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휴가지 ‘제주’…예전엔 최악의 ‘유배지’

입력 2017.07.26 (15:03) 수정 2017.07.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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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내 여행지는 어디일까. 한 호텔 예약 사이트 검색 결과를 보면 올해 여름 휴가 여행지로 가장 많이 검색한 곳은 제주도였다. 비행 시간이 짧은 데다 물놀이도 할 수 있는 제주도는 일주일 남짓한 여름휴가 기간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하지만 제주도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탐라국, 삼별초 항쟁, 4.3항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이기도 하다. 제주에 얽힌 역사 이야기와 함께 제주의 속살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KBS 해피FM '김난도의 트렌드 플러스'(7월 19일 방송)에 출연한 반주원 강사는 제주도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소개했다.

제주도의 탄생 설화

과거 제주도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우리나라로 기록되거나 관리됐다고 하기에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 제주도가 우리 역사에 편입되면서 '설문대할망 설화'가 발굴됐다. 키가 정말 큰 할머니가 자기 치마폭에 흙을 실어 날라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다.

한라산은 너무 높아서 7번이나 할망이 치마로 흙을 날라야 했으며 구멍 뚫린 치마 사이로 새어나온 흙이 쌓인 것이 360개의 기생화산 '오름'이다. 한라산을 목침처럼 베개로 썼던 할망은 한라산 봉우리를 뚝 꺾어 집어 던졌는데 그 부분이 산방산이 되고, 움푹 파인 곳은 백록담으로 만들어졌다. 산방산 아랫부분과 백록담 윗부분이 얼추 모양이 맞아 떨어지는 데서 만들어진 설화로 추정된다.

한라산 백록담한라산 백록담

산방산산방산

제주시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의 건국신화가 깃든 곳으로 고(高)·양(梁)·부(夫)의 세 성씨가 솟아올라 그들로부터 제주도 사람들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반 강사는 "대부분 신화의 주인공이 남성 신인데 비해 설문대할망 설화는 여성 신을 다루며 제주의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유배지로 유명했던 제주

지금과 달리 과거 제주도는 척박한 곳이었다. 제주로 부임한 관리들도 "유배 가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했을 정도다. 과거 조정에서 제주의 조세를 걷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제주가 얼마나 험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제주에서는 걷은 조세를 한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뱃길이 험해서 조세로 바친 물건이 바다에 가라앉거나 썩어서 조세를 걷기도 어려웠다. 또한 척박한 제주 주민들을 위해 도내 관청의 유지 비용이나 사신 접대를 위해 쓰라며 조세 자체를 걷지 않은 측면도 있다. 단지 귤처럼 특수한 특산품만 공납으로 걷었을 뿐이다.

이렇게 척박한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 갔던 이들 중 많이 알려진 사람이 추사 김정희다. 그는 제주에서 세한도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로 유배 갔던 이들 중에는 광해군도 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강화로 갔다가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로 가는 동안 천막으로 가려 비밀리에 광해군을 제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관리들이 천막을 거두고 "이곳은 탐라, 제주"라고 말하자 광해군은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하며 눈에서 어마어마한 눈물을 떨구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제주 목사가 "공자께서 만약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을 것입니까?"라고 전한 것으로 문헌에 남아있다.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미워해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 어린 아들들도 제주로 유배 보내버린다. 최연소 유배자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로 유배 당시 4살이었다. 가장 연장자 중에는 84세의 나이로 유배를 간 사람도 있었다. 제주 유배에 나이 제한은 없었다. 구한말 최익현 선생과 박영효 또한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바 있다.

유배객이 사랑한 제주 여자

제주에 가면 '홍랑길'이라는 길이 있다. 홍랑은 홍 씨 성을 가진 낭자라는 의미로 당시 향리로 지내던 이의 딸 홍윤애를 가리킨다.

정조 원년(元年)인 1777년, 조정철이라는 문신 관료가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는 두 해 전에 과거에 급제해 한창 청운의 꿈을 펼치려 하고 있을 무렵, 처가의 일에 연루돼 유배를 가게 된다. 조정철의 장인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데다 일족과 모의해 정조를 시해하려다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집안이 폐가가 되어 몰락하는 과정에서 조정철의 아내는 모든 것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자결했다. 역적 모의죄로 제주로 유배당한 조정철은 독서도 못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핍박을 받게 된다. 행여나 불똥이라도 튈까 봐 아무도 조정철의 주변으로 오지 않던 중 홍윤애는 그를 가엾이 여겨 돕는다. 그러던 중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난다.

문제는 이때 조정철의 숙적이었던 소론의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해와 조정철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홍윤애를 고문하게 된 것이다. 홍 씨는 자신에서 일을 끝내기 위해 자결해버린다.

조정철이 29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정계로 복귀한 건 환갑쯤의 일로 그는 제주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자기 때문에 죽었던 홍윤애의 무덤을 제대로 만들고 비석에 글을 남겨 꽂고, 뒤늦게 딸을 찾아 거두고 호적에 올린다.

홍윤애의 묘. 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홍윤애의 묘. 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라는 비석의 뒷면에 조정철이 홍윤애를 기리며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 형두꽃처럼 빛나리

문헌으로 전해져 오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발견되면서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길 이름 자체가 홍랑길이 된다.

귤 때문에 과거까지 치렀다?!

귤은 진상품으로만 쓰이던 귀한 과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귤이 진상되어 올라올 때를 기념해서 특별히 과거를 보기도 했을 정도다. 모두가 응시하는 과거라기보단 관학이라 불렸던 성균관, 사학인 네 가지 학당 출신들만 따로 보는 시험으로 누런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하는 과거라는 뜻의 '황감제(黃柑製)'로 불렸다. 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 준 뒤 시제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해 장원한 자에게는 바로 전시를 치를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귤은 대단한 특산품이었는데 귤에 대한 권력가들의 집착이 커질수록 제주도민들은 힘들어졌다. 연산군은 워낙 미식가로 알려져, 귤의 수확 시기가 지났는데도 귤을 원하기도 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귤에 가지와 잎이 달린 걸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귤을 한양으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썩거나 손상돼도 제주도민이 벌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 항쟁지 '제주'

제주는 고려 시대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의 최후 항쟁지이기도 하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한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는 지금까지도 당시 군사들이 사용했던 각종 유물이 남아있다.

또한, 제주는 2차 세계대전 패망 위기에 몰린 일본이 마지막 격전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은 제주를 마지막 격전의 진지로 삼아 끝까지 버텨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야욕은 제주도민을 괴롭히게 된다. 제주에 격납고를 만들고 비행장 설치하면서 미군을 막아보겠다며 제주도민들을 노동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알뜨르 비행장은 당시 만들어진 비행장으로 반 강사는 "바람 부는 제주에서 비행장을 닦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제주도민을 시켜 일본 해군 비행장의 부속 시설로 동굴을 만든다. 미군의 공격에 맞서 비행장을 경비하고, 미군 함정 상륙에 대비해 폭탄을 실은 소형 어뢰정을 숨겨두는 용도였다. 폭탄과 몸을 싣고 함정에 부딪쳐 적과 함께 자폭하는 자살특공대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제주 셋알오름 일제 동굴 진지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제주 셋알오름 일제 동굴 진지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제주 셋알오름 동굴 진지 또한 일본군이 연합군을 막아보고자 제주도민들을 시켜 판 동굴 가운데 한 곳이다. 제주에 구축된 동굴 진지는 자연이 아닌 슬픈 역사가 만든 동굴인 셈이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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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의 휴가지 ‘제주’…예전엔 최악의 ‘유배지’
    • 입력 2017-07-26 15:03:28
    • 수정2017-07-26 15: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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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내 여행지는 어디일까. 한 호텔 예약 사이트 검색 결과를 보면 올해 여름 휴가 여행지로 가장 많이 검색한 곳은 제주도였다. 비행 시간이 짧은 데다 물놀이도 할 수 있는 제주도는 일주일 남짓한 여름휴가 기간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하지만 제주도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탐라국, 삼별초 항쟁, 4.3항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이기도 하다. 제주에 얽힌 역사 이야기와 함께 제주의 속살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KBS 해피FM '김난도의 트렌드 플러스'(7월 19일 방송)에 출연한 반주원 강사는 제주도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소개했다.

제주도의 탄생 설화

과거 제주도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우리나라로 기록되거나 관리됐다고 하기에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 제주도가 우리 역사에 편입되면서 '설문대할망 설화'가 발굴됐다. 키가 정말 큰 할머니가 자기 치마폭에 흙을 실어 날라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다.

한라산은 너무 높아서 7번이나 할망이 치마로 흙을 날라야 했으며 구멍 뚫린 치마 사이로 새어나온 흙이 쌓인 것이 360개의 기생화산 '오름'이다. 한라산을 목침처럼 베개로 썼던 할망은 한라산 봉우리를 뚝 꺾어 집어 던졌는데 그 부분이 산방산이 되고, 움푹 파인 곳은 백록담으로 만들어졌다. 산방산 아랫부분과 백록담 윗부분이 얼추 모양이 맞아 떨어지는 데서 만들어진 설화로 추정된다.

한라산 백록담
산방산
제주시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의 건국신화가 깃든 곳으로 고(高)·양(梁)·부(夫)의 세 성씨가 솟아올라 그들로부터 제주도 사람들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반 강사는 "대부분 신화의 주인공이 남성 신인데 비해 설문대할망 설화는 여성 신을 다루며 제주의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유배지로 유명했던 제주

지금과 달리 과거 제주도는 척박한 곳이었다. 제주로 부임한 관리들도 "유배 가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했을 정도다. 과거 조정에서 제주의 조세를 걷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제주가 얼마나 험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제주에서는 걷은 조세를 한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뱃길이 험해서 조세로 바친 물건이 바다에 가라앉거나 썩어서 조세를 걷기도 어려웠다. 또한 척박한 제주 주민들을 위해 도내 관청의 유지 비용이나 사신 접대를 위해 쓰라며 조세 자체를 걷지 않은 측면도 있다. 단지 귤처럼 특수한 특산품만 공납으로 걷었을 뿐이다.

이렇게 척박한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 갔던 이들 중 많이 알려진 사람이 추사 김정희다. 그는 제주에서 세한도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로 유배 갔던 이들 중에는 광해군도 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강화로 갔다가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로 가는 동안 천막으로 가려 비밀리에 광해군을 제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관리들이 천막을 거두고 "이곳은 탐라, 제주"라고 말하자 광해군은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하며 눈에서 어마어마한 눈물을 떨구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제주 목사가 "공자께서 만약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을 것입니까?"라고 전한 것으로 문헌에 남아있다.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미워해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 어린 아들들도 제주로 유배 보내버린다. 최연소 유배자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로 유배 당시 4살이었다. 가장 연장자 중에는 84세의 나이로 유배를 간 사람도 있었다. 제주 유배에 나이 제한은 없었다. 구한말 최익현 선생과 박영효 또한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바 있다.

유배객이 사랑한 제주 여자

제주에 가면 '홍랑길'이라는 길이 있다. 홍랑은 홍 씨 성을 가진 낭자라는 의미로 당시 향리로 지내던 이의 딸 홍윤애를 가리킨다.

정조 원년(元年)인 1777년, 조정철이라는 문신 관료가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는 두 해 전에 과거에 급제해 한창 청운의 꿈을 펼치려 하고 있을 무렵, 처가의 일에 연루돼 유배를 가게 된다. 조정철의 장인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데다 일족과 모의해 정조를 시해하려다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집안이 폐가가 되어 몰락하는 과정에서 조정철의 아내는 모든 것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자결했다. 역적 모의죄로 제주로 유배당한 조정철은 독서도 못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핍박을 받게 된다. 행여나 불똥이라도 튈까 봐 아무도 조정철의 주변으로 오지 않던 중 홍윤애는 그를 가엾이 여겨 돕는다. 그러던 중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난다.

문제는 이때 조정철의 숙적이었던 소론의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해와 조정철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홍윤애를 고문하게 된 것이다. 홍 씨는 자신에서 일을 끝내기 위해 자결해버린다.

조정철이 29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정계로 복귀한 건 환갑쯤의 일로 그는 제주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자기 때문에 죽었던 홍윤애의 무덤을 제대로 만들고 비석에 글을 남겨 꽂고, 뒤늦게 딸을 찾아 거두고 호적에 올린다.

홍윤애의 묘. 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라는 비석의 뒷면에 조정철이 홍윤애를 기리며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 형두꽃처럼 빛나리

문헌으로 전해져 오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발견되면서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길 이름 자체가 홍랑길이 된다.

귤 때문에 과거까지 치렀다?!

귤은 진상품으로만 쓰이던 귀한 과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귤이 진상되어 올라올 때를 기념해서 특별히 과거를 보기도 했을 정도다. 모두가 응시하는 과거라기보단 관학이라 불렸던 성균관, 사학인 네 가지 학당 출신들만 따로 보는 시험으로 누런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하는 과거라는 뜻의 '황감제(黃柑製)'로 불렸다. 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 준 뒤 시제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해 장원한 자에게는 바로 전시를 치를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귤은 대단한 특산품이었는데 귤에 대한 권력가들의 집착이 커질수록 제주도민들은 힘들어졌다. 연산군은 워낙 미식가로 알려져, 귤의 수확 시기가 지났는데도 귤을 원하기도 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귤에 가지와 잎이 달린 걸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귤을 한양으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썩거나 손상돼도 제주도민이 벌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 항쟁지 '제주'

제주는 고려 시대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의 최후 항쟁지이기도 하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한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는 지금까지도 당시 군사들이 사용했던 각종 유물이 남아있다.

또한, 제주는 2차 세계대전 패망 위기에 몰린 일본이 마지막 격전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은 제주를 마지막 격전의 진지로 삼아 끝까지 버텨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야욕은 제주도민을 괴롭히게 된다. 제주에 격납고를 만들고 비행장 설치하면서 미군을 막아보겠다며 제주도민들을 노동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알뜨르 비행장은 당시 만들어진 비행장으로 반 강사는 "바람 부는 제주에서 비행장을 닦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제주도민을 시켜 일본 해군 비행장의 부속 시설로 동굴을 만든다. 미군의 공격에 맞서 비행장을 경비하고, 미군 함정 상륙에 대비해 폭탄을 실은 소형 어뢰정을 숨겨두는 용도였다. 폭탄과 몸을 싣고 함정에 부딪쳐 적과 함께 자폭하는 자살특공대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제주 셋알오름 일제 동굴 진지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제주 셋알오름 동굴 진지 또한 일본군이 연합군을 막아보고자 제주도민들을 시켜 판 동굴 가운데 한 곳이다. 제주에 구축된 동굴 진지는 자연이 아닌 슬픈 역사가 만든 동굴인 셈이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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