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그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입력 2017.08.0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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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전시 성폭력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남는다.

'KBS스페셜'은 전쟁 속 여성들의 삶을 담기 위해 난징대학살 당시 성폭력 피해자, 식민지 조선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등 한·중·일 3개국 할머니들을 10개월간 밀착 취재했다. 전시 성폭력이 할머니들의 삶에 남긴 상처와 그 상처를 딛고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할머니들의 용기를 그린다.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위안소'를 조직적으로 설립했다. 그 뒤 일본은 한국,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 여성들을 성노예로 강제 동원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한국 피해자 할머니들은 27년째 일본에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이 2015년 타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3일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 한 명인 김군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연관기사]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아베 총리 사죄 표현, 한일 공동 위안부 지원”

이로써 남은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같은 상처를 지닌 이가 하나둘 떠나가도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만 되면 일본 대사관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실로 상상하기 힘든 나날을 보낸 후, 꿋꿋하게 삶을 살아온 그녀들의 목소리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밖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았다.

"끔찍한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한 건 노래"


평양에서 태어난 길원옥(90) 할머니는 13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1945년 해방 후, 귀국선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지만, 망가진 몸과 남루한 행색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타향에서 술집을 전전하며 노래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노예로 지내며 발병한 성병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31살에 들인 양아들은 일본군에게 짓밟혔던 그녀가 애써 삶을 꾸려나갔던 이유였다.


이옥선(91) 할머니는 중국으로 끌려간 또 한 명의 식민지 성노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기력 또한 예전 같지 않지만,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그녀는 1942년 '짐짝'처럼 끌려갔던 위안소를 사형장으로 묘사했다.

해방 이후,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옌볜에서 결혼해 정착했다. 장애를 지닌 아들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간 후, 생계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온 동네 여성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 역할을 하고, 왕복 40리 길을 걸어 다니며 장사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생계와 씨름하면서도 그녀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야학을 다니며 늦은 나이에 글씨를 깨친 이옥선 할머니, 그녀는 여전히 강직하다.

난징대학살 성폭력 증언자 장수홍 할머니

1937년 일본은 중국 침략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수도 난징을 함락한 뒤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난징대학살 기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30만 명, 어린 소녀와 부녀자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의 살육, 난징대학살의 참혹했던 현장을 여성의 시각으로 묘사하고, 전시 성폭행의 만행을 대중에게 당당히 전한 증언자, 장수홍(91)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전한다.


12살의 나이에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겪은 장수홍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KBS스페셜' 카메라에 마지막 증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91세 나이, 병환을 앓고 있던 그녀가 마지막까지 전하려 했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1918년에 태어나 난징대학살 당시 18살이었던 故 리슈잉 할머니. 일본군의 눈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있던 어느 날, 일본군이 지하실로 들어와 옷을 벗기려 하자 그녀는 맨몸으로 격렬하게 싸웠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칼에 37번 찔리고도 살아남았지만, 7개월 된 태아를 잃었다.


이후 그녀는 중국과 일본 등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에서 얼마를 배상받기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얼마를 받기를 원하느냐고요?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살았다면 지금 예순을 넘겼겠죠. 어느 정도 배상받아야 하는지 당신이 답해 보시오."

2004년,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는 딸이 그 증언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남은 여성은 강인하다

'KBS스페셜'이 기획한 '전쟁과 여성-1부 그녀의 목소리'(10일 방송, 1TV)은 단순히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 일본 정부를 향한 싸움의 기록이 아닌, 전쟁으로 짓밟혔던 여성들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본다. 나아가 나약하고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꿋꿋하게 생존해 제 목소리를 낸 그녀들의 강인함을 조명한다.

이어 17일(목) '2부 그녀의 전쟁'은 1940년대 전쟁에 뛰어든 한·중·일 소녀들이 본 전쟁의 참상을, 24일(목) '3부 그녀의 꿈'은 일본과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생겨난 '기지촌'에서 생계를 이어온 여성들의 삶을 담는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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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과 여성’…그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
    • 입력 2017-08-02 16:30:54
    방송·연예
여성들에게 전시 성폭력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남는다.

'KBS스페셜'은 전쟁 속 여성들의 삶을 담기 위해 난징대학살 당시 성폭력 피해자, 식민지 조선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등 한·중·일 3개국 할머니들을 10개월간 밀착 취재했다. 전시 성폭력이 할머니들의 삶에 남긴 상처와 그 상처를 딛고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할머니들의 용기를 그린다.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위안소'를 조직적으로 설립했다. 그 뒤 일본은 한국,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 여성들을 성노예로 강제 동원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한국 피해자 할머니들은 27년째 일본에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이 2015년 타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3일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 한 명인 김군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연관기사]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아베 총리 사죄 표현, 한일 공동 위안부 지원”

이로써 남은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같은 상처를 지닌 이가 하나둘 떠나가도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만 되면 일본 대사관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실로 상상하기 힘든 나날을 보낸 후, 꿋꿋하게 삶을 살아온 그녀들의 목소리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밖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았다.

"끔찍한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한 건 노래"


평양에서 태어난 길원옥(90) 할머니는 13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1945년 해방 후, 귀국선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지만, 망가진 몸과 남루한 행색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타향에서 술집을 전전하며 노래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노예로 지내며 발병한 성병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31살에 들인 양아들은 일본군에게 짓밟혔던 그녀가 애써 삶을 꾸려나갔던 이유였다.


이옥선(91) 할머니는 중국으로 끌려간 또 한 명의 식민지 성노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기력 또한 예전 같지 않지만,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그녀는 1942년 '짐짝'처럼 끌려갔던 위안소를 사형장으로 묘사했다.

해방 이후,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옌볜에서 결혼해 정착했다. 장애를 지닌 아들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간 후, 생계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온 동네 여성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 역할을 하고, 왕복 40리 길을 걸어 다니며 장사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생계와 씨름하면서도 그녀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야학을 다니며 늦은 나이에 글씨를 깨친 이옥선 할머니, 그녀는 여전히 강직하다.

난징대학살 성폭력 증언자 장수홍 할머니

1937년 일본은 중국 침략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수도 난징을 함락한 뒤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난징대학살 기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30만 명, 어린 소녀와 부녀자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의 살육, 난징대학살의 참혹했던 현장을 여성의 시각으로 묘사하고, 전시 성폭행의 만행을 대중에게 당당히 전한 증언자, 장수홍(91)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전한다.


12살의 나이에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겪은 장수홍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KBS스페셜' 카메라에 마지막 증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91세 나이, 병환을 앓고 있던 그녀가 마지막까지 전하려 했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1918년에 태어나 난징대학살 당시 18살이었던 故 리슈잉 할머니. 일본군의 눈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있던 어느 날, 일본군이 지하실로 들어와 옷을 벗기려 하자 그녀는 맨몸으로 격렬하게 싸웠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칼에 37번 찔리고도 살아남았지만, 7개월 된 태아를 잃었다.


이후 그녀는 중국과 일본 등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에서 얼마를 배상받기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얼마를 받기를 원하느냐고요?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살았다면 지금 예순을 넘겼겠죠. 어느 정도 배상받아야 하는지 당신이 답해 보시오."

2004년,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는 딸이 그 증언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남은 여성은 강인하다

'KBS스페셜'이 기획한 '전쟁과 여성-1부 그녀의 목소리'(10일 방송, 1TV)은 단순히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 일본 정부를 향한 싸움의 기록이 아닌, 전쟁으로 짓밟혔던 여성들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본다. 나아가 나약하고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꿋꿋하게 생존해 제 목소리를 낸 그녀들의 강인함을 조명한다.

이어 17일(목) '2부 그녀의 전쟁'은 1940년대 전쟁에 뛰어든 한·중·일 소녀들이 본 전쟁의 참상을, 24일(목) '3부 그녀의 꿈'은 일본과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생겨난 '기지촌'에서 생계를 이어온 여성들의 삶을 담는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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