. 디스하다가 죽기도 하고요. 그런 게 디스고 우리나라 방송에서 하는 배틀랩은 상대랑 친해도 이 관중 앞에서 상대를 어떻게 농락하느냐의 스킬적인 부분이니까. 제 생각에는 방송에서 하는 배틀랩과 디스는 다른 것 같아요.

▲힙합신에서 가요적인 랩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요. 본인의 곡 '들개'에서도 이런 뉘앙스의 가사를 썼어요.

커머셜한 음악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발 걸치는 게 싫어요. 랩인 이유로 힙합인 척하는 거요. 랩은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그 안에 어떤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차이인데, 진짜 힙합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는 것 같아요. 커머셜 트랙 만들고 돈 벌고 싶은 게 뭐가 나빠요. 근데 힙합이 아닌 걸 해놓고 그래도 난 힙합.. 하니까.

▲힙합 신이 좁은데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요?

이 직업의 장점이 안 맞는 사람들하고는 안 하면 돼요. 강요할 사람이 없다는 게 좋아요.

▲솔직한 성격인 것 같은데 친구의 음악이 별로일 때는 어떻게 해요? "구려" 이렇게 솔직하게 다 말해요?

굉장히 고민을 하고 만들었을 거기 때문에 "구려"라고는 안 하고 "나 이거는 안 들을 것 같다"라고 말해요. 친할수록 그렇게 해요.

화지의 2집 정규앨범 ‘ZISSOU’(왼쪽)와 영감을 받은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오른쪽)화지의 2집 정규앨범 ‘ZISSOU’(왼쪽)와 영감을 받은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오른쪽)

화지의 정규 앨범 2집 'ZISSOU(지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The Life Aquatic With Steve Zissou)에서 따왔다. 앨범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큰 영감을 준 이 영화는 화지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지소는 여행가이자 해양 학자이며 영화감독인 해보고 싶은 건 다 하는 인물이다.

▲인터넷 앨범 설명하는 코너에서 '다 보고 죽자'가 화지의 인생 모토라고 봤어요.

어릴 때 뻥 뚫린 하늘에 별이 엄청 많이 보이는 곳에서 컸어요. 그런 데서 살다 보면 히피 기질이 생겨요. 하기 싫은 거 못하고. 돈 벌면 어디 가고 그렇게 살 거 같아요. 사후세계 이런 건 잘 모르지만 우리가 응애하고 태어나서 '이게 뭐지?' 계속 이렇게 궁금해하다가 죽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오타쿠 라이프가 제일 좋은 삶이에요. 근데 비싸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요.

돈을 많이 벌어서 '21세기 히피가 되자', 제 친구들이랑 자주 하는 말이에요. 마약 하고 그런 히피가 아니라 내가 즐기기 위해서요 하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너무 많아요. 숨이 턱 맞히는 경관이라던지. 그런데 가면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고 톱니바퀴같이 내가 어디에 딱 들어가는구나'라는 느낌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돈 벌어서 쾌락주의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언제 행복한가요?

'내가 뭘 이뤘어' 그런 것보다도 좀 전에 흥이 나서 나왔잖아요. '이거야!' 그런 쾌감이 있는 순간들이 있어요. 계속 지속될 순 없지만 계속 그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아까 그 모임도 서로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와야 서로 시너지가 나고 즐겁잖아요. 행복하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집시걸은 만났나요? (화지의 2집 정규앨범 'ZISSOU'에는 자신의 이상형을 묘사한 'Gypsy Girl'이란 곡이 있다)

집시 같은 사람을 몇 명 만났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저도 히피여서 관계가 게을러지고 지속이 안 돼요. 뭐 그것보다는 복합적인 이유겠지만(웃음) 이상형은 집시인데 만나면 안 돼요. 저만큼 게임 좋아하는 여자가 좋을 것 같아요. '롤' 이런 거 말고 작품으로서 저랑 싸우고 이런 사람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즐기면서 삽시다. 다 힘들지만 추구하고 쫓으면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나한테 아니면 '꺼져' 할 수 있는 본심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K스타 강지수 kbs.kangji@kbs.co.kr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래퍼릴레이⑤] ‘21세기 히피’ 화지 “쾌락주의 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 입력 2017-07-21 14:39:14
    방송·연예
인터뷰를 통해 힙합의 매력을 들여다보는 '래퍼릴레이'의 다섯 번째 주자는 화지(본명 : 송석하, 29)다.

화지는 첫 번째 정규앨범 한 장으로 힙합 신에서 신예 래퍼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2번의 정규앨범을 냈고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두 차례 받았다. 자신이 낸 결과물로 인정받은 래퍼라고 할 수 있다.

화지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리리시스트(lyricist, 서정시인) 래퍼로 손꼽힌다. 그의 랩은 시나 소설에 비유된다. 가사의 서사와 비유가 기발함을 넘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일관적으로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화지의 음악은 그림처럼 생생하지만 화지가 어떤 사람인지 생생하게 설명하는 건 어렵다. 그는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이고, 어두우면서도 밝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히피'의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이상향과 신념에 대한 강한 염원을 드러내며 세상의 기준과 쾌락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힙합의 흔한 주제인 여자나 성에 대해 얘기할 때도 이성과 쾌락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함을 말한다. 인터뷰에서는 "돈 벌어서 쾌락주의합시다. 시간이 없어요"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은 마약, 사치, 육체적 감각 같은 것들과 뉘앙스를 달리했다.

까만색 선글라스를 낀 화지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카페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화지는 작지 않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작업을 하다 나온 그는 아직 음악에 취해있었다.

사진 : 인플래닛 제공
▲흥이 많으신 것 같아요.

아 놀다 와서요. 8월 말에 하는 인플래닛(화지의 소속사) 레이블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다 같이 모여서 제약 없는 창작 세션 같은 걸 하다 왔어요. 다같이 0부터 '이렇게 섞으면 좋지 않을까' 얘기하면서 작업하는 방식이에요. 음악적 이해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시너지가 생기잖아요.

▲콘서트 준비 말고는 또 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안에 나올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너무 진지한 음악 말고 쉬면서 가볍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 펑크적은 요소를 녹였어요. 오넛(O'NUT)과 늘 같이 하는 영소울이랑 셋이 회사에 모여서 현장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또 게임 쪽에 관심이 많아서 반항적인 게임 매체를 준비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게임을 중독이라고 하는데 게임은 영화나 다른 일방적인 매체에서 할 수 없는, 경험하게 하는 그런 대단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본업은 음악이에요(웃음).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건 그냥 취미예요. 모든 제 창작은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말려 죽이는 창작 기운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것도 있고요. 한국이 어떤 면에서 창의적인 사람보다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원하니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발악하면서 사는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은 크게 망하든지 크게 잘 되든지 할 텐데 후자였으면 좋겠어요(웃음).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데, 혹시 부모님도 예술을 하셨나요?

예술을 하진 않았는데 외가 쪽이 정서적으로 예술혼이 있었어요. 다 그쪽으로 하고 싶었지만 억압해서요. 부모님 세대가 그랬잖아요. 다행히 저희 아버지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서포트를 해주셨어요. 근데 솔직히 제가 설득한 것도 있어요. 하고 싶은 건 어느 정도 싸워서 지켜내야 하는 것 같아요.

화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 사진 : 화지 SNS
화지는 5살 때 아버지 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후에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화지는 혼자 미국에 남아 대학 공부를 마쳤다.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힙합을 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 온 친구 영소울이 다니아믹듀오의 'Taxi Driver' 앨범을 들려주면서 한국 힙합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다른 한국 힙합 앨범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 앨범만 5천 번 가까이 들으면서 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래퍼 팔로알토를 보며 긍정적이고 이상향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힙합신에 뛰어들었다.

화지는 친구 영소울(솔자-티)과 2009년 팀 '라디오스타'로 데뷔했지만 영소울이 입대하자 화지 혼자 솔로로 활동했다. 화지는 2012년 EP 앨범 '화지'를 발표했고, 2014년과 2016년에 정규앨범 'Eat'과 'ZISSOU(지쏘)'를 발매했다. 그때마다 손꼽히는 '리리시스트 래퍼'로 호평받으며 2015년,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받았다.

▲첫 EP 앨범이나 정규 앨범 1집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정신병이 있었다'는 얘기도 했는데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순간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괴로운 거예요. 여기가 지옥이고 생존이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지옥이 '내가 살 거야. 넌 죽어' 이런 곳 같아요. 우리 엄마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저도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종교를 갖고 있는데 거기서 가르치는 교리와 세상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정말 지옥 같더라고요. '이게 다였어?' 처음에 그런 실망감이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감정 기복이 좀 있는 편인가요?

나이가 먹다 보니까 조금씩 조절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제는 컨트롤이 많이 돼서 괜찮아요.

▲첫 EP 앨범 타이틀곡이 '격변'인데요. 좀 여린 사람들이 오히려 센 척하는 게 있잖아요. 격변이라는 노래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외로움이 벌이라면 그 또한 나 달게 받을게, 나의 업이라며. 맘을 굳게 걸어잠근 게 //
나쁜 것 만은 아냐. 나를 좋다 하거나 싫다거나 이 모습이 나야. //
근데 때로는 나 밤에 잠을 설쳐. 이대로 괜찮을까, 내 분노가 내 힘의 원천? //
가끔은 나 인간 된 걱정들에 뒤섞여 나를 열어줄 당신을 기다려, 이런 내 격변 속에서"
(EP 앨범 '화지'의 타이틀곡 '격변' 중)

그때 심적으로 힘들었던 걸 솔직하게 풀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저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당시에 래퍼가 항상 세야 되고 그런 게 있었는데 진짜 속마음을 꺼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잘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같은 주제로 만족할 수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이러면서 공감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을 한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테라피에요. 이런 미친놈 같은 생각을 풀어낼 수 있고 이런 거에 동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치유되니까. 그런데 다시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왜요?

음악이 분풀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힙합은 원래 파티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 도구나 삶의 방식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우울하게 안 가고 싶어요. 제가 창작적 기로에서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화지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상을 받았다. / 사진 : 인플래닛 제공
화지는 자타 공인 리리시스트 래퍼다. 리리시스트는 랩을 잘하면서도 가사적으로 뛰어난 래퍼에게 붙는 수식어다. 래퍼의 가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라임 구성 능력, 스토리텔링, 표현 등 전체적으로 작사 능력과 비슷하다. 화지는 한영혼용을 배제 한 깊이 있는 가사와 유려한 플로우가 특징이다.

▲가사에 그렇게 신경 쓰는 이유가 있나요?

큰 의도는 없고 그냥 제가 그런 사람이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듣고 자란 앨범들이 작가주의적인 리리시스트 앨범이어서 메시지가 주는 감동을 좋아해요. 그런데 요새는 일단 듣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데 한편으로 맞는 것 같아요. 저 자체를 타악기라고 생각할 때 악기로서 내가 좋은 악기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그 순간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려고 더 신경 쓰고 있어요. 가사는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하고 그 위에 음악적인 디테일에서 완성도를 더 높이려고 해요.

▲보통 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글 쓰는 걸 좋아하거나 어렸을 때 꿈이 시인이거나 그러던데요.

이거 아니었으면 글 쓰는 일을 했을 거예요. 근데 음악은 듣다 보면 저절로 설득력이 생기잖아요. 그냥 듣다보면 '어 좋다, 뭐지?' 하면서 진지하게 듣게 되고. 그게 신기하지 않아요? 글보다 음악이 세뇌하듯이 전달하는 포맷이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가사를 100% 본심이라고 볼 순 없지만, EP 'Glow in the Dark'의 'Intro'에서 '디스(diss) 안 한다'는 가사를 보고 의아했어요. 방송의 영향인지 몰라도 힙합에서 디스는 한 문화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예전에 했던 거라 가사가 기억이 안 나요.(웃음) 그런데 디스가 문화적 요소는 아닌 것 같아요. 싸우는 게 문화가 아니라 이 문화 안에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다른 기자가 기자분 글이 구리다고 기사로 냈어요. 그럼 다시 기사로 기사를 디스 해야죠. 미국에서는 '내가 랩으로 너의 커리어를 끝내야겠다'는 각오로 디스를 해요. 디스하다가 죽기도 하고요. 그런 게 디스고 우리나라 방송에서 하는 배틀랩은 상대랑 친해도 이 관중 앞에서 상대를 어떻게 농락하느냐의 스킬적인 부분이니까. 제 생각에는 방송에서 하는 배틀랩과 디스는 다른 것 같아요.

▲힙합신에서 가요적인 랩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요. 본인의 곡 '들개'에서도 이런 뉘앙스의 가사를 썼어요.

커머셜한 음악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발 걸치는 게 싫어요. 랩인 이유로 힙합인 척하는 거요. 랩은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그 안에 어떤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차이인데, 진짜 힙합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는 것 같아요. 커머셜 트랙 만들고 돈 벌고 싶은 게 뭐가 나빠요. 근데 힙합이 아닌 걸 해놓고 그래도 난 힙합.. 하니까.

▲힙합 신이 좁은데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요?

이 직업의 장점이 안 맞는 사람들하고는 안 하면 돼요. 강요할 사람이 없다는 게 좋아요.

▲솔직한 성격인 것 같은데 친구의 음악이 별로일 때는 어떻게 해요? "구려" 이렇게 솔직하게 다 말해요?

굉장히 고민을 하고 만들었을 거기 때문에 "구려"라고는 안 하고 "나 이거는 안 들을 것 같다"라고 말해요. 친할수록 그렇게 해요.

화지의 2집 정규앨범 ‘ZISSOU’(왼쪽)와 영감을 받은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오른쪽)
화지의 정규 앨범 2집 'ZISSOU(지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The Life Aquatic With Steve Zissou)에서 따왔다. 앨범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큰 영감을 준 이 영화는 화지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지소는 여행가이자 해양 학자이며 영화감독인 해보고 싶은 건 다 하는 인물이다.

▲인터넷 앨범 설명하는 코너에서 '다 보고 죽자'가 화지의 인생 모토라고 봤어요.

어릴 때 뻥 뚫린 하늘에 별이 엄청 많이 보이는 곳에서 컸어요. 그런 데서 살다 보면 히피 기질이 생겨요. 하기 싫은 거 못하고. 돈 벌면 어디 가고 그렇게 살 거 같아요. 사후세계 이런 건 잘 모르지만 우리가 응애하고 태어나서 '이게 뭐지?' 계속 이렇게 궁금해하다가 죽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오타쿠 라이프가 제일 좋은 삶이에요. 근데 비싸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요.

돈을 많이 벌어서 '21세기 히피가 되자', 제 친구들이랑 자주 하는 말이에요. 마약 하고 그런 히피가 아니라 내가 즐기기 위해서요 하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너무 많아요. 숨이 턱 맞히는 경관이라던지. 그런데 가면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고 톱니바퀴같이 내가 어디에 딱 들어가는구나'라는 느낌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돈 벌어서 쾌락주의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언제 행복한가요?

'내가 뭘 이뤘어' 그런 것보다도 좀 전에 흥이 나서 나왔잖아요. '이거야!' 그런 쾌감이 있는 순간들이 있어요. 계속 지속될 순 없지만 계속 그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아까 그 모임도 서로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와야 서로 시너지가 나고 즐겁잖아요. 행복하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집시걸은 만났나요? (화지의 2집 정규앨범 'ZISSOU'에는 자신의 이상형을 묘사한 'Gypsy Girl'이란 곡이 있다)

집시 같은 사람을 몇 명 만났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저도 히피여서 관계가 게을러지고 지속이 안 돼요. 뭐 그것보다는 복합적인 이유겠지만(웃음) 이상형은 집시인데 만나면 안 돼요. 저만큼 게임 좋아하는 여자가 좋을 것 같아요. '롤' 이런 거 말고 작품으로서 저랑 싸우고 이런 사람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즐기면서 삽시다. 다 힘들지만 추구하고 쫓으면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나한테 아니면 '꺼져' 할 수 있는 본심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K스타 강지수 kbs.kangji@kbs.co.kr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