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지켜야 하는데…시간이 없네요”

입력 2017.07.2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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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전쟁이다. 할머니가 몇 년 전부터 쌓아두고 있는 고등어를 손댄 것이 화근이다. 색이 노랗게 변한 게 한눈에 봐도 상했는데, 할머니는 기어이 고등어를 다시 통 안에 넣는다.


평소 온화하던 할머니가 이유 없이 욕설을 내뱉고, 밥상까지 엎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손자 정한(27) 씨는 그저 '할머니 성격이 좀 변했나 보다'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할머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싶더니 결국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다.


젊은 시절 그토록 알뜰하던 할머니는 며칠 전 사다 놓은 걸 잊고는 또다시 같은 물건을 사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착이 심한 건 고등어다. 30년 넘게 시장에서 고등어를 팔아 손자를 키운 기억 때문일까. 김치통 몇 개가 전부 고등어인데도 자꾸만 또 다른 고등어를 채워넣는 할머니를 보며 손자는 가슴이 무너진다.

뇌종양과 싸우며 노래하는 '부산의 카우보이'


할머니와 함께 사는 정한 씨의 꿈은 뮤지컬 배우다. TV 속 뮤지컬 배우의 무대를 본 뒤,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 후 무작정 음악 강의 책 저자를 찾아가고, 기회를 얻어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정한 씨는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진단 결과 뇌종양(뇌암) 3급이었다. 지난해 5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종양을 완벽하게 떼어낼 수는 없었다.

가끔 경련이 일 때는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걱정인 건 홀로 남겨질 할머니다.

우리가 사랑할 시간

정한 씨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내가 떠난 후, 술에 의지해 살던 아버지마저 급성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정한 씨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1살 때다.


어릴 땐 할머니가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는데 이제는 정한 씨가 식사를 차리고, 청소하고, 돈을 벌며 할머니를 지킨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할머니를 환히 웃게 만드는 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뽀뽀하고, 그래도 할머니 기분이 좋지 않으면 개그맨이 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손자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노래 연습과 거리 공연도 줄였지만, 정한 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루 세 시간씩 급식 물품 상·하차 일을 하러 나간다.


할머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몸과 마음이 지쳐도 할머니 앞에서 속없이 웃고 노래를 부르는 정한 씨다. 자세한 내용은 7월 29일(토) 낮 12시 10분 KBS 1TV '동행-할머니와 고등어'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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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머니 지켜야 하는데…시간이 없네요”
    • 입력 2017-07-29 08:11:26
    방송·연예
오늘도 전쟁이다. 할머니가 몇 년 전부터 쌓아두고 있는 고등어를 손댄 것이 화근이다. 색이 노랗게 변한 게 한눈에 봐도 상했는데, 할머니는 기어이 고등어를 다시 통 안에 넣는다.


평소 온화하던 할머니가 이유 없이 욕설을 내뱉고, 밥상까지 엎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손자 정한(27) 씨는 그저 '할머니 성격이 좀 변했나 보다'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할머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싶더니 결국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다.


젊은 시절 그토록 알뜰하던 할머니는 며칠 전 사다 놓은 걸 잊고는 또다시 같은 물건을 사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착이 심한 건 고등어다. 30년 넘게 시장에서 고등어를 팔아 손자를 키운 기억 때문일까. 김치통 몇 개가 전부 고등어인데도 자꾸만 또 다른 고등어를 채워넣는 할머니를 보며 손자는 가슴이 무너진다.

뇌종양과 싸우며 노래하는 '부산의 카우보이'


할머니와 함께 사는 정한 씨의 꿈은 뮤지컬 배우다. TV 속 뮤지컬 배우의 무대를 본 뒤,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 후 무작정 음악 강의 책 저자를 찾아가고, 기회를 얻어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정한 씨는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진단 결과 뇌종양(뇌암) 3급이었다. 지난해 5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종양을 완벽하게 떼어낼 수는 없었다.

가끔 경련이 일 때는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걱정인 건 홀로 남겨질 할머니다.

우리가 사랑할 시간

정한 씨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내가 떠난 후, 술에 의지해 살던 아버지마저 급성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정한 씨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1살 때다.


어릴 땐 할머니가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는데 이제는 정한 씨가 식사를 차리고, 청소하고, 돈을 벌며 할머니를 지킨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할머니를 환히 웃게 만드는 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뽀뽀하고, 그래도 할머니 기분이 좋지 않으면 개그맨이 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손자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노래 연습과 거리 공연도 줄였지만, 정한 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루 세 시간씩 급식 물품 상·하차 일을 하러 나간다.


할머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몸과 마음이 지쳐도 할머니 앞에서 속없이 웃고 노래를 부르는 정한 씨다. 자세한 내용은 7월 29일(토) 낮 12시 10분 KBS 1TV '동행-할머니와 고등어'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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